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범 운영 첫 정기회의 날, 회의실 자리표가 바뀌었다. 탁자 정면에는 윤해진의 이름이 있었고 한이겸은 오른쪽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서다온과 민가온도 직급이 아니라 역할 순서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해진은 개회를 선언하기 전에 지난 결정 이행부터 확인했다. 가림 오류 복제 파일 두 건의 회수 상태, 보호 대상 연락 중단, 분석 서버 목적 분리, 법원 봉인자료 재심사 날짜. 화해의 말은 의제에 없었다.
가온은 복제 파일 한 건이 삭제 확인됐고 다른 한 건은 운영자가 연락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즉시 해결됐다고 꾸미지 않고 검색 색인 차단과 추가 모니터링 상태를 설명했다.
다온은 진행 중 등록 심리의 증인 보호 때문에 검증본 한 문장의 공개를 한 달 더 미뤄야 한다고 했다. 연장 사유와 새 검토 날짜가 공동 운영표에 올라갔다.
이겸은 미루는 데 반대 의견을 냈다. 권한자의 결정 문장만 분리하면 공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해진은 양쪽 근거를 정리해 가온의 재식별 검토와 외부 위원 판단으로 넘겼다.
예전 같으면 팀장과 실무자의 의견 충돌로 보였을 장면이었다. 지금은 두 안건 번호와 검토 기한이 남았다. 누구도 목소리를 낮추거나 상급자 뜻을 읽지 않았다.
첫 표결에서 이겸의 안은 두 표, 다온의 안은 두 표를 받았다. 해진에게 캐스팅보트가 없었다. 동수일 때는 되돌리기 어려운 공개를 잠시 멈추고 하루 안에 외부 위원 판단을 받는 규칙이 작동했다.
이겸은 패배도 승리도 아니라고 기록했다. 자신의 유보 의견에는 공개 지연이 공익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해 달라는 조건을 넣었다. 다온도 연장이 보호에 실제 필요한지 증인 심리 뒤 재검토하겠다고 적었다.
직원 대표는 시범 운영의 첫 주 지연 시간이 예상보다 길다고 지적했다. 해진은 변명하지 않고 처리 시간표를 공개했다. 법률 검토보다 자료 분류 인계에서 시간이 많이 걸린 사실이 드러났다.
가온은 분류 인력을 늘리는 대신 반복 요청이 많은 자료의 검증본을 미리 만들자고 했다. 해진은 미리 만든 검증본이 목적을 앞질러 과잉 수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둘은 공개 요청이 세 번 이상 반복된 항목만 후보로 삼기로 했다.
다온은 자기 회피 비용도 운영표에 넣었다. 외부 변호사 준비 시간과 법원 심리 지연이 숫자로 보였다. 통제 장치가 실제 자원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이겸은 개인 거부권 삭제 뒤 느낀 불안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공동 규칙이 놓친 위험을 찾는 감사 항목을 제안했다. 권한을 잃은 사람의 감정을 규칙 복구 근거로 쓰지 않았다.
해진은 제안을 받아들여 분기 외부 감사 항목에 ‘동수 지연’, ‘위원 이해충돌’, ‘소수 의견 반영’을 추가했다. 이겸의 경험은 명령이 아니라 한 표의 개선안으로 들어갔다.
점심 전에 보호기관에서 강승표의 연락 중단 상태 확인이 왔다. 팀은 회신을 회의에서 읽지 않고 시스템 상태만 갱신했다. 당사자의 삶은 회의 서사의 재료가 아니었다.
박재현 관련 공개본 대체 자료표는 시민검증자의 첫 검사를 통과했다. 원진술을 열지 않고도 결재 사슬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이겸은 검증 결과에 공동 확인 표시를 했다.
그는 해진에게 “당신 말이 맞았어요”라고 하지 않았다. 해진도 승리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특정 사례에서 보호안이 작동했다는 사실만 운영 기록에 남겼다.
오후에는 공개본 확대 이의가 들어왔다. 태성 인수에 관심 있는 투자연구소가 사업장별 감사 이행 자료를 요구했다. 직원 대표는 그것이 폐쇄 순위에 쓰일 수 있다고 즉시 반대했다.
가온은 요청 목적이 공익 검증인지 투자 판단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했다. 연구소는 공개 자료 연구라고 설명했지만 최근 인수 후보에게 자문한 경력이 있었다. 이해충돌 심사가 필요했다.
