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전, 탕비실 전기포트가 길게 끓는 소리를 냈다.
현우는 믹스커피 봉지를 뜯다가 손을 잘못 놀렸다. 커피 가루보다 설탕이 먼저 종이컵 안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그는 컵 안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뜨거운 물을 부었다. 너무 달면 물처럼 마시면 된다. 오늘은 그 정도 타협이면 충분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아라가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박은주 씨 연락 왔어?”
“아직요. 어머니랑 상의해 보고 오전 중에 말씀 주신다고 했어요.”
“연락 오면 먼저 확인해. 누가 상담받는 사람이고, 누가 자료 제출에 동의하는 사람인지.”
짧은 말이었지만 현우는 수첩을 열어 그대로 적었다. 설명하기 전에 질문하라는 말과 닮았지만, 이번에는 상대의 마음만이 아니라 정보의 주인도 확인해야 했다.
열한 시가 되기 전에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머니가 같이 설명을 듣겠다고 하셨어요. 회사 상담실에서 뵐 수 있을까요? 서류도 어머니가 직접 가져가실 거예요.]
현우는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지난번에 박은주가 혼자 어머니 일을 알아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좋은 변화인지, 어머니가 딸의 걱정에 못 이겨 따라오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지점 상담실을 예약하고 답장을 보냈다.
[네. 어머니께서 편하신 속도로 진행하겠습니다. 서류는 바로 열지 않고 먼저 제출 범위와 동의를 함께 확인할게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박은주가 나타났다. 그 옆에는 회색 카디건을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예순을 조금 넘긴 얼굴이었다. 박은주가 “저희 어머니예요”라고 소개하자, 어머니는 현우를 향해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한 손에는 얇은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딸이 자꾸 걱정을 해서요. 제가 직접 듣는 게 낫겠다 싶어서 왔어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봉투를 쥔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현우는 두 사람을 지점 안쪽 상담실로 안내했다. 문을 닫고 바깥 소리가 새지 않는지 확인했다. 테이블에는 물 세 잔과 빈 메모지, 회사의 상담·심사 자료 접수 안내서를 올려뒀다.
박은주가 봉투를 현우 쪽으로 밀려 하자, 현우가 손바닥을 펴서 조용히 멈췄다.
“병원에서 받은 서류예요. 자세한 내용은 어머니가 직접 말씀드릴 거예요.”
현우는 봉투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 이 자료를 제가 보고 필요한 항목을 확인해도 괜찮으실까요? 아직 가입 가능 여부를 단정하는 단계는 아닙니다. 심사에 실제로 제출할 자료는 어머니 본인의 동의와 회사 접수 절차를 거쳐야 하고요. 딸에게 결과를 같이 설명드리는 범위도 어머니께서 정하실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조금 놀란 얼굴로 박은주를 봤다.
“내가 와도 그런 걸 또 확인해요?”
“같이 오신 것과 의료정보를 열람하고 제출하는 동의는 따로 확인하는 게 안전합니다. 오늘 상담만 듣고 자료는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 말 뒤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박은주는 어머니 대신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컵 옆면만 천천히 문질렀다. 현우도 기다렸다.
어머니가 먼저 봉투를 자기 쪽으로 다시 당겼다.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봉투 위에 손바닥을 올린 채 말했다.
“내가 숨기려는 건 아니에요. 병원 다니고 약 잘 먹으면 됐지, 딸이 뭘 그렇게까지 겁을 먹나 싶었던 거지.”
“엄마.”
박은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버지 때도 다 괜찮다고 했잖아.”
어머니의 눈이 딸에게로 갔다. 입술이 한 번 다물렸다. 현우는 설명을 끼워 넣지 않았다. 당뇨나 혈압약이 심사에서 어떤 의미인지 말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지만, 지금은 그 말보다 두 사람이 서로의 속도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한참 뒤 어머니가 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왜 그러는지는 안다. 그렇다고 되는 것도 아닌 걸 된다고 믿게 하지는 마라.”
