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운영 규약에 마지막 서명이 들어간 지 일주일 뒤, 아르덴 옥상 바에는 손님이 없었다. 영업 종료 뒤였고 의자는 테이블 위에 뒤집혀 있었다. 윤서린은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오래된 루셀 홍보 계약서를 펼쳤다.
7번 조항에는 공개 일정에서 두 사람이 연인처럼 보이도록 협조한다는 문장이 남아 있었다. 계약은 이미 정상 협업 계약으로 바뀌었고 그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그래도 서린은 종이를 버리지 못했다. 거짓으로 시작한 거리와 진짜로 남은 감정을 구분하기 어려울 때마다 그 문장을 봤다.
강도윤이 계단 문을 열고 올라왔다. 주방 마감 뒤라 셔츠 소매가 젖어 있었고 손에서는 레몬 세제 냄새가 났다. 그는 서린 앞의 종이를 보고 맞은편이 아니라 옆 테이블에 앉았다.
"또 계약서 보고 있어요?"
"마지막으로요."
"지난번에도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서린은 7번 조항 위에 선을 하나 그었다. 도윤이 웃지 않았다. 그 종이가 두 사람 사이에서 무엇을 대신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왔던 날,"
서린이 먼저 말했다. "도윤 씨한테 전화하고 나서 생각했어요. 이 년 전에는 왜 전화하지 않았을까. 왜 한 번 더 묻지 않았을까."
도윤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옥상 난간 밖으로 차 불빛이 지나갔다. 예전 같으면 가벼운 농담으로 서린이 말을 바꿀 시간을 줬을 것이다. 오늘은 기다리기만 했다.
2022년 기사 전날 밤, 도윤은 배성재 측 대행사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기사에 아르덴 장부와 서린의 이름까지 넣을 수 있다는 협박이었다. 그는 윤종필에게 알렸고, 윤종필은 호텔에서 떠나 주면 기사 수위를 낮출 수 있다고 했다. 도윤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내가 떠난 건 누가 끌어내서가 아니에요."
도윤이 말했다. "서린 씨를 지킨다고 내가 선택했습니다. 보호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은 같이 결정할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 서린 씨가 남겠다고 하면 내가 못 떠날까 봐."
그는 떠나던 날 서린에게 '기다리지 말라'는 문자 한 줄만 보냈다. 기사 자료도, 윤종필과 나눈 말도 설명하지 않았다. 서린이 답하지 않자 그것을 동의처럼 받아들였다.
"나는 그 문자를 보고 전화기를 뒤집었어요."
서린이 말했다. "그날 아버지는 투자자 회의에 있었고, 직원 급여가 하루 밀렸고, 로비에서는 기자가 기다렸어요. 일을 먼저 정리하면 밤에 물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밤이 되니까 도윤 씨는 이미 없었고요."
도윤이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가 다시 무릎으로 내렸다. 서린은 그 움직임을 봤다.
"그 뒤에는 일부러 안 물었어요. 떠난 사람을 붙잡지 않는 게 자존심이라고 생각했고, 호텔을 지키는 게 더 급하다고 말했어요. 사실은 일로 숨었어. 한 번 더 물었는데도 같은 답을 들을까 봐."
둘의 잘못은 같은 모양이 아니었다. 도윤은 정보를 혼자 쥐고 사라졌고, 서린은 그 침묵 앞에서 질문을 멈춘 뒤 모든 관계를 통제 가능한 일로 바꾸었다. 누가 더 아팠는지 따져 서로의 책임을 없애지 않았다.
도윤이 물었다. "가짜 연애 계약을 나한테 내민 것도 그래서였어요?"
"일이면 도윤 씨가 떠나도 이유가 남으니까요. 계약 종료라고 부르면 되니까."
서린은 종이를 접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도윤 씨를 다시 데려오는 데 호텔이 필요했어요. 아르덴을 살리는 데 도윤 씨가 필요했던 것만은 아니에요."
도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고백을 기다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래 기다린 답일수록 받는 사람에게 즉시 기뻐할 의무를 주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숨을 골랐다.