다온은 해당 연구소를 시민검증자가 아니라 인수 관계자로 분류했다. 공개본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검증본 접근은 제한했다. 별도 실사 자료는 고용 보호 조건 아래 제공하도록 했다.
이겸은 자료를 제한하면 투자자가 회사를 더 낮게 평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해진은 사람의 보호 정보를 가격 협상에 내놓는 방식으로 가치를 높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다시 합의하지 못했다.
해진은 논쟁을 멈추지 않고 의제로 고정했다. ‘인수 실사와 공익 검증의 경계.’ 외부 투자·노동·기록 전문가가 참여하는 별도 공개 심사를 열기로 했다.
바로 그때 이사회에서 긴급 공문이 도착했다. 태성지주의 신용등급 하락과 계열사 자금 압박으로 공개 매각·분할 검토를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예비 인수 의향서 접수 날짜도 적혀 있었다.
공문 부속표에는 계열사별 현금 부족 예상일이 있었다. 가장 빠른 곳은 두 달 뒤였고, 협력사 지급일은 그보다 먼저 돌아왔다. 매각은 먼 경영 의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다음 급여와 납품 대금에 닿아 있었다.
직원 대표는 인수 협상 전에 긴급 자금 운용표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이겸은 동의하되 사건 원본과 섞지 말자고 했다. 과거 범죄의 공포로 현재 재무 판단을 밀어붙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독립 조사와 공개 규칙의 논쟁이 곧 실제 고용과 자산 매각 앞에서 시험받게 됐다. 직원 대표는 공문을 읽자마자 협력사 대금과 퇴직금 보호를 먼저 물었다.
이겸은 과거라면 태성이라는 이름이 무너지는 것을 복수의 완성으로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떠오른 것은 구내식당의 낮은 목소리와 자료관리 계약직, 납품을 기다리는 협력사였다.
해진은 인수 검토 공문을 사건 자료와 같은 폴더에 넣지 않았다. 새 회사법·고용·기록 승계 사건번호를 열고, 기존 판결과 외부 조사 결과는 참조만 연결했다. 끝난 범죄를 매각의 새 음모로 되살리지 않았다.
가온은 인수 후보가 요구할 수 있는 자료 목록을 네 갈래 공개안에 맞춰 분류했다. 공개본은 동일하게 제공하고, 검증본과 원본은 매수 가격 산정에 쓰지 못하게 했다. 고용·채무·통제 이행 자료는 별도 실사본을 만들기로 했다.
다온은 매각 계약에 사건 원본 보존과 제보자 보호 의무가 승계돼야 한다고 말했다. 법인이 나뉘면 어느 회사가 기록 책임을 갖는지 미리 정하지 않으면 자료가 사이에 떨어질 수 있었다.
직원 대표는 인수 협상 참관권을 요구했다. 이사회는 기밀을 이유로 난색을 보였지만 해진은 고용 조건과 자료 이용 원칙만큼은 노동자 대표가 검토해야 한다고 지지했다.
이겸은 회의를 서둘러 끝내고 이사회로 가자고 하지 않았다. 해진이 진행 중인 의제와 결정 사항을 모두 읽고, 다음 회의 책임자를 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긴급하다는 말이 새 규칙을 건너뛰는 열쇠가 되지 않게 했다.
회의 종료 표결은 네 표 모두 찬성이었다. 인수 자료 분리, 고용·채무 보호 의제, 기록 승계 조건, 노동자 대표 참여를 즉시 준비한다. 각 항목에는 담당자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분야씩 배정됐다.
해진은 다음 회의도 자신이 진행한다고 알렸다. 이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자리표를 접지 않았다. 한 표를 가진 조사자라는 자리가 작아 보이지 않았다.
회의 진행 기록에는 해진이 안건을 배분하고 동수 처리 규칙을 적용한 과정이 남았다. 팀장 대행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새로운 자리는 사람을 대신하는 직함이 아니라 공동 규칙을 실제로 움직이는 역할이었다.
네 사람은 다시 같은 방에 있었지만 예전과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감정적으로 화해했다는 선언은 없었다. 서로의 거부권을 규칙으로 바꾸고, 빠진 사람 없이 일을 이어갈 방법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창밖 전광판에 태성 공개 매각 검토 공시가 떠올랐다. 이겸은 무너지는 회사 이름보다 그 아래 작은 글씨의 분할 절차를 읽었다. 다음 장부는 복수를 위한 이름 명단이 아니라, 팔리는 자산 사이에서 사람과 책임이 빠지지 않게 하는 조건표가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