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유리가 종이 봉투를 공동 기록실에 가져온 날, 그는 문부터 닫지 않았다. 당사자가 원하면 나갈 수 있도록 창가 탁자를 골랐고, 기록 확인자 은별과 내부 의료조 한 명만 곁에 앉혔다.
봉투 안에는 성산병원에서 가져온 실험 대응 명단 사본이 있었다. 병동을 비우던 날 밀봉 상자 밑에서 발견했지만, 이름과 알 수 없는 기호가 섞여 있어 유리는 곧장 공개하지 않았다.
“숨긴 겁니까?” 정윤호가 물었다.
유리는 그렇다고 답했다. 개인 의료 정보일 수 있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어떤 기준으로 언제 다시 열지 공동 기록에 남기지 않은 것은 자기 판단이었다. 그는 보호하려던 선택과 혼자 보류한 책임을 따로 인정했다.
봉투를 꺼낸 이유는 새 입소자 임수아가 병원 팔찌 조각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수아는 봉쇄 전 공업지대 근무자 대상 건강 관찰에 참여했고, 성산병원에서 주사 한 번과 여러 검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약 이름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명단의 열두 번째 줄에는 임수아라는 이름이 있었다. 옆 칸에는 ‘대응 관찰’, 날짜, 짧은 기호 세 개가 적혀 있었다. 기호의 뜻을 설명하는 표는 사본에 없었다.
수아는 자기 줄을 직접 읽었다. “이게 내가 감염됐다는 뜻입니까?”
차유리는 아니라고 답하지도, 맞다고 답하지도 않았다. 명단 제목만으로 접종 여부와 감염 상태를 알 수 없고, 수아의 기억 속 주사가 어떤 물질이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소문은 기록실보다 빨랐다. 문밖에서 누군가 ‘실험 백신 명단이 나왔다’고 말했고, 곧 차고 사람 몇 명이 수아와 같은 구역에서 지내도 되는지 물었다. 그들은 공격하려는 표정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민세온은 명단 원본을 광장에 붙이지 않았다. 대신 확인된 문서의 존재, 제목, 해석표 부재, 당장 취할 행동이 없다는 사실을 공동 방송에 내보냈다. 개인 이름은 당사자 동의 없이 말하지 않았다.
수아는 자기 이름을 공개해도 된다고 했다. 유리는 그 동의가 공포 속에서 강요된 것은 아닌지 시간을 두고 다시 물었다. 공개하지 않아도 처치와 배급, 거주 자리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먼저 확인했다.
한 시간 뒤 수아는 선택을 유지했다. “내 이름을 숨기면 다른 줄에 있는 사람 전부가 더 의심받을 것 같아요. 대신 내가 병을 퍼뜨린다는 식으로 읽히지 않게 해 주세요.”
은별은 수아가 허용한 범위를 원장에 적었다. 이름과 명단 등재 사실은 공개, 세부 의료 진술은 지정 담당자만 확인, 언제든 공개 범위를 바꿀 수 있음. 동의는 한 번 쓰고 끝나는 열쇠가 아니었다.
유리는 종이를 네 장으로 나눴다. 첫째는 명단 등재, 둘째는 실제 주사 또는 복용을 확인할 자료, 셋째는 공업지대 분진·연기 노출, 넷째는 증상이 시작된 시각과 변화였다.
임수아의 첫째 칸에는 확인이 들어갔다. 둘째에는 본인 진술과 팔찌 조각이 있지만 물질명 미확인, 셋째에는 공업지대 외곽 근무와 폭발 당일 귀가 진술, 넷째에는 며칠간 눈 따가움이 있었으나 현재 호흡 악화 없음이 적혔다.
네 칸은 한 줄의 원인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주사를 맞아서 증상이 생겼다는 결론도, 주사를 맞았으니 안전하다는 결론도 만들지 않았다. 차유리는 관찰·기본 처치·전문 인계 범위만 맡았다.
박무성의 병원 차트 사본도 대조했다. 공업지대 연기 노출과 폐 손상 기록은 있었지만 실험 대응 명단 사본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접종을 받지 않았다고 확정할 수도 없었다.
박미숙은 명단에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안도 표처럼 쓰지 말아 달라고 했다. 목록 밖이라는 말이 감염 가능성 없음으로 바뀌면 또 다른 선별표가 생길 수 있었다.
