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사건번호가 열린 첫 월요일, 독립 조사실 벽 한 면이 흰 종이로 덮였다. 왼쪽 끝에는 태성의 첫 이상 거래 신고 시각, 오른쪽 끝에는 검찰의 계좌 보전 명령 시각이 적혔다. 그 사이 넉 달은 아직 빈칸이 더 많았다.
한이겸은 검은 펜을 들었지만 사람 이름부터 쓰지 않았다. 신고 접수, 보완 요청, 관할 협의, 법무 검토, 보류 결정, 재상신이라는 행위만 날짜순으로 적었다. 각 행위 아래에는 결재선과 보존 문서가 있는지 표시할 작은 칸을 만들었다.
윤해진은 벽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멈춘 수사는 하나가 아니네요.” 감독기관에서는 현장 검사 계획이 두 번 미뤄졌고, 수사기관에서는 자료 확보와 계좌 보전이 서로 다른 이유로 정지돼 있었다.
독립 조사관은 두 지연을 같은 색으로 묶으려 했다. 정책재단 접촉 뒤에 모두 발생했으니 하나의 영향력 행사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이겸은 자신이 보고서에서 썼던 의심을 떠올렸지만 동의 도장을 먼저 찍지 않았다.
“멈춘 날짜만 같아서는 부족합니다.” 해진이 말했다. “누가 멈출 권한을 가졌고, 무엇을 기다렸는지 봐야 해요.”
첫 칸의 보류 사유는 ‘관할 확인 중’이었다. 그러나 당시 규정에는 의심 거래 보존 명령을 관할 확정 전에 내릴 수 있다는 단서가 있었다. 다온 대신 참여한 외부 변호사는 그 단서가 의무인지 선택인지부터 구분했다.
기관은 선택 재량이었다고 답했다. 왜 행사하지 않았는지를 묻자 회의 기록은 없고 담당자 메모만 남아 있었다. 메모에는 ‘상급 협의 후 결정’이라는 여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가온은 메모 파일의 생성 시각과 수정 기록을 대조했다. 신고 다음 날 만들어졌고 석 달 뒤 감사 준비 기간에 한 번 열렸지만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사후 조작 흔적은 없었다. 다만 상급 협의가 누구와 한 것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두 번째 칸에는 보완 요청서가 있었다. 태성에 이미 제출한 자료를 다시 요구한 문서였다. 회사 기록관리인은 그때 중복이라고 항의했지만, 기관은 서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접수를 반려했다.
이겸은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서식 하나가 원본 보존을 늦춘 사이 첫 생의 비극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모든 반려가 악의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재 판결의 범죄와 이 행정 선택은 따로 증명해야 했다.
해진은 당시 서식 지침을 가져왔다. 제출 항목은 같았지만 기관 내부 시스템의 필수 칸이 달랐다. 반려는 규정상 가능했다. 문제는 담당자가 전화 보완이나 임시 접수라는 대안을 안내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불법은 아닐 수 있어요.” 해진이 말했다. “그래도 지연을 막을 권한을 쓰지 않은 책임은 남습니다.”
독립 조사관은 날짜표에 ‘허용된 선택, 사유 미기록’이라는 표지를 붙였다. 범죄 혐의 표지와 다른 모양이었다. 이겸은 그 구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세 번째 지연은 수사기관에서 생겼다. 계좌 보전 신청 초안이 작성된 날과 실제 신청일 사이 열하루가 비어 있었다. 결재 시스템에는 법무 검토 중이라는 상태만 반복돼 있었다.
외부 변호사가 검토 의견서를 요청하자 기관은 변호사 업무 비밀을 이유로 거부했다. 조사 기구는 내용 전체 대신 검토 시작·종료 시각, 쟁점 분류, 승인자 직위만 제출하라고 범위를 줄였다.
회신에는 뜻밖의 사실이 있었다. 법무 검토는 사흘 만에 끝났지만 담당 부서가 종료 알림을 받지 못했다. 시스템에서 상태를 수동으로 바꿔야 했고 어느 쪽도 자기 업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머지 여드레는 로비가 아니라 알림 실패입니까?” 조사관이 물었다.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현재 기록이 보여 주는 건 알림 실패입니다. 그 실패를 누가 이용했는지는 별도예요. 먼저 같은 기간 다른 사건에서도 반복됐는지 봐야 합니다.”
비교 자료를 대조하니 그해 비슷한 신청 열두 건 중 다섯 건이 같은 상태에서 사흘 이상 멈췄다. 태성만을 위한 장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태성 건은 금액과 자료 삭제 위험이 컸는데도 긴급 우선순위가 적용되지 않았다.
