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조사팀이 넉 달의 지연을 모두 채웠을 때, 벽에는 사람 이름보다 규정 번호가 더 많이 남아 있었다. 감독기관은 수사 가능성이 생기면 검찰 판단을 기다렸고, 검찰은 행정 조사 결과가 확정되기 전에는 관할이 모호하다고 돌려보냈다.
한이겸은 두 기관의 회신을 나란히 읽었다. 한쪽에는 ‘형사 절차 선행 필요’, 다른 쪽에는 ‘행정 사실 확정 후 검토’라고 적혀 있었다. 각각만 보면 신중한 문장이었지만 함께 놓으면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는 원이 됐다.
윤해진은 날짜표에 화살표를 그렸다. 신고가 감독기관에서 검찰로 갔다가 다시 감독기관으로 돌아오는 데 열아홉 날이 걸렸다. 그동안 원본 보존 명령은 어느 기관도 내리지 않았다.
기관 대표들은 당시 규정대로 했다고 주장했다. 독립 위원은 규정을 위반했는지 묻기 전에 그 규정이 어떤 선택을 허용했는지 읽었다. 양쪽 모두 임시 보존 조치를 할 수 있었지만 다른 기관이 맡을 것으로 기대했다.
“권한은 둘에게 있었고 의무는 아무에게도 없었군요.” 민가온이 말했다.
외부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결과만 보면 모두 규정을 따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사를 막은 규정은 금지 조항이 아니라 책임 주체를 비워 둔 문장입니다.”
두 번째 장벽은 법무 검토 예외였다. 시장 파장이 크거나 다수 기관 협의가 필요한 사건은 처리 기한의 시계를 멈출 수 있었다. 태성 건에서는 그 예외가 세 번 연장됐다.
연장 결정문에는 ‘검토 계속’이라는 사유만 반복됐다. 누가 어떤 쟁점을 검토했고 언제 끝내야 하는지는 없었다. 종료 알림 실패까지 겹치면서 실제 법률 검토보다 훨씬 오래 사건이 멈췄다.
기관 법무 책임자는 복잡한 사건에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한 규정이라고 설명했다. 해진은 목적을 부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한 것과 시계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검토 중에도 보존과 피해 방지는 멈추면 안 됩니다.”
조사팀은 다른 중대 사건의 적용 사례를 비교했다. 예외를 쓰지 않은 사건은 성급한 보전으로 손해배상 분쟁이 생긴 경우가 있었고, 예외를 쓴 사건은 평균 지연이 길었다. 어느 한쪽도 단순한 해답이 아니었다.
한이겸은 처음에는 예외 조항을 없애자고 했다. 가온은 반대 자료를 내밀었다. 복잡한 거래에서 법무 검토 없이 계좌를 막아 무관한 협력사 급여가 동결된 사례였다. 사람을 살리려는 원칙은 속도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해진은 시계를 둘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강제 처분 판단 시계는 법무 검토 동안 멈출 수 있지만, 원본 보존과 위험 통지 시계는 계속 움직인다. 둘을 같은 상태값에 묶었던 시스템을 분리하는 방식이었다.
기관 실무자들은 업무가 늘어난다고 반발했다. 보존 명령을 너무 일찍 내리면 자료 보유자에게 의심을 알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조사팀은 비공개 보존, 접근 제한, 당사자 통지 유예의 법적 조건을 함께 설계했다.
가온은 새 절차의 모의 시험을 돌렸다. 태성 당시 날짜를 넣자 첫 신고 이틀 안에 임시 보존 명령이 자동 검토되고, 관할 협의가 길어져도 원본 폐기 시계는 멈췄다. 실제 수사 개시는 법무 판단 뒤로 남았다.
모의 시험에서 다른 문제가 나왔다. 두 기관이 동시에 보존 명령을 내리면 회사가 서로 다른 범위로 자료를 복제해야 했다. 중복 작업과 개인정보 확산 위험이 커졌다.
외부 변호사는 공동 보존 번호를 제안했다. 최초 기관이 최소 범위를 지정하면 다른 기관은 같은 원본 위치와 해시값을 참조하고, 범위를 늘릴 때만 별도 승인을 받는다. 자료를 여러 곳으로 옮기지 않고 권한만 연결하는 구조였다.
직원 대표는 보존 기간이 무한히 연장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사팀은 삼십 일마다 계속 필요성을 심사하고, 연장 사유와 삭제 예정일을 자료 당사자에게 통지하는 조항을 넣었다.
독립 위원은 긴급 사건의 시간 기준을 숫자로 정하자고 했다. 해진은 모든 사건에 같은 시간을 강제하면 형식만 맞추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고 우려했다. 위험 수준과 자료 소멸 가능성에 따라 등급을 나누되 판단 이유를 쓰게 했다.
