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엔 다리 전투 사흘 뒤 양군은 열흘 휴전에 서명했다. 무기를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정해진 선 밖으로 물리고, 심리와 장례, 곡식 배급을 먼저 하기로 한 약속이었다.
휴전 심리는 수도가 아닌 다리 양쪽 시장에서 번갈아 열렸다. 패자가 승자의 법정에 끌려왔다는 모양을 줄이고 피해 주민이 먼 길을 오지 않게 했다.
첫 피심리인은 연합 사령관 테르안이었다. 그는 왕실 질서를 지키려 했으며 열린 창고가 군대를 배신해 패했다고 주장했다.
심리관은 신념 자체를 죄로 묻지 않았다. 피난민이 있는 다리에 기병을 올린 명령, 후퇴자를 쏘라는 명령, 강제 전쟁세와 대관식 자금 지시를 각각 제시했다.
테르안은 영주 공동회의 결정을 따랐다고 했다. 공동회의록에는 그가 제안한 안과 반대한 영주, 기권한 대리인이 남아 있었다. 공동 책임은 개인 제안을 숨기지 못했다.
베도르 공작은 창고 방화 명령을 부인했다. 하인의 쪽지와 기름 수레표, 지휘 서신이 나왔다. 하인에게 불을 놓으라는 압박과 실제 거부도 따로 심리됐다.
왕정파 주민들은 영주를 벌하면 자기 영지가 해체될까 두려워했다. 수도 강경파는 반란 영지를 나눠 헌장 충성 도시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리안은 영주 직위와 영지 주민의 삶을 분리하자고 했다. 한 사람의 권한을 박탈할 수는 있어도 마을 이름과 토지, 공동체까지 형벌로 없앨 수는 없었다.
휴전안에는 영지 해체나 로벨 편입 조항이 들어가지 않았다. 영주 재산 중 전쟁에 직접 쓴 창고와 급료는 배상 재원으로 동결하되 주민 공동 창고는 보호했다.
영주 책임과 사병 강요를 한 문장에 섞지 않기 위해 사병 명부는 네 칸으로 나뉘었다. 자원 지휘, 급료 복무, 가족·배급 위협 아래 징집, 명령 불복종. 같은 부대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형이 정해지지 않았다.
강요를 주장한 병사는 증거가 없으면 거짓말쟁이로 처리되지 않았다. 당시 선택할 수 있었던 길, 가족 위치, 탈영 처벌 공고, 실제 행동을 함께 확인했다.
반대로 강요받았어도 민간인을 해친 행위가 사라지지 않았다. 피해 배상과 형을 정할 때 강요 정도를 고려하되 피해 진술은 독립된 칸에 남았다.
열린 창고를 지킨 주민 중에도 사병 가족에게 식량을 주지 않은 일이 있었다. 승리한 주민이라는 이유로 그 피해를 덮지 않았다.
곡식 호송대가 남긴 원장으로 어느 마을이 얼마를 받지 못했고 어느 부대가 빼앗았는지 대조했다. 구호 빚은 막연한 영지 배상금이 아니라 실제 자루와 집 수리, 치료 기간으로 나뉘었다.
전쟁으로 가난해진 주민에게 영주 배상까지 세금으로 걷지 못하게 했다. 동결한 전쟁 재산, 귀족 사냥터 수익, 지휘자 급료와 수도 공동 복구 기금이 부담을 나눴다.
헌장 가입 문제는 가장 큰 충돌이었다. 수도는 다시는 탈퇴하지 못하게 전 영지에 강제 서명을 요구했다.
미레안 주민 대표는 강제 서명이라면 왕의 인장과 다를 것이 없다고 반대했다. 자기 마을은 봉인과 구호 협약은 원하지만 수도 재판 관할은 더 논의하고 싶다고 했다.
의회는 영지별 공개 재표결 절차를 만들었다. 주민 명부 공개, 찬반 발언 보호, 사병 해산 뒤 최소 열흘, 기능별 선택과 재검토 날짜가 필요했다.
영주 한 명이 대신 표결할 수 없고 수도 군대가 회의장 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봉인 학교와 서로 다른 정치 입장의 관찰자가 계수만 확인했다.
첫 재표결은 칼세른에서 열렸다. 헌장 전면 복귀가 근소하게 통과했지만 수도의 영구 군대 주둔안은 부결됐다.
수도는 결과 일부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불평했다. 아델린은 헌장 참여가 수도의 모든 요구에 동의하는 빈 문서가 아니라고 했다.
미레안은 구호·봉인·재판 협력은 찬성하고 군사 동원은 지역 재표결을 거치게 했다. 조항별 결과가 서로 달랐다.
