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로비의 옛 경영진 명패를 내리는 날, 외부 철거업체가 아침 일찍 들어왔다. 가장 큰 금속 글자는 차준석 이름이었다. 그 아래에는 역대 회장과 대표들의 이름이 연도별로 붙어 있었다.
기자들은 한이겸이 직접 첫 나사를 풀기를 원했다. 복수의 상징이 될 사진이었다. 이겸은 거절했다. 철거는 전문 작업자의 일이었고, 판결은 이미 법원 기록에 남아 있었다.
윤해진은 로비를 폐쇄 구역으로 만들고 낙하물 안전선을 확인했다. 직원들이 출근길에 사진을 찍으려 몰리지 않게 작업 시간을 조정했다.
철거업체 직원은 명패 뒤 벽 안에 전선이 있는지 물었다. 시설 도면에는 없었지만 정전 사고 뒤 만든 최신 도면을 다시 확인했다. 오래된 조명 회선 하나가 지나고 있었다.
전원을 차단하고 작업이 시작됐다. 금속 글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작업자 셋이 리프트에 올려 천천히 내렸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직원 한 명은 이름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통쾌하다고 했다. 다른 직원은 그 이름 아래서 일했다는 이유로 자기 경력도 부끄러워질까 걱정했다. 해진은 어느 감정도 바로잡지 않았다.
이겸은 차준석 이름이 바닥에 놓인 순간 첫 생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을 죽게 만든 구조의 맨 위 이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사람은 판결과 경영 배제 상태였고 철판은 더 이상 책임을 늘리지 않았다.
명패를 어디에 보관할지 논쟁이 생겼다. 이사회는 역사관에 두자고 했고 직원 대표는 영웅과 악당을 전시하는 공간이 필요 없다고 했다.
서다온은 명패 자체에 법적 증거 가치는 없다고 했다. 회사 자산으로 매각하거나 폐기할 수 있었다. 다만 철거·처분 기록은 건물 인계 문서에 남겨야 했다.
민가온은 사진과 위치 기록만 최소 보존하고 금속은 재활용하자고 제안했다. 호기심을 위한 영구 전시가 아니라 건물 변경 이력으로 충분했다.
직원 대표는 벽을 비워 두지 말자고 했다. 곧 건물이 새 소유자에게 넘어가는데, 또 다른 경영자 이름을 크게 걸면 같은 문화를 반복할 수 있었다.
새 건물 소유자는 로비를 공동 업무공간으로 바꿀 계획이었다. 개인 명패 대신 입주 조직과 안전·이용 안내를 걸겠다고 했다. 태성의 역사 전시는 별도 공개 기록으로 남겼다.
이겸은 자기 이름이나 감사팀 사진도 걸지 말라고 했다. 옛 권력 이름을 내린 자리에 새 영웅을 세우는 것은 완결이 아니었다.
철거 중 작은 석판 하나가 뒤에서 나왔다. 창립 문구와 초대 회장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기자들은 숨겨진 유물이라고 했지만 시설 기록에는 과거 리모델링 때 덮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팀은 새 비밀의 단서로 취급하지 않았다. 건물 역사 자료로 사진을 남기고 소유자에게 처분 선택을 넘겼다. 원본 기록과 책임에 아무 영향이 없었다.
명패 철거 비용은 건물 매각 계약에 포함돼 있었다. 이사회는 비용 절감을 위해 나머지 직원 안내판도 함께 없애자고 했다. 해진은 대피·채권·전환 창구 안내는 마지막 날까지 필요하다고 막았다.
벽에서 내려온 것은 경영진 이름뿐이었다. 직원이 길을 찾는 표지는 남았다.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유지할지 목적별로 구분했다.
한 퇴직 예정 직원이 이겸에게 물었다. “이제 이긴 겁니까?”
이겸은 빈 벽을 보았다. “판결은 이미 끝났습니다. 오늘은 건물 인계 중 한 작업이 끝난 겁니다.”
직원은 실망한 듯 웃었다. 영웅적인 답을 기대했을 수 있었다. 이겸은 그 기대를 채우지 않았다.
다음 소유자는 건물 리모델링 계획을 공개했다. 공용 로비, 지역 창업 공간, 독립 감사센터 임시 사무실 일부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현재 시설 직원 중 희망자는 새 관리업체 채용에 지원할 수 있었다.
