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조사 종결 다음 날, 한이겸은 공개 요청 목록을 회의실 벽에 붙였다. 언론사 열두 곳, 시민단체 일곱 곳, 연구기관 네 곳이 면담 녹취와 자료 목록을 요구하고 있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원하는 원본의 범위는 제각각이었다.
이겸은 가장 넓은 요구부터 표시했다. 보존된 원본 전부, 변경 이력, 가림 판단표, 조사팀 내부 이견 기록. 그는 누구나 그 자료를 맞춰 봐야 감사팀의 실수와 선택까지 검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해진은 박시우의 면담 목록을 펼쳤다. 이름은 가려져 있었지만 당시 근무 부서, 인사 이동 시기, 진술한 사건이 함께 공개되면 회사 안에서 신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호 종료자라고 해서 식별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결론을 골라 보여 주면 결국 우리를 믿으라는 겁니다.” 이겸이 말했다. “광범위 공개 없이는 다음 기관이 같은 문장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잘라 쓸 겁니다.”
“전부 보여 주는 순간 다음 제보자는 우리를 믿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해진은 면담 동의서를 들어 보였다. “이 사람들은 사건 조사와 재판을 위해 말했습니다. 영구 공개에 동의한 적은 없습니다.”
민가온은 원본 저장소의 자료 종류를 세었다. 사건 당사자 기록 외에도 무관한 직원의 근태, 가족 연락, 건강 사유, 거래처 담당자 일정이 섞여 있었다. 당시에는 자금 흐름을 확인하려고 적법하게 확보했지만 지금 공개 목적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겸은 가리면 된다고 했다. 가온은 식별 위험을 조합으로 설명했다. 이름 하나를 지워도 부서와 날짜, 직급, 출장지가 합쳐지면 회사 내부에서는 한 사람만 남는 경우가 많았다.
서다온은 진행 중인 행정 심리 자료를 지목했다. 원본이 먼저 퍼지면 증인이 언론 보도를 보고 기억을 맞추거나, 조사 대상자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진술을 반박용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법적 지속성이 흔들리는 문제였다.
이겸은 세 사람의 반대를 듣고도 공개안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자기 수첩과 초기 연결도를 먼저 내놓겠다고 했다. 자신이 결론을 앞당겼던 기록까지 감추지 않으면 타인의 자료를 요구할 자격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해진은 수첩 공개도 반대했다. 수첩에는 이겸 자신의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박재현, 강승표, 박시우를 한때 배신자로 적은 추측과 아직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개인 정보가 함께 있었다.
“당신의 용기가 다른 사람의 동의가 되지는 않습니다.” 해진이 말했다.
그 문장은 이겸을 멈추게 했지만 설득하지는 못했다. 첫 생에서 원본을 혼자 쥐고 죽었던 기억은 자료를 닫는 선택을 두려움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문을 잠그면 언젠가 다시 누군가 열쇠를 독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진은 잠금과 비공개가 같은 말이 아니라고 답했다. 독립 열람실, 검증자 지정, 이의 신청, 공개 기한을 두면 원본을 세상에 복제하지 않고도 결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누가 검증자를 고르는지였다.
시민감시단 대표가 회의에 들어왔다. 그는 태성의 과거를 생각하면 회사가 고른 열람자만 믿기 어렵다고 했다. 적어도 결재자 직위와 기관 간 송수신 원본은 넓게 공개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직원 대표는 무관한 직원의 근태표가 공개되면 구조조정 자료로 악용될 수 있다고 반대했다. 수사 때 필요했던 결근 사유가 인수 후보에게 넘어가면 누가 먼저 잘릴지 정하는 표가 될 수 있었다.
이겸은 그 위험을 예상하지 못했다. 약해진 태성의 지분 매각 소문이 돌고 있었고 외부 투자자들은 내부 자료에 관심을 보였다. 공익 검증을 위해 열린 원본이 사람을 평가하는 다른 목적으로 쓰일 수 있었다.