벽의 날짜표에는 하나의 거대한 음모 대신 여러 종류의 멈춤이 생겼다. 재량 사유 미기록, 서식 보완 대안 부재, 시스템 알림 실패, 긴급 기준 미적용. 그중 어디에 외부 압력이 들어왔는지는 아직 빈칸이었다.
해진은 빈칸마다 담당 기관에 같은 형식의 확인서를 보냈다. 답을 모른다면 모른다고 쓰고, 기억에 의존한다면 근거 종류를 표시하며, 문서가 폐기됐다면 폐기 권한자와 날짜를 적게 했다. 기관마다 다른 변명 문구를 쓰지 못하게 질문의 모양을 맞췄다.
회신 중 하나에는 담당자가 휴가라 확인할 수 없다는 답이 왔다. 가온은 개인의 부재와 조직의 기록 부재를 구분했다. 대체 결재자와 공유 보관함이 있었는지 묻자, 당시에는 특정 직원의 개인 폴더에만 검토표가 남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직원은 이미 퇴직했지만 회사가 그를 다시 불러 세우지는 않았다. 기관이 보존한 계정 이관 기록과 백업 목록으로 먼저 확인했다. 사람의 기억을 마지막 수단으로 미루는 선택이 퇴직자의 평범한 삶을 보호했다.
백업에는 검토표의 존재만 있고 본문은 보존 기간 만료로 삭제돼 있었다. 조사팀은 누락된 답을 상상하지 않고, 개인 폴더 의존과 짧은 보존 기간을 구조적 실패로 분류했다. 날짜표의 빈칸은 그대로 남았지만 왜 비었는지는 기록됐다.
직원 대표가 참관석에서 질문했다. “그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이겸은 날짜표를 가리켰다. “반대입니다. 한 사람에게 전부 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규정을 만든 사람, 선택한 사람, 기록하지 않은 사람, 오류를 알고도 고치지 않은 사람이 각자 무엇을 했는지 나누고 있습니다.”
오후 면담에서 당시 감독기관 실무자는 정책재단 관계자에게 전화가 온 사실을 인정했다. 내용은 처리 상태를 묻는 것이었고 구체적 보류 요구는 없었다고 했다. 통화 기록에는 칠 분이라는 길이만 남아 있었다.
조사관은 칠 분 동안 무엇을 말했느냐고 추궁했다. 해진은 유도 질문을 멈추고 실무자가 당시 작성한 업무일지를 먼저 보여 달라고 했다. 일지에는 ‘재단 문의, 절차 안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문의 뒤 결정이 바뀌었습니까?” 해진이 물었다.
“현장 검사 일정이 한 주 밀렸습니다. 하지만 인력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해진은 인력 배치표를 요청했다. 같은 주 다른 대형 사건에 검사관들이 투입된 기록이 확인됐다. 재단 전화와 지연은 시간상 가까웠지만 직접 원인은 아직 연결되지 않았다.
이겸은 자기 별도 의견 조건표에 ‘미충족’이라고 표시했다. 의심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의심을 사실 칸에 옮길 근거가 없었다. 해진은 아무 말 없이 같은 표시를 확인했다.
밤이 되자 벽의 마지막 빈칸에 보존 상태가 채워졌다. 현장 검사 계획 원본 한 건은 기관 규정에 따라 폐기됐고, 폐기 승인 기록은 남아 있었다. 조사팀은 불법 삭제가 아니라 보존 기간 설계 문제로 분류했다.
이겸은 그 칸 앞에서 오래 섰다. 원본이 없다는 사실이 누군가의 은폐를 뜻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결론은 답답했다. 하지만 제때 보존 명령을 내리지 않은 제도 책임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독립 조사팀은 첫 중간 기록을 의결했다. ‘정책재단 접촉과 개별 보류의 직접 인과는 확인되지 않음. 복수의 절차 지연과 기록 부재는 확인됨. 접촉 목적과 후속 결정은 계속 조사.’
기자들은 결론이 약하다고 비판했다. 이겸은 반박하지 않았다. 수사를 멈춘 날짜표는 화려한 범인을 내놓지 않았지만, 어느 문에서 왜 멈췄는지 처음으로 누구나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해진은 퇴근 전 벽 아래에 다음 확인 날짜를 붙였다. 정책재단 행사비 원본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이겸은 그 표 앞에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미래의 답을 꺼낼 수 없는 곳에서, 오늘 남은 문서가 가리키는 만큼만 앞으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