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아침, 사무실 복도의 형광등 하나가 또 깜빡이고 있었다. 시설팀에 신고한 지 사흘째라는데도 그대로였다. 현우는 그 밑을 지날 때마다 괜히 한쪽 눈을 찡그렸다. 오늘은 월간 실적 면담일이었다. 점장 책상 앞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출근길 내내 머릿속으로만 연습했는데 막상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자 엑셀 시트의 계약 건수 칸이 너무 하얗게 비어 있었다. 준비한 말이 전부 우스워 보였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순간, 현우의 어깨가 먼저 굳었다.
박은주 님.
숨을 한 번 삼키고 메시지를 열었다.
'도 설계사님, 지난번에 여쭤봤던 거요. 기존에 아픈 데가 있으면 정말 가입이 어려운 건지,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아니라 저희 어머니 건이에요.'
어머니.
현우는 그 두 글자를 두 번, 세 번 읽었다. 카페에서 박은주 씨가 유난히 자기 얘기를 비껴 가던 순간들, 밝게 웃으면서도 끝내 눈을 오래 맞추지 않던 표정이 뒤늦게 이어졌다.
아, 그래서였구나.
놓친 장면들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하지만 반가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존 병력이 있으면 심사가 까다로워질 수 있다는 건 안다. 그런데 어디가, 얼마나,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는 채 지금 단정적으로 답하면 어떡하지. 괜히 겁만 주거나, 반대로 희망만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현우는 답장을 썼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쓰다가 지웠다.
'최근 치료 이력에 따라…'
또 지웠다.
화면 위에서 커서만 깜빡였다. 마치 빨리 뭐라도 말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결국 현우는 휴대폰을 뒤집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지금 보내면 틀릴 것 같고, 안 보내면 놓칠 것 같았다. 둘 다 싫었다.
열 시가 조금 넘어 서아라가 출근했다. 평소 같으면 편의점 커피라도 하나 들고 들어왔을 텐데 오늘은 빈손이었다. 자리에 앉은 아라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서랍을 열었다. 뭔가를 확인하듯 손을 넣었다가 곧 조심스럽게 다시 닫았다. 급한 것도 아닌데 소리가 나지 않게 닫는 사람처럼. 그 작은 동작이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현우는 몇 번 망설이다가 의자를 끌었다.
"선배님, 잠깐 여쭤봐도 돼요?"
아라는 모니터를 켜며 물었다.
"면담 준비는 했고?"
"그건 하고는 있는데요. 박은주 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그제야 아라가 고개를 돌렸다. 놀랐다기보다 올 게 왔다는 얼굴이었다.
"뭐라고?"
"본인 건이 아니라 어머니 건이래요. 기존 병력이 있으면 가입이 정말 어려운지 자세히 알고 싶다고요."
아라는 손에 쥔 볼펜을 천천히 돌렸다. 생각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툭, 툭, 손가락 사이에서 미세한 소리가 났다.
"답장 보냈어?"
"아뇨.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잘했네."
볼펜이 멈췄다.
"모르겠으면 안 보내는 게 맞아. 아는 척하다 틀리면, 그다음부터는 네 말 한 줄 한 줄이 다 의심받아."
맞는 말이었다. 너무 맞아서 더 답답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다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면담까지 몇 시간 안 남았고 실적표는 비어 있었다. 겨우 다시 이어진 상담 하나마저 놓치면 정말 할 말이 없어질 것 같았다.
그때 점장실에서 전화가 왔다. 면담이 두 시에서 네 시로 밀렸다고 했다. 두 시간을 번 셈인데 이상하게 숨통이 트이지 않았다. 유예가 아니라 형 집행 연기 같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머릿속 걱정도 더 길어졌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아라가 외근 서류를 챙기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현우는 공용 서랍에서 상담 양식을 꺼내려다 반쯤 열린 아라의 서랍을 보고 손을 멈췄다. 안쪽에 접힌 메모지 한 장이 보였다. 누렇게 바랜 종이였다. 오래된 영수증처럼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접힌 면 바깥으로 드러난 한 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미안합니다, 형수 씨. 제가 더 물어볼 걸.'
현우는 그대로 굳었다. 아라의 글씨였다.
형수 씨.
고객 이름일까, 가족일까. 아니면 둘 다 아닐까. 하지만 '더 물어볼 걸'이라는 문장만큼은 너무 선명했다. 박은주 씨 앞에서 멈춰 선 지금의 자신과 이상할 만큼 닮아 있었다. 현우는 황급히 서랍을 닫았다.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심장이 빨리 뛰었다.
네 시 면담은 예상보다 더 숨 막혔다. 점장은 실적표를 한 장 넘기더니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 작은 동작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도현우 씨, 이번 달 계약 실적 제로지? 상담 건수는 있는데 전환이 하나도 안 됐네. 이유가 뭐야?"
현우는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진행 중인 건이 두 건 있습니다. 고객 상황을 좀 더 파악하고 있어서요."