"지금도 호텔 때문에 내가 필요한 건 아니에요?"
"일로는 필요해요. 주방 운영책임자로요. 그 계약은 운영위원회가 평가할 거고, 내가 혼자 연장할 수 없어요."
서린은 도윤을 똑바로 봤다. "그거랑 별개로 만나고 싶어요. 카메라가 없고, 호텔이 위험하지 않은 날에도."
바람이 계약서 한쪽을 들었다. 도윤이 손끝으로 종이를 눌렀다. 두 사람의 손이 닿지는 않았다. 가까웠지만 어느 쪽도 우연인 척 거리를 없애지 않았다.
"나는 미래에 안 떠나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요."
도윤이 말했다. 서린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가 풀렸다. "일이 바뀔 수도 있고, 우리가 싸울 수도 있으니까. 대신 떠나기 전에 말하겠습니다. 상대를 위한 결정이라면서 혼자 결론 내리지 않고."
"나도 괜찮은 척하면서 일로 숨지 않을게요. 바로 답을 못 해도, 답을 미루고 있다는 건 말할게요."
그것은 연애 계약의 새 조항처럼 들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종이에 적지 않았다. 어기지 않는다는 보증도 요구하지 않았다. 약속이 깨지면 다시 말하고 책임지는 것까지 포함한 대답이었다.
도윤이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서린이 눈썹을 올리자 그가 말했다. "이건 계약서 아닙니다. 토요일 저녁 예약 확인이에요."
아르덴에서 세 블록 떨어진 작은 식당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홍보팀도, 루셀도, 호텔 투자자도 모르는 자리였다. 도윤은 예약해 놓고도 서린에게 강요하는 것 같아 취소할까 고민했다고 했다.
"토요일에 시간 있어요?"
서린은 업무 캘린더를 열지 않았다. "있어요. 없으면 만들게요가 아니라, 원래 있어요."
도윤이 그제야 웃었다. 사진에 찍혀 여론을 바꿨던 웃음과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보여 줄 사람이 없었다. 서린은 그 표정을 오래 봐도 되는지 묻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서 지민의 메시지가 왔다. 내일 아침 공동운영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고, 두 사람 관계 질문은 받지 않도록 선을 그었다는 내용이었다. 서린은 고맙다고 답했다. 도윤과의 관계를 호텔의 좋은 이야기로 팔지 않는 것이 새 운영의 첫 시험 같았다.
서린은 7번 조항이 그어진 계약서를 파일에 넣었다. 없애지 않고 기록실로 보낼 생각이었다. 거짓 조항도 아르덴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사용했는지 남기는 기록이었다.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내려 줬다. 서린도 일어났다. 둘은 옥상 바 출구 앞에서 잠깐 마주 섰다. 도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악수처럼 보일 수 있는 높이였다.
서린은 그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가 천천히 맞물렸다. 계약 서명 때처럼 카메라 각도를 찾을 필요도,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웃을 필요도 없었다.
"이게 대답이에요?"
도윤이 낮게 물었다.
"아니요."
서린이 한 걸음 가까이 갔다. "대답은 만나고 싶어요였고, 이건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거예요."
서린이 먼저 입을 맞췄다. 짧고 조심스러웠다. 도윤은 뒤늦게 손을 올렸다가 서린의 어깨에 닿기 전 멈췄다. 서린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손을 얹었다.
둘은 사랑이 운명처럼 돌아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년의 상처가 한 번의 대화로 나았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과거에는 상대를 위한다며 혼자 선택했고, 지금은 불완전한 답을 서로 앞에서 말하기로 했다.
그것이 두 사람이 지금 선택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종이에 적지 않아도 서로 들은 대답이었다.
옥상 바 불을 끄고 내려갈 때 서린과 도윤은 손을 놓았다. 직원 복도 계단이 좁아 한 줄로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도윤이 먼저 내려가 문을 잡았고 서린이 뒤따랐다. 손을 놓아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날 두 사람에게는 어떤 계약보다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