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공개안 심사 전날 밤, 한이겸은 오래 잠들지 못했다. 첫 생에서 자신이 죽은 뒤 태성 장부 일부가 익명 게시판에 흘러나왔던 장면이 떠올랐다. 진짜 숫자와 거짓 이름이 섞여 직원들이 서로를 의심하던 겨울이었다.
그 기억은 현재 사건 기록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이겸은 이미 죽었고, 이후 장면은 죽기 전 예상과 들은 소문이 뒤엉킨 파편에 가까웠다. 무엇이 실제였는지 스스로도 증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억은 강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원본을 넓게 공개하면 무관한 직원 명단이 구조조정에 쓰일 수 있다는 해진과 가온의 우려가 첫 생의 이미지와 겹쳤다. 이겸은 당장 공개 반대 쪽으로 표를 바꾸고 싶었다.
그는 새벽 두 시에 해진에게 연락하려다 손을 멈췄다. 미래 기억을 이유로 순서를 정하지 않는다는 규칙은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단서 전용, 입증 자료 아님. 그 문장을 수첩 첫 장에서 다시 찾았다.
이겸은 현재 공개안 파일을 열지 않고 이해충돌 메모 양식을 열었다. ‘첫 생 이후 자료 유출과 직원 낙인에 관한 불완전한 기억이 현재 공개 판단에 영향을 줄 가능성.’ 그는 기억의 내용보다 영향 가능성을 적었다.
아침에 독립 위원에게 메모를 제출했다. 심사에서 기권해야 하는지, 별도 검토가 필요한지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네 사람에게는 메모의 존재와 범위만 알렸다.
윤해진은 무슨 기억인지 묻지 않았다. 구체적 내용을 들으면 자기 판단에도 확인되지 않은 그림이 섞일 수 있었다. 민가온도 데이터 가설로 변환해 시험하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서다온은 기억이 법적 이해충돌과 같지는 않지만 편향 공개와 견제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겸이 표결에 참여하되 기억을 근거로 발언하지 않고, 자신의 공개안 변경 사유를 현재 자료로만 쓰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독립 위원은 그 조건을 승인했다. 이겸의 표를 빼면 오히려 책임을 피하는 결과가 될 수 있었다. 대신 모든 발언에 근거 문서 번호를 붙이고, 없는 경우 가치 판단이라고 표시하도록 했다.
심사 첫 쟁점은 인수 실사와 공개 저장소의 분리였다. 이겸은 분리에 찬성했다. 근거는 첫 생의 유출 기억이 아니라 현재 직원 대표가 제시한 재식별 시험과 인수 후보의 자료 요청서였다.
두 번째 쟁점은 면담 원본의 독립 열람이었다. 이겸은 시민검증자 접근을 지지했다. 해진은 당사자 거부와 대체 자료가 있는 경우 원진술을 열지 말자고 했다. 둘의 차이는 여전히 남았다.
이겸은 첫 생에서 거짓 이름이 퍼졌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기억을 말하면 사람들은 해진 안에 더 쉽게 동의할 수 있었다. 그는 침묵하고 박재현 관련 대체 원본 표만 제시했다.
표는 원진술 없이도 결재 사슬을 확인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이겸은 자신의 공개안을 수정해 대체 자료가 충분한 보호 진술은 열람 대상에서 제외했다. 변경 사유에는 대조표 번호만 적었다.
해진은 그가 기억 때문에 바꾼 것인지 묻지 않았다. 이겸도 답하지 않았다. 결과가 같아도 근거가 현재 기록에 서야 다른 사람이 재검증할 수 있었다.
점심 휴정 때 이겸은 혼자 계단을 내려갔다. 첫 생의 겨울 장면은 여전히 선명했다. 누군가의 책상 위에 붉은 글씨로 ‘공범’이라고 적힌 종이가 놓였고, 그는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 오히려 더 위험했다. 현재의 누군가에게 그 자리를 씌우기 쉬웠다. 이겸은 수첩에 새로운 이름을 적지 않았다.
가온은 오후 심사에서 합성 자료로 인수 실사 위험을 시연했다. 공개된 근태와 사업장 자료가 폐쇄 순위 점수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이겸은 현재 원본과 재현 가능한 시험으로 같은 위험을 확인했다.
