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은은 카페에 오지 않았다. 대신 약속 시각 오 분 전에 서린에게 전화를 걸어 아르덴 지하 문서실로 내려와 달라고 했다. 목소리가 낮았고,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았다. 서린과 도윤이 지하 계단을 내려갔을 때 이하은은 서버 관리 직원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직접 흘린 게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하면 변명처럼 들릴 겁니다."
이하은은 인사 대신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기록부터 보셔야 해요."
화면에는 루셀 계약 검토 메일의 전달 규칙이 떠 있었다. 배성재가 최대 투자자로 들어오던 2019년, 일정 금액 이상의 계약은 투자자 법무 대리 계정에 자동 참조되도록 설정돼 있었다. 원래는 자금 집행을 감시한다는 명목이었다. 이하은이 이번 메일에 배성재를 직접 넣은 것이 아니라 서버가 오래된 규칙에 따라 외부 법무 계정으로 사본을 보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외부 법무 계정에서 파일을 내려받은 시각이 기사 첫 배포보다 세 시간 빨랐다. 접속한 주소는 배성재 사무실 회선이었고, 같은 계정이 2019년 장부 정정 요청 파일에도 접근한 기록이 있었다.
"이 규칙을 알면서도 없애지 못했습니다."
이하은이 말했다. "배성재 쪽에서 투자 계약 위반이라고 했고, 저는 이사회 승인 없이는 손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위험하다는 보고를 두 번 올렸지만 그 뒤로 밀지 않았어요. 제 책임도 기록해 주세요."
서린은 누가 잘못했는지 바로 정리하지 않았다. 서버 화면을 읽기 전용 이미지로 보존하고 관리 직원과 이하은이 확인서에 서명하게 했다. 외부 계정은 자료를 더 빼가지 못하게 즉시 차단하되, 기존 접속 기록은 삭제하지 않도록 법적 보존 조치를 걸었다.
1층 로비에는 김명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취재 요청을 거절당한 뒤 다시 온 것이었다. 이번에는 카메라도 녹음기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민과 중립 변호사가 자리에 함께 앉았다.
"기사 쓰러 온 게 아닙니다."
김명진이 먼저 말했다. "정정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제가 먼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제 이름으로 또 쓸 것 같아서."
그가 노트북에서 2019년 기사 원고 두 개를 열었다. 첫 번째 파일에는 현재 기사에서 사라진 문장이 있었다. '자료는 아르덴 투자자 배성재의 법무 자문팀이 제공했으며, 호텔 측의 별도 확인은 거치지 않았다.' 두 번째 파일에서는 그 문장이 삭제되고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왜 지웠습니까?"
지민의 질문은 짧았다.
김명진은 잠시 손을 내려다봤다. 배성재 측 홍보 대행사가 광고성 기획 기사 세 건을 약속했고, 원고료와 별도로 콘텐츠 자문료가 지급됐다. 직접 돈을 받은 계좌와 세금계산서 사본을 그는 가져왔다. 2022년 도윤 기사 때도 같은 대행사가 사진과 익명 제보문을 전달했다.
"사실 확인을 했습니까?"
도윤이 물었다.
"질의서는 보냈습니다. 답을 기다리기 전에 기사가 나갔습니다. 제가 내보냈습니다."
김명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지만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당시 원본 파일과 메일을 제출하겠습니다. 정정문도 제 이름으로 쓰겠습니다. 그걸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도윤은 준비해 온 외장 저장장치를 탁자에 올렸다. 서린은 그것을 보는 순간 알아봤다. 2022년부터 도윤이 혼자 모아 둔 자료였다. 김명진의 질의서, 인터뷰 전체 음성, 배성재 측 대행사의 회유 문자, 협력업체 지급 내역, 스캔들이 퍼진 뒤 취소된 계약과 당시 일정표가 폴더별로 정리돼 있었다.
"이걸 전부 공개하겠습니다."
서린이 도윤을 봤다. "전부라는 게 어디까지예요?"
"사생활과 직원 이름은 가리고, 주장에 근거가 된 자료는 빠짐없이요. 내가 서린 씨와 아르덴을 보호한다고 혼자 들고 있던 것까지 포함해서."