도르반에서는 헌장 복귀가 부결됐다. 사병 지휘관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주민은 수도도 믿지 못했다. 결과를 무효로 하지 않고 세 달 뒤 재논의 조건만 정했다.
헌장 지지자들은 전쟁에서 이기고도 한 영지를 놓쳤다고 분노했다. 엘리안은 전쟁 승리가 주민의 표를 소유하는 권리라면 왕관을 거부한 의미가 없다고 답했다.
도르반 반대표 중에는 수도 재판이 느렸다는 구체적 불만도 있었고 단순한 왕실 충성도 있었다. 감사자는 둘을 한 이유로 뭉치지 않고 다음 협상에서 고칠 일과 끝내 합의하지 못할 신념을 나눴다.
공개 재표결은 설득의 끝이 아니라 관계의 현재 상태를 정하는 절차였다. 다음 표결 날짜까지 수도가 불리한 결과를 이유로 곡식과 봉인 지원을 줄이지 못하게 휴전 조항을 붙였다.
도르반도 피난·치료·봉인 사고 통보 의무는 휴전 조항으로 받아들였다. 정치 가입과 생명 보호 기능을 완전히 같은 문으로 묶지 않았다.
테르안 심리는 일주일째에 결론 일부를 냈다. 사병 총지휘권 박탈, 전쟁 자금 재산 동결, 후퇴 사격과 강제 징집에 대한 추가 재판, 피해자 접근 금지였다.
그를 처형하라는 요구도, 아무 직위 없는 명예 공작으로 남기자는 요구도 부결됐다. 신변은 보호됐고 반론 기록도 보존됐다.
베도르 공작은 방화 지시와 주민 배급 전용이 확인돼 직위에서 해임됐다. 다음 영주를 엘리안이 임명하지 않고 주민 임시회가 기한부 행정 담당을 선출했다.
임시회에는 왕정 지지 귀족도 한 명 들어갔다. 출신보다 현재 권한과 이해관계 공개가 기준이었다.
사병들은 한꺼번에 헌장군으로 편입되지 않았다. 무기를 공동 보관하고 귀향, 민병 전환, 공개 재판 대기 중 선택했다.
귀향한 병사가 다시 보복당하지 않도록 각 마을에 불복종과 강요 기록 사본을 보냈다. 그렇다고 범죄 혐의까지 지운 귀향 증명서를 주지는 않았다.
피해 마을은 영주 성을 헐어 돌을 가져가자고 요구했다. 성 일부는 전쟁 창고였지만 나머지에는 사용인 가족과 기록이 있었다.
재산 심리는 무기 창고를 해체하고 거주 구역과 공공 기록실은 남겼다. 돌 일부는 하르엔 다리 수리에 쓰되 수량과 출처를 적었다.
로벨도 심리 대상에서 빠지지 않았다. 헌장군의 승인 없는 돌격과 구호 수레 탈취, 회색늑대 대원의 과잉 제압을 따로 확인했다.
엘리안은 승자 대표석이 아니라 로벨 이해관계자석에 앉아 질문을 받았다. 조정탁에서 늦게 내린 수송 결정과 공개 자료를 제출했다.
휴전 심리의 첫 달이 끝났을 때 일곱 영지 중 다섯이 기능별 헌장 복귀를 택했고 하나는 부분 참여, 하나는 재검토를 택했다.
어느 영지도 지도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영주 문장이 내려간 곳에도 마을 이름과 주민 명부, 창고 열쇠는 남았다.
패자의 아이들은 수도 학교에서 자기 출신을 숨기지 않아도 됐다. 승자의 아이가 전공을 물려받지 않는 것처럼, 패자의 아이도 전쟁 빚을 태어날 때부터 지지 않았다.
열흘 휴전은 한 달로 연장됐다. 자동 연장이 아니라 각 영지 주민 대표와 양군 병사 대표가 다시 표결했다.
하르엔 다리 북쪽에 첫 공동 장례지가 만들어졌다. 묘비는 군대별로 갈렸지만 물길과 방문로는 하나였다. 신원 미확인 이름에는 적군이라는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
엘리안은 패자의 영지를 없애지 않는 것이 자비라고 말하지 않았다. 영지는 영주의 소유물이 아니므로 승자가 베풀 권한도 없다는 결론이었다.
휴전 심리는 전쟁을 깨끗하게 끝내지 못했다. 배상과 재판, 재표결은 오래 걸렸다. 그러나 느린 과정 속에서 패배는 주민 전체의 소멸 명령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날 도르반 대표는 다음 재표결 날짜를 벽에 적었다. 아직 헌장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창을 들지 않는 사람도 평화문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다는 첫 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