그제야 그는 자기 메모에 ‘현재 근거로 독립 확인됨’이라고 덧붙였다. 첫 생의 기억이 맞았다는 뜻이 아니라, 결정에 필요한 위험이 다른 자료로 입증됐다는 뜻이었다.
다온은 그 표현도 조심하라고 했다. 현재 시험이 과거 기억의 사실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겸은 문장을 ‘현재 공개 판단에 필요한 위험은 별도 확인됨’으로 고쳤다.
독립 위원은 심사 끝에 이겸의 참여가 절차를 훼손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해충돌 메모는 비공개 개인 기록이 아니라 감사팀 편향 관리 기록으로 보존하라고 했다. 기억 세부는 가리고 영향과 통제만 공개했다.
결정문에는 이겸이 메모를 자진 제출했다는 사실도 공로처럼 강조하지 않았다. 신고 여부, 검토 조건, 근거 제한이 정상 절차의 한 줄로 기록됐다. 특별한 고백 서사가 생기면 다른 조사자는 같은 제도를 자신과 무관한 예외로 볼 수 있었다.
시민감시단은 왜 이겸에게만 특별한 편향 절차가 필요한지 물었다. 이겸은 회귀를 설명하지 않았다. 과거 사건에 대한 비정상적으로 강한 개인 기억과 이해관계가 있다고 공개된 범위에서 답했다.
해진은 모든 조사자에게 유사한 편향 메모 제도를 적용하자고 제안했다. 가족 관계나 옛 직장뿐 아니라 강한 선입견, 이전 결론 작성, 개인적 피해 경험도 스스로 신고할 수 있게 했다.
어떤 위원은 주관적 감정까지 기록하면 업무가 불가능해진다고 반대했다. 다온은 모든 감정을 공개하자는 것이 아니라 결정 근거를 왜곡할 위험과 통제 방법을 남기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온은 메모를 인사 평가에 쓰지 못하게 접근 목적을 제한했다. 편향을 신고한 사람이 솔직함 때문에 배제되거나 불이익을 받으면 제도는 곧 사라질 수 있었다.
이겸은 첫 적용 대상이 자신이라는 데 동의했다. 자기 기억을 특별한 통찰로 인정받는 대신 통제받아야 할 편향으로 기록하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날 저녁 통합안 초안이 나왔다. 이겸의 검증 접근, 해진의 동의와 보호, 다온의 절차별 시점, 가온의 최소 이용이 모두 들어 있었다. 어느 안도 원래 모습 그대로 이기지 않았다.
이겸은 초안에서 자기 수첩 공개 항목이 빠진 것을 확인했다. 감사팀 오류는 외부 감사 결정문과 공개 이견서로 검증하고, 수첩은 현재 사실의 원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붙었다.
그는 이의를 내지 않았다. 수첩을 공개하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했지만, 확인되지 않은 이름과 미래 기억을 공적 기록처럼 퍼뜨리는 것은 또 다른 권력 행사일 수 있었다.
밤에 이겸은 수첩을 개인 서랍이 아니라 편향 기록 봉투에 넣었다. 열람에는 독립 위원 승인과 목적 기록이 필요했다. 자기만 가진 열쇠는 없었다.
첫 생의 장면은 봉투를 닫는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진실이라고도 악몽이라고도 확정하지 않았다. 현재 사람의 선택을 대신하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겼다.
다음 회의에서 해진은 근거 문서 번호 없는 발언이 있는지 확인했다. 이겸의 발언 세 곳은 가치 판단으로 표시됐고, 미래 기억은 하나도 근거 목록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겸은 그 검사를 불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보이는 장면이 공동 결론의 지름길이 되지 못하게 하는 장치였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도 이제 혼자 정답을 쥐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해충돌 메모 마지막 칸에는 재검토 날짜가 적혔다. 공개 규칙이 시행된 뒤 실제 피해와 검증 효과를 보고 편향 영향이 남아 있는지 다시 평가할 날이었다.
한이겸은 회의실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잠시 봤다. 미래를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현재 원본을 읽고 다른 사람의 반론을 기다리는 평범한 조사자였다.
그는 수첩 없이 통합안 표결실로 들어갔다. 미래 기억의 마지막 유혹은 사라져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말할 수 있었지만 말하지 않고, 기록할 수 있었지만 근거로 쓰지 않은 선택 속에서 비로소 힘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