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2 사람들이 다녀간 이틀 뒤 협동조합 회의실에는 의자보다 계산기가 먼저 놓였다. 외부 상담 요청이 일곱 건으로 늘어 있었다.
누군가는 동화4가 도움받았으니 이제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록실을 열고 선우가 주말마다 무료로 설명하면 돈이 들지 않는다는 제안이었다.
서미라는 결산판 맨 위에 `잔액 360만 원`을 적었다. 공사 완료 뒤 첫 열두 달 결산에서 확정된 적립금이고, 누구도 횡령하거나 잃지 않은 돈이었다.
그 아래에는 다음 석 달 고정비가 붙었다. 기록실 임대 분담, 회계 검토, 인쇄 보관, 안전 점검, 유급 기록 담당의 주 3일 노동비였다.
“잔액이 있다는 말과 남는 돈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미라가 말했다.
선우는 자기 급여부터 빼자는 의견을 냈다가 미라에게 막혔다. 한 번의 선의가 노동 기준이 되면 다음 실무자도 공짜로 일해야 했다.
마틴도 수리점 문을 닫고 회의에 오는 시간이 노동이라고 했다. 외부 자문을 맡으면 배송과 수리 교실 일정이 줄어드는 비용이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돈을 지키기만 하면 협동조합이 자기 골목만 챙기는 조직이 된다는 말이 나왔다. 화양2가 지금 자료를 못 만들면 철거 조사가 끝날 수 있었다.
미라는 무료와 거절 사이에 다른 선택을 만들자고 했다. 상담 범위와 시간을 정하고, 실제 투입한 사람에게 유급 노동비를 지급하는 제한 자문안이었다.
초안은 여섯 차례, 회당 두 시간이었다. 점유 확인 질문표와 문서 보관 방식을 설명하되 보상액 산정이나 법률 대리, 현장 안전 판정은 맡지 않는다.
선우는 도시계획 자문과 협동조합 기록 역할이 겹치는 부분을 표시했다. 화양2 개발안 자체를 평가하려면 별도 계약과 독립 검토가 필요했다.
장하늘의 취재 시간은 자문비에서 지급하지 않았다. 기자 취재와 조합 문서 작성이 섞이면 기사 독립성과 노동 책임이 흔들릴 수 있었다.
이정훈은 인쇄비를 실제 장수로 계산했다. 동화4 자료를 그대로 복사하지 않고 개인정보를 가린 서식만 제공하기 때문에 교정 시간이 더 들었다.
마틴은 통역이 필요한 세입자를 위한 비용을 넣자고 했다. 한국어 문서만 나눠 준 뒤 의견을 묻는 것은 형식적인 참여라고 했다.
예산 상한은 칠십이만 원으로 제안됐다. 360만 원 전체를 외부 확장에 걸지 않고, 첫 회의 뒤 계속 여부를 다시 표결하는 조건이었다.
한 조합원은 너무 적어 제대로 못 한다고 했다. 미라는 적은 예산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항목만 줄이자고 답했다.
화양2 측에도 비용 분담을 요구할지 논쟁이 났다. 당장 돈 없는 세입자가 자문비 때문에 배제될 수 있었다.
협동조합은 주민 개인에게 받지 않고 화양2 준비모임이 공개 모금이나 공공 회의 지원을 신청하도록 돕기로 했다. 지급 전이라도 첫 점유 질문표 한 번은 열어 주되 이후 노동은 계약 없이 계속하지 않는다.
오복순은 돈을 못 받으면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거냐고 물었다. 미라는 긴급 안전 신고와 권리 접수 기한 안내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제공하고, 장시간 자료 정리와 회의 진행은 유급으로 나누자고 했다.
그 구분이 안내판에 들어갔다. 즉시 위험, 접수 마감, 공식 창구는 기본 안내. 명부 대조, 회의 기록, 도면 검토는 계약 자문이었다.
선우는 자문 책임자가 되지 않았다. 조합 회의 진행 순번에 따라 미라, 마틴, 박 씨가 운영을 나누고 그는 기록 서식과 출처 설명을 맡았다.
이해충돌 칸도 생겼다. 동화4 상인과 화양2 점포가 향후 같은 공공상가 자리를 두고 경쟁하면 해당 조합원은 배정 의견에서 빠진다.
첫 표결에서는 안이 부결됐다. 예산 상한과 긴급 무료 범위가 모호하다는 이유였다.
미라는 외부 요청을 도덕 문제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시간표를 다시 만들고 누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적었다.