하린은 문서 생성 시각을 확인하려 했지만 사본의 머리글 일부가 잘려 있었다. 서버에 접속해 원본을 가져오는 일도 불가능했다. 남은 것은 병원 상자 번호와 인쇄 형식, 유리의 발견 시각이었다.
정윤호는 정부 배포 문건에서 ‘실험 대응 관찰군’이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관찰군에는 접종자뿐 아니라 접촉자와 비교 대상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원본이 없으므로 기억 진술이라고 표시했다.
박선묵은 과거 수용표에서 같은 기호 일부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안전지대가 실험 대응 관찰소와 연계됐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선묵 자신도 기호 뜻까지 알았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의 책임 범위를 재난 원인 전체로 부풀리지 않았다.
광장 설명회에서 한 주민이 명단 사람을 별도 구역에 두자고 제안했다. 차유리는 문서 한 줄이 현재 증상과 노출을 대신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분리가 필요하면 당장 확인한 호흡·의식·노출과 재평가 시각을 근거로 해야 했다.
임수아는 사람들 앞에 서지 않고 공동실 스피커로 자기 말을 전했다. 주사를 맞은 뒤 하루 동안 팔이 아팠고, 폭발 뒤 눈이 따가웠으며, 어느 것도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고 했다. 모른다는 당사자의 말도 기록에 남았다.
소문을 낸 사람은 명단을 직접 보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는 차고에서 ‘열두 번째 줄’이라는 말을 듣고 열두 명의 감염자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숫자는 사람 수가 아니라 문서 줄 번호였다.
하린은 방송에 그 정정을 내보냈다. 감염자 열두 명 확인이 아니라, 열두 번째 줄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확인됐다는 사실. 다른 줄의 인원과 상태는 아직 검토하지 않았고 공개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분명히 했다.
남은 이름을 당장 모두 부르자는 요구가 나왔다. 은별은 당사자가 거점에 있는지, 동명이인인지, 공개를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름을 읽는 것이 구조가 아니라 낙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명단은 세 사람의 입회 아래 다시 봉인됐다. 원본 사본은 공동 기록실, 읽기 전용 사진은 북서 의료소에 보냈다. 북서 의료소에는 기호표와 관련 자료를 찾되 개인 이름을 공개 채널에 답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임수아의 현재 생활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차고 구역에서 저녁 배식 원장을 맡았고, 눈 자극이 다시 생기면 의료조에 알릴 확인 시각을 정했다. 이름 공개가 자원 우선권이나 의무 노동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유리는 자기 보류 기록을 별도 심의에 올렸다. 개인정보를 지키려 한 사유는 인정됐지만, 문서 존재와 재검토 조건을 아무에게도 넘기지 않은 문제도 남았다. 앞으로 민감 문서는 내용 대신 존재·보관자·개봉 조건을 공동 원장에 쓰기로 했다.
그날 밤 북서 의료소에서 짧은 답이 왔다. 같은 양식 일부를 본 적은 있으나 기호표가 없어 접종·비접종을 구분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명단이 진실을 다 풀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외부 확인으로도 같았다.
세온은 공업지대 폭발 신고가 담긴 외장 저장소를 만졌다. 명단과 신고 로그를 바로 한 원인선으로 잇지 않았다. 서로의 날짜와 장소를 대조할 준비 목록에만 넣었다.
임수아는 자기 줄이 적힌 사본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이 종이가 나를 설명하는 게 아니군요.”
차유리는 종이가 설명할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을 나눠 주는 도구라고 답했다. 수아는 그 말을 듣고 공개 원장에서 자기 이름 옆 ‘감염 여부 미확인’ 문구를 ‘현재 증상과 원인 별도 관찰’로 고쳤다.
백신 명단의 열두 번째 줄은 사람을 분리하는 선이 되지 않았다. 대신 접종, 노출, 증상, 문서의 출처를 다시는 한 칸에 넣지 않게 만드는 네 갈래 질문이 됐다.
기록실 문이 닫힐 때 봉투 바깥에는 다음 개봉 조건이 적혀 있었다. 기호표 확보, 당사자 확인, 의료 담당과 기록 담당 동시 입회. 그 전까지 명단은 결론이 아니라 조심해서 이어야 할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