그는 공개 이용 약관으로 재사용을 막자고 제안했다. 다온은 약관이 한 번 복제된 파일의 유통을 실제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위반 뒤 손해배상을 받아도 잃은 직장과 드러난 사생활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가온은 표본 자료로 위험을 시연했다. 이름과 연락처를 지운 근태표에서 부서·휴직 기간·프로젝트를 조합하자 한 직원의 사내 게시글과 연결됐다. 삼십 초 만에 신원이 추정됐다.
이겸은 화면을 끄게 했다. 시연에 사용된 직원에게 사전 동의를 받았는지 물었다. 가온은 합성 자료라고 답했다. 실제 원본을 보여 주지 않고도 위험을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작은 대답은 이겸에게 자기 방식의 차이를 보여 줬다. 그는 위험을 증명하려면 실제 피해에 가까이 가야 한다고 믿곤 했다. 가온은 사람을 세우지 않고도 통제의 약점을 시험했다.
독립 검토자는 원본 공개의 공익을 네 범주로 나눴다. 기관 책임 검증, 감사팀 오류 검증, 학술 연구, 일반 호기심. 같은 원본이라도 목적에 따라 필요한 범위와 접근 방식이 달라야 했다.
이겸은 일반 호기심이라는 표현에 불편해했다. 시민이 권력 사건의 세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닐 수 있었다. 검토자는 그래서 이의를 통해 목적을 다시 분류할 절차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회의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이겸은 원본 공개 범위 표의 가장 넓은 칸을 지우지 않았다. 해진도 보호 대상 목록을 줄이지 않았다. 누구도 상대를 은폐자나 무책임한 공개론자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날 밤 박시우의 변호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론이 과거 인사 이동과 진술 날짜를 조합해 그를 추정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원본 추가 공개가 없는데도 기존 공개 정보만으로 가능했다.
해진은 즉시 공개본의 식별 위험을 재점검했다. 이겸은 첫 대응 회의에서 자기 공개 주장을 잠시 보류하겠다고 말했다. 논쟁의 패배가 아니라 당사자 피해를 먼저 멈추기 위한 결정이었다.
가온은 검색 결과와 기사 댓글을 수집하지 않았다. 피해 확산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표본만 독립 심사관에게 맡겼다. 박시우의 현재 직장과 가족 이야기는 조사팀조차 열람하지 않았다.
시민감시단은 공개 보류가 은폐로 돌아가는 신호가 아니냐고 물었다. 이겸이 직접 답했다. “보류 사유와 재검토 날짜를 공개하겠습니다. 사람에게 실제 위험이 나타났는데 원칙의 체면을 지키려고 밀어붙이지 않겠습니다.”
해진은 그 문장에 동의했지만 원본 전부 공개안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겸 역시 보호 중심안에 서명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임시 합의는 피해 대응과 일주일의 재검토뿐이었다.
직원 대표는 그 사이 인수 후보에게 제공할 자료와 공익 공개 자료를 분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온은 저장소 권한을 나누고, 인수 실사 계정에서는 사건 면담 자료를 볼 수 없게 막았다.
다온은 법원과 행정 심리에 필요한 원본 보존기간을 다시 계산했다. 공개 여부와 삭제 여부를 섞으면 보호를 위해 없앤 자료가 재판에서 필요한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 보존은 유지하되 이용 목적을 분리하는 안을 만들었다.
이겸은 혼자 회의실에 남아 자기 수첩을 펼쳤다. 오래전 ‘배신자’라고 적었다 지운 흔적이 비쳤다. 그 한 줄이 공개되면 이미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 사람이 다시 설명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수첩 전체 공개 요청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감사팀의 판단 오류와 시정 과정을 요약한 독립 검증 자료를 먼저 만들자고 메모했다. 그것이 충분한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음 아침 네 사람은 임시 공개 보류 확인서에 각자 다른 사유를 적었다. 이겸은 피해 확인, 해진은 당사자 보호, 다온은 진행 절차, 가온은 재식별 위험. 같은 결정이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회의실 벽에는 ‘원본 전부’라고 적힌 이겸의 종이가 여전히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보호 종료자와 무관한 직원의 이름 없는 위험표가 나란히 놓였다. 어느 쪽도 떼지 않은 채, 팀은 무엇을 공개할지보다 누구의 삶을 다시 사건에 묶을 권리가 있는지부터 묻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