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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6화]

약관보다 먼저 온 말

작성: 2026.04.01 19:44 조회수: 44
창작물 안내
[AI 생성물] 본 소설의 내용과 표지는 인공지능(AI) 모델을 통해 기획 및 작성된 허구의 창작물입니다.
이 콘텐츠는 보험을 소재로 한 창작물이며 실제 상품 추천이나 보장 판단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토요일 오전의 사무실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평일이면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와 전화벨, 탕비실 문이 급하게 닫히는 소리가 뒤섞여 늘 조금 어수선했다. 그런데 주말엔 그런 소리가 빠져나가고 책상 사이에 공기만 남았다. 띄엄띄엄 나온 설계사 몇 명이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고, 식은 종이컵 커피 냄새가 천천히 떠다녔다.

현우는 서랍을 열었다.

맨 위에 올려둔 요약본이 보였다. 열두 페이지. 형광펜 줄과 포스트잇, 고객이 헷갈릴 만한 부분에 붙여 둔 메모까지. 어제까지만 해도 든든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두껍고 앞서 나가는 얼굴 같았다.

그는 요약본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그리고 또 꺼냈다.

옆자리에서 서류를 넘기던 아라가 흘끗 봤다.

"뭐 해요. 마술 연습해요?"

현우가 요약본을 반쯤 든 채 멈췄다.

"가져갈지 말지 고민 중이요."

"가져가요."

아라가 무심하게 말했다.

"대신 먼저 꺼내진 말고."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요약본보다 더 손에 잡혔다.

박은주 씨와 약속한 카페는 지하철 3번 출구 골목 안쪽에 있었다. 유리문을 열자 볶은 원두 냄새와 에어컨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창가 쪽에 앉아 있던 박은주 씨가 현우를 보고 가볍게 손을 들었다.

지난번보다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웃음이 먼저 나온 얼굴은 아니었다.

현우는 카운터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컵을 받아 드는 동안 속으로 짧게 되뇌었다.

질문 먼저.

설명은 나중.

자리에 앉자 박은주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말인데 나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도 주말이 더 편할 때가 있어서요."

말해 놓고 보니 조금 어색했다. 현우는 괜히 컵 뚜껑을 한 번 눌렀다.

딸깍.

작은 소리가 둘 사이에 떨어졌다.

"지난번에 어머니 쪽으로 알아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현우가 천천히 말했다.

"오늘은 제가 먼저 설명드리기보다, 은주 씨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어요. 괜찮으시면요."

박은주 씨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보통은 바로 설명부터 하지 않아요?"

"보통은 그랬죠."

현우가 솔직하게 웃었다.

"근데 제가 지난번에 좀 빨랐던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박은주 씨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완전히 웃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경계가 한 겹 내려간 얼굴이었다.

박은주 씨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말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예순두 살. 작년 가을에 당뇨 진단을 받았고, 지금은 약으로 조절 중이었다. 큰 합병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병원은 꾸준히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뒤로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 뒤부터 박은주 씨는 사소한 것도 그냥 넘기지 못하게 됐다.

말하는 동안 그녀의 손가락이 컵 옆면을 천천히 문질렀다. 현우는 그 움직임을 한 번 보고, 다시 시선을 얼굴로 옮겼다.

"어머니는 뭐라고 하세요?"

"괜찮대요."

박은주 씨가 바로 답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덧붙였다.

"늘 괜찮다고 하세요. 병원도 별거 아니라고 하고, 약 먹으면 된다고 하고. 그런 얘기 꺼내는 것도 싫어하시고요."

"그럼 오늘 이 자리는 은주 씨가 먼저 만든 거네요."

박은주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요."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페 안쪽에서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진동 온 휴대폰을 뒤집어 놓는 소리도 들렸다.

현우는 그 침묵을 서둘러 메우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여기서 바로 조건을 설명했을 것이다. 어떤 경우가 가능하고, 어떤 경우가 까다롭고, 준비해야 할 게 무엇인지. 틀린 말은 아니었겠지만, 오늘은 그 말들이 너무 먼저인 것 같았다.

"은주 씨는 뭐가 제일 걱정되세요?"

질문이 나가자마자 현우는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준비한 문장이 아니었다.

박은주 씨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이 창밖으로 잠깐 흘렀다가 돌아왔다.

"제가 늦을까 봐요."

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은주 씨가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아버지도 그랬거든요. 괜찮다고만 하다가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괜찮다고 하면, 저는 그 말이 안심이 안 돼요. 믿고 싶긴 한데, 믿었다가 또 늦을까 봐."

그제야 현우는 자신이 놓친 게 뭔지 알았다.