이겸은 등급을 누가 매기는지 물었다. 한 부서가 단독으로 낮출 수 있다면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실무자와 법무 담당자 두 사람의 공동 판단, 불일치 때 독립 당직자의 임시 결정이 필요했다.
감독기관 대표는 외부 당직자가 내부 기밀을 볼 수 없다고 반대했다. 가온은 내용 전체가 아니라 자료 종류, 소멸 위험, 예상 피해만으로 임시 보존 여부를 판단하는 최소 화면을 만들었다.
새 규정 초안은 페이지가 늘어날수록 다시 복잡해졌다. 이겸은 처음부터 읽다가 실무자가 실제 위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규정을 정교하게 만드는 일이 책임을 또 숨기는 미로가 될 수 있었다.
수현은 보호 상태에서 자문 의견을 보냈다. “그때 화면에 ‘누가 보존할지 선택’ 버튼 하나만 있었어도 눌렀을 겁니다. 긴 법률 설명은 나중에 봤을 겁니다.” 조사팀은 첫 화면을 세 가지 행동으로 줄였다.
위험 신고, 임시 보존 요청, 관할 공동 확인. 버튼을 누르면 다음 권한자와 기한이 자동으로 표시됐다. 거부하려면 사유와 대체 조치를 써야 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은 허용되지 않았다.
법무 검토 예외에는 종료 시각과 책임자가 필수 항목으로 들어갔다. 연장할 때는 같은 문장을 복사할 수 없게 새 쟁점과 완료 기준을 적도록 했다. 검토가 끝나면 시스템이 양 기관에 동시에 알렸다.
가온은 알림을 무시하는 경우도 시험했다. 기한을 넘기면 상급자뿐 아니라 독립 기록관리자와 감사 담당자에게 같은 경보가 갔다. 한 사람의 받은편지함에 사건이 묻히지 않게 했다.
기관 노조는 실무자가 모든 위험을 떠안는 구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해진은 긴급 보존 요청이 나중에 근거 부족으로 끝나도 선의의 합리적 판단이면 징계하지 않는 보호 조항을 넣었다. 반대로 고의로 기록을 누락하면 직급과 무관하게 검토됐다.
공청회에서는 기업 측이 영업 비밀 유출을 우려했다. 조사팀은 보존과 공개를 분리해 설명했다. 보존 명령은 자료를 지우지 못하게 할 뿐, 외부 공개나 본문 열람은 별도 승인 없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 시민은 규정만 고치면 정치 로비가 사라지느냐고 물었다. 이겸은 아니라고 답했다. “사람이 압력을 넣을 수는 있습니다. 다만 압력이 들어와도 시계와 원본이 함께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독립 위원회는 최종 초안을 두 기관에 동시 권고했다. 공동 보존 번호, 이중 시계, 예외 종료 조건, 선의의 신고자 보호, 연장 공개가 핵심이었다. 개인 처분과 별개로 여섯 달 안에 시행 결과를 감사받게 했다.
규정 개정 의결문에는 시행 책임자와 예산, 첫 점검일도 함께 적혔다. 선언만 발표하고 실무 화면과 인력을 남겨 두는 일이 없도록, 항목 하나가 미완료되면 이유를 공개하게 했다.
김태욱과 과장의 행위 심리는 계속됐다. 규정이 나빴다는 이유로 그들이 선택한 보류와 기록 누락이 사라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만 처분한다고 관할의 원형과 멈춘 시계가 저절로 고쳐지는 것도 아니었다.
첫 모의 적용 날, 두 기관 실무자는 같은 가상 사건에 서로 관할이 아니라고 표시했다. 시스템은 사건을 돌려보내지 않고 공동 확인 상태로 묶었다. 임시 보존 시계는 계속 흘렀다.
수현은 화면 시연을 원격으로 지켜봤다. 그는 자신이 그 버튼을 눌렀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다만 누르지 않았다면 그 선택과 사유가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겸은 그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규정은 사람을 자동으로 선하게 만들지 않았다. 선택을 보이게 하고, 다른 사람이 제때 질문할 수 있게 만들었다.
벽에서 오래된 화살표를 떼자 종이에 풀 자국이 남았다. 감독기관과 검찰 사이를 돌던 열아홉 날의 흔적이었다. 해진은 그 자국 위에 새 공동 번호 절차를 붙이지 않고 옆에 나란히 두었다.
과거 실패가 지워진 것처럼 꾸미지 않기 위해서였다. 수사를 막은 규정은 폐기 표시와 함께 보존됐고, 새 규정은 시행 날짜와 검증 기한을 가진 채 시작됐다.
한이겸은 완료 칸을 비웠다. 여섯 달 뒤 실제 사건에서 보존 시계가 멈추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제도 개선은 약속일 뿐이었다. 처벌의 도장이 찍힌 자리보다, 아직 점검받아야 할 규칙의 첫날이 더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