직원 대표는 우선 채용이 강제 전환이 되지 않게 조건과 임금을 먼저 공개하라고 했다. 새 소유자는 경력 인정과 면접 절차를 문서로 냈다.
기록센터는 로비 벽에 있던 이름 목록을 회사 연혁 자료로 옮겼다. 판결 사실과 경영 배제는 공개 기록에 연결됐지만 후손이나 가족 정보는 넣지 않았다.
차준석 이름 사진은 검색 가능한 기록에 남았다. 삭제해 역사를 지우지도, 크게 전시해 악당 신화를 키우지도 않았다. 확인된 직위와 기간, 책임 판단만 있었다.
철거업체는 금속을 무게별로 분류했다. 재활용 대금은 해산 신탁의 시설 정리 비용에 들어갔다. 작은 금액도 사용처가 공개됐다.
한 기자는 장승민 이름이 왜 벽에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공식 대표 명패 대상이 아니었다. 이겸은 그 질문을 새 상징으로 만들지 않았다. 책임은 명패 크기가 아니라 판결과 기록에 있었다.
해진은 철거 작업 안전 점검표를 확인했다. 나사 하나가 벽 안으로 떨어졌지만 위험은 없었다. 작업자는 벽을 봉합하고 완료 사진을 남겼다.
오후가 되자 로비 벽은 흰색 직사각형 자국만 남았다. 명패가 있던 곳과 주변 벽의 색이 달랐다. 새 소유자는 리모델링 때 칠하기로 했다.
이겸은 그 자국을 지우지 말자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상처를 영구히 전시하는 것이 기억의 유일한 방식은 아니었다. 판결과 감사 기록은 건물 벽보다 안전한 곳에 있었다.
직원들은 퇴근하며 빈 벽을 한 번씩 봤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지나쳤다. 어느 행동도 충성이나 배신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가온은 로비 카메라 영상을 사건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지 않았다. 작업 완료 확인에 필요한 구간만 시설 문서로 남기고 직원 얼굴이 담긴 나머지는 정해진 기간 뒤 삭제했다.
다온은 건물 소유권 이전 문서에 로비 철거 완료와 남은 안전 안내물 목록을 붙였다. 다음 소유가 무엇을 넘겨받는지 작은 표지까지 확인했다.
해진은 명패 철거를 폐쇄 감사 성과로 세지 않았다. 안전 사고 없이 건물 인계 작업 하나가 끝났다고만 기록했다. 책임 판결은 오래전에 끝난 별도 항목이었다.
철거 뒤 드러난 벽에는 오랫동안 명패에 가려 있던 배선 점검구가 있었다. 시설팀은 다음 소유자와 함께 전원을 끄고 안쪽을 확인했다. 낡은 피복 하나를 교체한 뒤 작업 전후 사진과 차단 위치를 건물 인계서에 붙였다.
로비 안내 직원은 마지막 근무일까지 방문자가 차준석을 찾을 때마다 사건 설명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해진은 개인에게 해설자 역할을 맡기지 않고, 법인 해산과 문의 창구만 적은 안내판을 세웠다. 직원은 과거 경영자의 이름을 반복하지 않고 현재 필요한 길을 안내했다.
새 건물 소유자는 빈 벽을 광고판으로 쓰기 전 한 달 동안 해산 안내를 유지하기로 했다. 협력사와 퇴직자가 잘못 찾아와도 독립 센터 주소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소유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남은 질문을 문밖으로 밀어내지 않았다.
명패 금속은 다른 폐기물과 함께 무게를 재어 반출됐다. 누군가 기념품으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자산 담당자와 직원 대표가 수량을 확인했다. 처분 대금은 크지 않았지만 해산 신탁에 들어갔고 내역이 공개됐다.
이겸은 철거 기사에게 그 조각을 따로 보관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름을 붙잡아야 책임이 남는 것이 아니었다. 판결문과 환수 내역, 피해자의 정정 기록이 이미 각자의 정당한 장소에 있었다.
이겸은 로비 문을 나서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차준석 이름이 내려간 날 무너진 것은 철판 한 조각의 권위였다. 건물과 직원과 기록의 다음 소유를 정하는 일은 아직 계속됐다.
빈 벽에는 임시로 해산 일정과 직원·협력사 문의 창구가 붙었다. 과거 경영자의 이름보다 오늘 필요한 전화와 날짜가 사람들의 눈높이에 놓였다. 그것이 로비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