이수경이 처음 정비열차까지 나온 날, 그는 구조받은 사람처럼 손을 내밀지 않았다. 기지 공동체의 환기표와 전력 사용표, 주민 회의 질문을 들고 왔다. 다친 무릎 때문에 천천히 걸었지만 누구의 부축도 자동으로 받지 않았다.
만남 장소는 안전지대 회의실이 아니라 기울어진 정비열차의 평평한 화물칸이었다. 역 대피소와 기지, 안전지대가 모두 접근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이었다. 작은 학교는 유선으로 참여했다.
민세온은 폐쇄도시 생존조례 요약을 건넸다. 이수경은 읽은 뒤 기지 안에 그대로 적용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 말에 몇몇 안전지대 주민의 표정이 굳었다.
기지는 사고 뒤 스물일곱 명이 두 명씩 전력과 물을 확인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가족 단위 배급을 쓰고 있었지만 독립 거주자의 몫도 따로 있었다. 안전지대 방식과 다르다고 곧 잘못된 체계는 아니었다.
이수경은 특히 외부 공개 원장에 반대했다. 기지 위치와 설비 약점이 알려지면 통제탑 자동 신호뿐 아니라 물자를 노린 사람에게도 위험할 수 있었다. 세온은 모든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공동 통로에 영향을 주는 환기·전력·침수 변화는 공유해야 했다. 어느 공동체의 내부 비밀이 다른 공동체의 호흡과 퇴로를 위험하게 할 때 필요한 최소 범위를 협상했다.
첫 합의 항목은 상호 거부권이었다. 기지는 압력문 개방을 거절할 수 있고 바깥은 누전·환기 위험 때 진입을 거절할 수 있었다. 거부에는 현재 근거와 재확인 시각, 가능한 대체 방법을 붙였다.
이수경은 ‘상호’라는 말이 큰 공동체의 반복 요구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안전지대가 매시간 재확인을 요구하면 기지는 사실상 계속 문을 열 압박을 받는다. 재확인 간격도 기지의 전력 주기에 맞췄다.
작은 학교는 기지의 미성년자에게 학교 이동을 제안했다. 이수경은 선택지를 전달하되 교육을 받으려면 거주지를 옮겨야 한다는 조건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학교는 순회 교재와 유선 수업을 별도 선택으로 준비했다.
차유리는 의료 인계 기록의 범위를 논의했다. 기지 돌봄 담당이 현재 상태와 필요한 보조를 전달하고, 이동 뒤 결과는 당사자 동의 범위에서 기지에 돌아갔다. 의료 정보를 통행 대가로 요구하지 않았다.
정윤호는 도시 연속운영 자료를 기지에 공유하려 했다. 이수경은 상급 통제 문서를 받은 적이 있고 그 문서 때문에 자동문이 닫혔다고 말했다. 원본 전체보다 자기 구간과 연결된 명령·기록을 먼저 보겠다고 했다.
하린은 기지 통신 로그의 공동 보관을 제안했다. 이수경은 원본은 기지에 남기고 확인 값과 공개 가능한 사본만 나누겠다고 했다. 안전지대가 원본 보관 기준을 독점하지 않았다.
정비열차 화물칸에서는 그 순간 낮은 떨림이 느껴졌다. 분기기 쪽 전력이 다시 흔들린 것이다. 회의자는 합의문을 두고 모두 정해진 마른 통로로 빠져나갔다.
역 대피소 기술자가 누전 잠금과 배수 회로를 확인했다. 기지 쪽 팬에는 영향이 없었지만 열차 조명이 꺼졌다. 회의는 손전등 아래서 계속하지 않고 설비 안정 뒤 재개했다.
이수경은 이 중단이 기지 규칙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결정을 끝내야 한다는 이유로 시설 경고를 미루지 않는다. 세온은 그 원칙이 안전지대의 중단 기준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다른 점도 있었다. 기지는 작업 책임자를 하루가 아니라 설비 주기별로 바꿨고, 경험 많은 사람이 최종 거부권을 가졌다. 안전지대는 두 거점 공동 확인을 더 중시했다.
두 방식은 공동 구간에서 충돌했다. 결국 기지 기술자의 현장 중단과 바깥 측정자의 중단을 모두 인정하고, 재개는 양쪽 확인이 있어야 가능하도록 했다. 최종 한 사람을 정하지 않았다.
