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기관의 내부 결재표가 도착한 날, 서다온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옛 상급자 김태욱의 직인을 먼저 보았다. 태성 현장 검사 일정을 재검토하라는 협의 문서의 참조란에 찍힌 도장이었다. 공식 승인자는 아니었지만 회의 참석 권한은 있었다.
다온은 문서를 끝까지 읽은 뒤 독립 위원에게 회피 신청서를 보냈다. 사유는 과거 직속 관계, 사건 전후 접촉, 해당 부서 관행에 대한 사전 지식이었다. 이미 임시로 빠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사 구간과 기간을 정확히 적었다.
한이겸은 신청서를 보고 말했다. “당신만 아는 조직 구조가 많습니다. 완전히 빠지면 오히려 조사에 구멍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구조를 넘기고 판단에서 빠지겠습니다.” 다온은 책상 위에 세 권의 사건철을 놓았다. “내 기억을 증거처럼 쓰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이 같은 원본으로 따라올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외부 변호사 오세린이 인계 책임자로 지정됐다. 그는 다온과 같은 검찰 경력이 없었고 감독기관과도 일한 적이 없었다. 속도는 느릴 수 있지만 관계의 빚이 없는 사람이었다.
첫 인계 회의에서 다온은 조직도를 설명하려 했다. 오세린은 설명을 멈추고 각 정보의 출처를 물었다. 직제 규정인지, 당시 경험인지, 현재 면담인지에 따라 색을 다르게 표시했다.
“김태욱은 결재선 밖에서도 영향력이 컸습니다.” 다온이 말했다.
“그건 경험입니까, 현재 자료입니까?”
다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경험입니다. 현재 자료로는 회의 참조와 출력물 배포가 전부입니다.”
오세린은 ‘비공식 영향력’이라는 문구를 인계 사실란에서 가설란으로 옮겼다. 다온은 그 움직임을 불편하게 바라봤지만 막지 않았다. 자기 확신이 한 칸 내려가는 것이 회피의 실제 의미였다.
두 번째 사건철에는 법무 검토 예외 조항이 있었다. 다온은 과거 그 조항이 고위 사건을 늦추는 데 자주 쓰였다고 설명했다. 오세린은 사용 빈도와 결과를 확인할 비교 자료가 있는지 물었다.
자료는 없었다. 다온은 기억을 삭제하지 않고 ‘비교 통계 필요’라는 과제로 바꿨다. 가온은 감독기관의 익명 사건 처리 기간을 받아 같은 조항이 적용된 사례를 분석하기로 했다.
인계 중 김태욱에게서 다온의 개인 전화로 연락이 왔다. 화면에 오래된 이름이 뜨자 방 안의 시선이 모였다. 다온은 받지 않고 통화 시도 시각을 기록해 독립 위원에게 보냈다.
잠시 뒤 메시지가 왔다. ‘오해를 풀고 싶다. 네가 내 업무 방식을 알지 않느냐.’ 다온은 답하지 않았다. 휴대 기기를 가온에게 맡겨 원문을 보존하고, 공식 면담 안내를 오세린 명의로 보내게 했다.
“한마디만 답하면 출석을 빨리 받을 수도 있어요.” 이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 한마디가 질문 순서를 알려 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멀리 서야 합니다.”
김태욱은 공식 면담에 응했지만 다온이 빠지는 것을 조건으로 요구했다. 이미 정해진 회피였기에 조사팀은 조건을 거래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절차 통지를 보냈다. 면담 녹취와 자료 목록은 독립 보관됐다.
다온은 면담 당일 다른 층 회의실에서 태성 내부 후속 업무를 처리했다. 복도에서 옛 상급자와 마주칠 가능성을 막기 위해 출입 동선도 분리됐다. 그는 그 조치를 모욕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확인서에 서명했다.
면담이 끝난 뒤 오세린은 다온에게 내용을 알려 주지 않았다. 대신 인계 구조에서 누락된 법령 해석 하나만 질문했다. 다온은 일반적인 규정 설명을 서면으로 쓰고, 김태욱 사건에 대한 적용 판단은 비워 두었다.
그날 밤 직원 게시판에는 다온이 조사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홍보실은 팀 내 갈등을 부인하는 문구를 준비했다. 해진은 ‘쫓겨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신청했고 독립 위원이 승인했다’는 사실만 공개하자고 했다.