박은주 씨가 알아보는 건 단순히 어머니의 병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당뇨라는 단어 뒤에 붙어 있는 건 질병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한 번 놓친 사람의 시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방식의 후회.

가방 안의 요약본이 갑자기 더 멀게 느껴졌다.

현우는 컵을 내려놓고 자세를 조금 바로 했다.

"그럴 수 있겠네요."

겨우 그 말이었다.

잘 만든 위로도, 번듯한 공감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정도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더 좋은 말을 찾다가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박은주 씨가 작게 웃었다.

"이상하죠? 어머니 걱정 얘기하는데, 사실은 제 겁 얘기 같아서."

"안 이상해요."

현우가 말했다.

"오히려 그걸 알아야 제가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 뒤로 상담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현우는 어머니의 현재 상태를 더 정확히 알아야 확인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가능성만 부풀리지도 않았고, 괜찮다는 말로 덮지도 않았다. 어떤 건 바로 답하기 어렵고, 어떤 건 확인이 필요하다고 차분히 말했다.

박은주 씨는 중간중간 질문을 했다.

"그럼 병원 기록이 많이 중요해요?"

"네. 지금 상태가 어떤지가 제일 중요해요."

"아예 안 되는 경우도 있어요?"

현우는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펜 끝이 메모장 위에서 한 번 망설였다가 내려앉았다.

"있어요. 근데 아직은 그렇게 단정할 단계는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섣불리 괜찮다고도, 안 된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박은주 씨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컵만 내려다봤다. 실망한 표정이라기보다, 이상하게 긴장이 조금 풀린 얼굴이었다.

"그 말이 더 낫네요."

"어떤 말이요?"

"모르겠으면 모른다고 하는 거요."

현우는 순간 웃을 뻔했다. 칭찬인지 반성문인지 애매한 말이었다.

"그건 제가 요즘 배우는 중이라서요."

"늦게 배우시네요."

박은주 씨가 처음으로 조금 편하게 웃었다.

현우도 따라 웃었다.

"그러게요."

카페를 나설 때쯤엔 햇빛이 유리창에 더 깊게 걸려 있었다. 현우는 끝내 요약본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음에 확인해야 할 것들을 메모장에 짧게 적었다. 병원 진단 시기, 현재 복용 약, 최근 검사 여부. 단어들은 짧았지만, 오늘은 그 앞에 붙는 표정들이 함께 기억났다.

문 앞에서 박은주 씨가 잠깐 멈췄다.

"오늘은… 좀 덜 급해졌어요."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박은주 씨는 가방 끈을 고쳐 메며 말했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아닌데, 그래도 제가 뭘 무서워하는지는 알겠어서요. 그게 좀 다르네요."

현우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그는 가방을 열어 요약본 첫 장을 펼쳤다. 형광펜 줄이 빼곡했다.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오늘은 그 준비가 먼저 나설 차례가 아니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아라가 자기 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현우가 가방을 내려놓자, 아라가 묻지도 않은 척 물었다.

"그래서요?"

"설명보다 질문을 더 했어요."

"망했어요?"

"아뇨."

현우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오히려 덜 망했어요."

아라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서류를 덮으며 현우를 한 번 봤다.

"그럼 된 거죠."

별것 아닌 말인데도 묘하게 등을 밀었다. 잘했다는 칭찬보다, 계속 그렇게 하라는 허락처럼 들렸다.

현우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자 화면 아래로 메시지 알림이 떴다.

김정호 씨.

짧은 문장이었다.

'다음 주 중에 잠깐 뵐 수 있을까요.'

현우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재상담일 수도 있었다. 항의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다. 짧은 문장 하나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뒤집어 놓으려다가, 그는 다시 화면을 켰다.

예전 같았으면 먼저 무슨 설명을 해야 할지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엔 달랐다. 만나면 뭘 말할지가 아니라, 뭘 물어야 할지가 먼저 떠올랐다.

손끝이 잠깐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답장을 쳤다.

'네, 가능합니다. 편하신 시간 알려주시면 맞추겠습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른 뒤에도 가슴이 편해지진 않았다. 오히려 다음 주가 더 또렷해졌다. 박은주 씨 어머니 건도 아직 남아 있었고, 김정호 씨는 어떤 얼굴로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점장이 말한 마감도 그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현우는 하나쯤은 분명히 알았다.

사람이 숨기고 있는 답은, 설명으로 밀어붙인다고 먼저 나오지 않는다는 것.

가끔은 질문 하나가 돌려 읽은 약관보다 먼저 도착한다는 것.

그리고 그 순서를 한 번 바꾸고 나면, 다음에 또 두려운 자리 앞에 섰을 때도 아주 조금은 덜 예전의 자신으로 앉게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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