"파악만 하다가 끝나면 그건 실적이 아니야."
말이 끊겼다. 점장은 손가락으로 빈칸을 톡톡 두드렸다.
"다음 주까지 최소 한 건은 만들어 와.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가 없으면 팀에서 설명이 안 돼."
"네."
대답은 했지만 자기 목소리가 남의 것처럼 들렸다. 점장실 문을 나서는 순간 복도 형광등이 또 한 번 깜빡였다. 아침보다 더 거슬렸다. 마치 오늘 하루 내내 자기만 보고 비웃는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사무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키보드 소리, 전화벨,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하나씩 사라지고 나니 남은 건 에어컨 바람 소리와 형광등의 미세한 웅웅거림뿐이었다. 현우와 아라만 남았다.
현우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박은주 씨와의 메시지 창이 열려 있었다.
'어머니 상황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써 놓고도 손이 멈췄다. 너무 건조한가. 너무 늦었나. 아니면 이렇게 돌려 말할 시간에 그냥 아는 범위라도 설명하는 게 맞나. 실적 면담에서 들은 말이 자꾸 귓가에 남았다.
결과가 없으면 설명이 안 된다.
"그거 아직도 쓰고 있어?"
아라의 목소리가 조용히 날아왔다. 현우가 고개를 들자, 아라는 모니터를 끈 채 의자를 반쯤 돌려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단단한 표정이 아니었다. 피곤해서라기보다, 뭔가를 더 숨길 힘이 없는 사람 같았다.
"나도 그런 적 있었어."
현우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보험 가입하러 온 게 아니라, 누군가 때문에 알아보러 온 고객. 그때 난 실적이 급했어. 지금 너처럼. 그래서 안 물어봤지. 왜 알아보는지, 누구 때문인지. 그냥 설계안부터 보여 줬어. 보장 설명하면 결국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라는 잠깐 웃었다.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안 넘어오더라. 당연하지. 그 사람은 상품이 아니라 답을 찾으러 왔는데, 나는 혼자 판매 멘트만 하고 있었으니까."
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낮에 본 메모가 떠올랐다. 아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이름이 형수 씨였어. 딸이 아파서 보험을 알아보러 온 거였는데, 나는 그걸 상담 끝나고 일주일 뒤에야 알았어. 그 사이 형수 씨는 다른 데도 알아봤고, 급한 마음에 되는 대로 가입을 시도했어. 그런데 딸은 심사에서 거절당했지."
마지막 문장은 아주 담담했는데, 그래서 더 무거웠다. 아라는 책상 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오래된 먼지를 닦는 사람처럼.
"내가 그날 한 번만 더 물었으면, 적어도 다른 방법을 같이 찾을 시간은 있었을 거야. 가입이 됐을지 안 됐을지는 몰라도, 혼자 급하게 뛰게 두진 않았겠지."
현우는 위로 비슷한 말을 떠올렸다.
선배님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그때는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그 말들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몇 년 동안 서랍 안에 접어 둔 메모 한 장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라도 더 말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설득하지 않아도 되고, 괜찮다고 덮지 않아도 되는 시간. 현우는 이상하게 그게 더 진짜 같다고 느꼈다.
한참 뒤, 아라가 말했다.
"그래서 너한테 자꾸 묻는 거야. 설명하지 말고 먼저 물어보라고. 고객이 말 안 한 이유가 있으면, 그 이유부터 들어야 해. 그래야 네가 할 수 있는 말도 생겨."
현우는 천천히 휴대폰을 들었다. 적어 둔 문장을 전부 지우고 다시 썼다. 이번에는 아는 척하는 문장 대신, 모른다는 걸 숨기지 않는 문장으로.
'편하신 시간에 잠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어머니 상황을 먼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섣불리 답드리기보다, 정확히 듣고 같이 생각해 보고 싶어요.'
전송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지금 이 한 줄이 실적을 늦추는 선택일 수도 있었다. 반대로, 겨우 다시 열린 문을 닫지 않게 하는 선택일 수도 있었다. 빨리 답하는 사람과 제대로 묻는 사람 사이에서, 현우는 처음으로 잠깐이 아니라 끝까지 고민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라는 이미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무 말 없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그제야 전송을 눌렀다.
사무실 문을 나서는데 복도 형광등이 또 한 번 깜빡였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박은주 씨의 답장인가 싶어 급히 꺼내 들었는데, 화면에 뜬 이름은 달랐다.
김정호 씨.
현우는 복도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췄다.
'도 설계사님, 시간 되시면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번 상담 뒤 굳어 있던 표정, 뒤늦게 도착했던 짧은 문자, 며칠 동안 답장 창만 붙들고 있던 밤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박은주 씨에게는 이제 막 질문을 건넸고, 김정호 씨는 다시 만나자고 했다.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은데, 둘 다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복도 끝 형광등이 한 번 더 깜빡였다. 현우가 화면을 내려다보며 숨을 길게 들이마시는 순간,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이번엔 저 혼자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