다온은 회피 신청서의 사적 경력 부분을 가린 공개본을 확인했다. “내가 잘했다는 식으로 쓰지 마세요. 늦게 신고한 접촉도 함께 적어야 합니다.” 옛 출입 기록을 처음부터 신고하지 못한 책임이 빠지면 통제 절차가 미담이 될 수 있었다.
독립 위원은 회피 기간을 무기한으로 두지 않았다. 김태욱 관련 사실 조사와 감독기관 내부 관행 검토가 끝날 때까지로 정하고, 열흘마다 필요성을 재검토하도록 했다. 지나친 배제도 권한 남용이 될 수 있었다.
가온의 비교 분석 결과, 법무 검토 예외 조항이 적용된 사건은 평균 처리 기간이 두 배 가까이 길었다. 태성 건만의 특혜는 아니었지만 중대한 사건을 보호한다는 조항이 오히려 장기 정지를 만드는 구조였다.
오세린은 분석 원자료를 다온에게 보내지 않고 독립 위원에게 직접 제출했다. 다온은 결과표의 산식과 익명화 기준만 공개본으로 확인했다. 자기 경험과 맞는 결과를 먼저 받아 해석에 영향을 주는 일도 회피 범위에 포함됐다.
그는 인계 목록에서 누락된 사건 보존 기한 하나를 발견했다. 직접 고치지 않고 오세린에게 오류 위치와 근거 규정만 통지했다. 오세린은 원본을 다시 확인한 뒤 자기 명의로 수정하고 변경 사유를 남겼다.
다온이 옳은 정보를 제공했어도 결론의 소유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작은 절차는 회피가 침묵을 강요하는 벌이 아니라, 필요한 지식이 투명한 통로로만 들어오게 하는 통제임을 보여 줬다.
다온은 결과를 공개 화면으로만 봤다. 그는 과거의 경험이 맞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통계가 보여 준 범위와 자신이 기억하는 인상이 같아도, 근거의 주인은 달랐다.
오세린은 인계서에 새 항목을 추가했다. ‘옛 상급자 개인 책임과 예외 조항 구조 문제를 분리할 것.’ 김태욱이 아무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규정 개선은 필요했고, 규정이 나빴다고 개인 행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김태욱은 자신이 회의에서 일반적인 신중 검토를 주문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회의 메모에는 ‘시장 파장 고려’라는 문구가 있었지만 태성 이름은 없었다. 출력된 태성 자료를 실제로 봤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했다.
오세린은 비서와 회의 참석자 진술을 독립적으로 받았다. 한 참석자는 김태욱이 태성 사건을 언급했다고 했고, 다른 둘은 기억하지 못했다. 일치하지 않는 진술은 다수결로 정리하지 않고 각각 신빙성 검토에 올렸다.
다온은 그 사실을 나중에 정식 중간보고서에서 읽었다. 마음속에서는 옛 상급자의 말투와 표정이 떠올랐지만 그는 메모하지 않았다. 자신의 추측이 팀의 질문이 되는 통로는 닫혀 있었다.
한이겸은 다온의 빈 의자를 볼 때마다 조급함을 느꼈다. 그러나 첫 생에서 모든 답을 혼자 쥐려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빠른 조언 한 번보다 누가 빠져도 서류가 이어지는 구조가 더 오래 살아남았다.
인계 마지막 날 오세린은 세 권의 사건철을 다섯 권으로 늘려 돌려주었다. 다온이 놓친 자료 출처와 가설 구분, 면담 권리, 중단 조건이 추가돼 있었다. 인계는 지식을 줄이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있던 판단을 검증 가능한 조각으로 나누는 일이었다.
다온은 수령 칸에 서명하지 않았다. 사건철은 이제 그의 것이 아니었다. 대신 ‘인계 내용 확인, 관련 판단 불참’이라는 별도 칸에 이름을 썼다.
퇴근길에 해진이 물었다. “옛 상급자가 무죄라고 나오면 후회할까요?”
“아니요. 유죄라고 나와도 내가 조사했으면 결과는 약해졌을 겁니다.” 다온은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에서 손을 뗐다. “회피는 내가 의심해서가 아니라, 어느 결론도 내 관계에 빚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겁니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다온은 조사실 밖에 남았지만 사건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자리를 비워 둔 채로도 원본과 질문이 앞으로 움직이는 것, 그것이 서다온의 회피 신청이 지키려 한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