오도혁은 물자 운송 인계표를 제안했다. 기지에서 받은 필터와 안전지대가 보낸 부품을 품목·상태·반환 또는 소모로 구분했다. 발견자나 운반자가 소유권을 얻지 않았다.
이수경은 기지 사람들이 바깥 물자를 받으면 안전지대에 빚진 주민으로 취급될까 걱정했다. 세온은 공동 부담과 자치 편입을 구분하는 문장을 합의서에 넣었다. 물자 수령은 조례 가입이나 지휘 복종을 뜻하지 않았다.
하린 오빠도 유선으로 회의에 참여했다. 그는 하린과 재회하고 싶지만 기지의 운행 기록을 안전지대에 모두 넘기는 데는 반대한다고 말했다. 가족 관계가 정보 소유 결정을 대신하지 않았다.
하린은 그 의견을 받아 적고 공개 가능한 범위를 되물었다. 오빠는 자기 마지막 운행표 사본과 구조 경로는 공유하되 다른 기지 주민의 개인 기록은 당사자가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학교 교사는 기지 아이들의 이름을 묻지 않고 필요한 책과 조명 시간만 물었다. 이수경은 유선 수업을 시험한 뒤 아이들과 보호자가 계속할지 정하겠다고 답했다. 지원 제공자가 선택을 회수할 권리는 없었다.
저녁에는 첫 물자 인계가 이뤄졌다. 필터 두 개와 배수 접점 부품, 빈 의료 봉투가 정비열차에서 서로 확인됐다. 사용 가능 여부는 기지 기술자가 설치 뒤 보고하고, 맞지 않으면 반환하기로 했다.
안전지대 주민 한 명이 스물일곱 사람을 모두 데려오면 관리가 쉬울 것이라 말했다. 이수경은 관리되기 위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고 답했다. 세온은 그 말을 합의 기록에 그대로 남겼다.
기지 내부에는 잔류를 원하는 사람과 이동을 원하는 사람이 함께 있었다. 이수경은 자신도 영구 대표가 아니며 일주일 뒤 회의에서 역할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바깥이 그를 유일한 지도자로 고정하지 않았다.
합의서에는 대표 교체 때 인계할 항목이 생겼다. 통로 상태, 전력·환기 창, 미완료 운송, 이의 제기였다. 사람의 신뢰만으로 연결로가 유지되지 않게 했다.
정윤호는 상급 통제탑 기록을 함께 읽는 공동 검토를 제안했다. 이수경은 기지 자동문 작동 시간과 맞춰 볼 수 있다며 동의했다. 그러나 기지 위치 전체 도면은 필요한 구간만 가려서 제공하기로 했다.
회의 끝에 안전지대 조례 전문은 채택되지 않았다. 대신 상호 거부권, 필요한 정보 공유, 물자와 사람의 인계 확인, 당사자 동의 네 항목만 공동 문서가 됐다.
이수경은 서명 대신 기지 회의 확인 번호를 적었다. 개인 대표가 공동체를 영구 구속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세온도 자기 이름 하나가 아니라 안전지대 공개 회의 날짜와 참여 수를 적었다.
정비열차 문밖에서 하린은 이수경에게 오빠를 돌봐 준 데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수경은 오빠도 다른 사람을 돌봤고 누구도 빚을 계산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감사는 통행권이나 자치권의 대가가 되지 않았다.
밤의 열차에는 다른 지도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세온은 공개 방송에서 이수경을 기지 대표로만 불렀고 임기와 회의 제한을 함께 설명했다. 새로운 중앙 권력의 얼굴을 만들지 않았다.
첫 합의 뒤에도 기지는 닫힐 수 있었고 안전지대는 진입을 거절할 수 있었다. 연결은 문을 항상 열어 두는 상태가 아니라, 닫는 이유와 다시 묻는 시간을 서로 알 수 있는 상태였다.
새벽에 기지 팬 점검으로 다음 운송이 하루 미뤄졌다. 누구도 약속 위반이라 부르지 않았다. 이수경은 변경 이유와 다음 확인 시각을 보냈고 세 공동체는 같은 공개표를 수정했다.
정비열차 화물칸의 합의서는 세 사본으로 나뉘었다. 어느 곳도 원본 하나를 독점하지 않았고, 각 공동체의 이의란은 비워 두었다. 다른 규칙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쓰는 선로에는 복종보다 계속 수정할 수 있는 연결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