도윤은 한 박자 쉬었다. "그때는 내가 사라지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빈자리를 저 사람들이 자기 문장으로 채웠어요. 이번에는 내가 결정한 침묵까지 자료에 넣겠습니다."
중립 변호사는 공개와 보존을 나눴다. 원본 전체는 법적 증거로 봉인하고, 외부 공개본에는 개인정보와 무관한 제3자 이름을 가렸다. 음성은 문맥이 드러나는 길이로 제공하되 편집 지점을 표시했다. 지민은 자극적인 요약 제목 대신 연표와 원문 대조표를 첫 화면에 두기로 했다.
공개 페이지에는 반론 창구도 만들었다. 배성재 측과 기사 작성자, 법무 대리인이 자료별로 이의를 제출하면 원문 옆에 답변 시각과 함께 붙이되, 확인되지 않은 반론을 사실처럼 합치지는 않았다. 정정 이력은 이전 문장을 지우지 않고 아래에 쌓는 방식으로 남겼다.
삭제와 수정의 흔적까지 독자가 직접 비교할 수 있게 했다.
원문은 그대로 남았다.
도윤은 2022년 당시 함께 일한 조리사들에게 공개 동의를 따로 받았다. 동의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는 변조했고, 업무 기록은 이름 대신 역할로 표시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다며 주변 사람의 얼굴을 다시 기사에 올리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
한소희가 회의 중간에 들어와 2022년 행사 꽃 납품서를 건넸다. 도윤 비방 기사가 나간 날, 배성재 대행사 직원이 아르덴 후문 회의실을 사용했다는 서명이 남아 있었다. 소희는 그날 우연히 들은 말도 진술했다. '셰프가 먼저 무너지면 호텔 값은 뒤에 내려온다.' 기억만으로 단정하지 않도록 당시 함께 있던 직원 이름과 근무표를 함께 냈다.
서린은 공개 시각을 목요일 루셀 행사 직전으로 잡지 않았다. 행사에 맞춰 폭로하면 또 다른 홍보전으로 보일 수 있었다. 원본 검증 기관이 확인을 마친 뒤, 결과가 나오는 순서대로 올리기로 했다. 루셀에도 같은 자료와 보존 절차를 먼저 보냈다.
김명진은 정정문 첫 문장을 직접 읽었다. 자신의 2019년 및 2022년 보도 일부가 배성재 측 법무·홍보 자료와 유상 계약에 의존했고, 호텔과 도윤의 충분한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지민은 그 문장을 더 부드럽게 고쳐 주지 않았다.
배성재와 외부 법무 대리인, 관련 언론사에는 증거 보존 통지가 발송됐다. 자동 전달 규칙은 꺼졌고, 누가 언제 껐는지도 서버 기록에 남았다. 이하은은 법무팀 내부 감사를 자청했으며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약 파일 접근 권한에서 물러났다.
밤이 깊어 로비 조명이 절반 꺼진 뒤에도 자료 복사는 계속됐다. 도윤은 외장 저장장치가 봉인 봉투에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봤다. 서린은 옆에서 인수 목록을 한 줄씩 확인했다. 둘 중 누구도 상대에게 대신 맡기라고 하지 않았다.
2019년 기사에서 삭제된 한 문장은 복원된 원문 대조표 맨 위로 돌아왔다. 배성재 법무 자문팀이 자료를 제공했다는 짧은 문장이었다. 그 문장 하나가 모든 죄를 증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가 말했고, 누가 돈을 받았으며, 누가 지웠는지를 더는 '관계자'라는 말 뒤에 숨길 수 없게 했다.
도윤이 빈 저장장치 케이스를 접으며 말했다. "이제 내 자료가 아니네요."
서린은 봉인 봉투의 세 서명을 봤다. "그래서 이제 없어지기 어려워졌어요."
두 사람은 로비 유리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잠깐 봤다. 같은 편이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 침묵하는 일이 아니었다. 각자 가진 것을 같은 탁자에 올리고, 상대가 확인할 수 있게 두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