수정안에는 자문 노동 여덟 시간, 통역 네 시간, 인쇄 실비, 독립 회계 확인 한 차례가 들어갔다. 사용하지 않은 금액은 자동으로 적립금에 남는다.
자문 종료일은 화양2 첫 공식 이의 접수 다음 날이었다. 계속 지원하려면 새 계약과 표결이 필요했다.
두 번째 표결에서 안은 통과됐다. 찬성 아홉, 반대 셋, 기권 둘이었다. 반대 이유도 결산판 옆에 붙었다.
잔액 360만 원은 그날 바로 줄지 않았다. 승인된 상한만 별도 칸에 묶였고 실제 노동일지와 영수증이 들어올 때만 지출하기로 했다.
선우가 첫 시간표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주 3일 기록 업무 안에서 두 시간만 배정하고 나머지는 다른 담당이 맡았다. 밤 무료 추가 작업은 금지했다.
소라에게는 자문 조건서가 먼저 전달됐다. 동화4 결과를 보장하지 않고 자료 확인과 질문 구조만 제공한다는 문장을 크게 썼다.
화양2 준비모임은 조건을 읽고 자기 쪽 대표 두 명과 통역 필요 인원을 정했다. 모든 자료를 선우에게 넘기지 않고 당사자가 원본 보관자를 맡았다.
첫 회의 날 예정 시간이 끝나자 질문이 남았다. 소라는 한 시간만 더 하자고 했지만 미라는 다음 유급 시간으로 넘겼다.
분위기는 차가워졌다. 절박한 사람 앞에서 시계를 보는 모습이 야박해 보였다. 그러나 통역자도 작업장을 닫고 왔고 기록 담당도 다음 노동이 있었다.
남은 질문에는 번호와 다음 답변 시각을 붙였다. 급한 안전 항목 하나만 공식 신고 창구로 바로 보냈다.
마틴은 회의 뒤 자기가 무료로 알아봐 주겠다고 소라에게 속삭이려다 멈췄다. 과거 도움받은 마음과 지금 조합원이 만든 기준이 충돌했다.
그는 대신 다음 수리 교실에서 화양2 작업장 공구 점검을 유급 신청할 수 있는 서식을 건넸다. 호의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노동 계약이었다.
월말 결산에는 사용 승인, 실제 지출, 남은 상한이 따로 표시됐다. 누구의 선행도 수입으로 잡히지 않았고 미확정 공공 지원도 넣지 않았다.
외부 자문 후보 세 곳의 견적도 공개했다. 시간당 금액만 싼 곳은 이동비와 문서 검토비가 별도였고, 가장 비싼 곳은 주민 대신 협상까지 맡겠다고 했다. 조합은 상담 범위를 점유 확인 절차와 안전 통지 검토로 한정했다.
선우는 화양2 자문을 연결한 사람이었으므로 업체 선택 투표에서 빠졌다. 소개와 결정이 한 사람 손에 붙지 않도록 미라와 소라, 이정훈이 견적의 포함 항목을 따로 확인했다.
선정된 자문자는 한 번에 모든 문서를 가져가지 않았다. 첫 회의 두 시간, 보완 문서 검토 두 시간, 결과 설명 두 시간으로 나눴고 각 단계 뒤 계속 여부를 다시 정하게 했다.
영수증에는 `좋은 뜻`이나 `연대 활동`이라는 항목이 없었다. 이동 시간, 면담 시간, 문서 쪽수와 반환 날짜가 있었다. 주민이 준비한 복사와 통역에도 별도 작업표가 붙었다.
화양2 준비모임은 자문비를 전부 동화4 조합에 기대지 않기로 했다. 첫 단계는 조합 상한 안에서 내고, 두 번째부터는 화양2가 공개 모금할지 유급 공동작업으로 줄일지 결정하기로 했다.
그 선택 때문에 상담 속도는 느려졌다. 그러나 삼백육십만 원이 먼저 바닥나고 남은 질문을 무료 노동으로 떠넘기는 방식보다 다음 달까지 책임자를 남기는 편이 낫다는 결론이었다.
서미라는 결산판 아래에 한 문장을 썼다. `도움의 범위도 노동한 사람이 계속 남을 수 있게 정한다.`
360만 원은 골목이 움켜쥔 비상금도, 바깥에 베푸는 상금도 아니었다. 이미 합의한 급여와 임대, 안전을 지키면서 새로운 책임을 얼마나 맡을지 함께 정하는 기준이었다.
회의실 불이 꺼질 때 선우는 미완 질문표를 기록 상자에 넣었다. 무료 밤샘으로 빈칸을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날 같은 사람이 다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