박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조금 붉어졌지만 웃어 넘기지 않았다.
현우가 천천히 말했다.
“그 부분은 저도 약속드리겠습니다. 괜찮다고 미리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불리한 조건도 숨기지 않고요.”
그제야 어머니는 안내서를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현우는 수집 목적, 확인할 자료의 범위, 심사 제출 여부, 결과를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지를 한 항목씩 읽어 줬다. 어머니는 모르는 문장에서 바로 질문했고, 박은주는 옆에서 날짜를 확인해 줬다. ‘딸 동석 및 결과 공동 설명’ 칸은 어머니가 직접 체크했다. 서명도 어머니가 했다.
마지막 칸을 확인한 어머니가 봉투를 다시 현우 쪽으로 밀었다.
“작년 가을부터 당뇨 약을 먹고 있고, 혈압 약은 그보다 먼저 시작했어요. 빠뜨리지 말고 둘 다 확인해 줘요.”
현우는 그 말을 어머니의 설명으로 기록했다. 신분 확인과 동의 기록, 제출할 자료의 범위가 모두 정리된 뒤에야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료비 영수증과 처방 내역 사본이 날짜순으로 들어 있었다. 작년 여름부터 이어진 혈압약 기록, 가을 이후의 당뇨 치료 기록. 현우는 필요한 날짜와 진료 지속 여부만 확인했다. 사본을 더 만들지 않았고, 상담과 관계없는 항목은 메모하지 않았다. 제출이 필요한 페이지는 두 사람 앞에서 구분해 공식 접수 목록에 적었다.
박은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달라질까요?”
현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추가 확인 사유가 될 수는 있지만, 이 자료만 보고 가입 가능 여부나 조건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공식 심사 결과가 오면 먼저 어머니께 설명드리고, 어머니가 방금 정한 범위 안에서 은주 씨와 함께 보겠습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나온 건 나온 대로 말해 줘요.”
“네.”
현우는 접수 목록의 사본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 어떤 문서가 들어갔는지, 접수 뒤 누가 결과를 받을지 적힌 짧은 기록이었다. 어머니는 자기 이름과 연락처, 반환받을 원본이 없는지까지 직접 확인했다. 박은주는 그 종이를 옆에서 한 번 읽고 나서야 컵을 놓았다. 두 사람이 같은 문서를 보고 있었지만, 결정하는 손은 끝까지 어머니의 것이었다.
상담이 끝나고 두 사람이 나간 뒤, 현우는 상담실에 혼자 남았다. 꺼낸 설명 자료는 한 장도 없었다. 대신 서명된 동의서와 자료 접수 기록이 정해진 서류함에 들어갔다. 오늘 많이 들은 건 병명보다 두 사람 사이의 말이었다. 한 사람은 늦을까 두려웠고, 다른 한 사람은 두려움이 자신의 선택을 대신할까 경계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아라가 바로 물었다.
“동의 확인했어?”
“어머니가 직접 오셨어요. 제출 범위랑 은주 씨 동석 범위를 어머니가 정했고, 공식 접수 기록도 남겼습니다.”
“심사 결과 나오기 전에는?”
“가능하다고도, 안 된다고도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라는 몇 초쯤 현우를 보다가 짧게 말했다.
“그럼 이제 기다려.”
현우는 자리에 앉아 수첩을 펼쳤다. 적힌 말은 전보다 적었지만, 누가 말했고 누가 동의했는지는 전보다 분명했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미리보기에는 짧은 문장만 떠 있었다.
[김정호입니다. 작년에 가입한 계약 자료는 확인해 보셨나요?]
현우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첫 상담 전, 분석표 빈칸 옆에 그렸던 물음표가 떠올랐다. 오늘은 정보의 주인을 먼저 확인했다. 이제는 오래 미뤄 둔 자기 책임의 주인을 확인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