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 서쪽의 빈 의자 일곱 개 앞에 탈퇴서가 놓였다. 붉은 밀랍마다 다른 문장이 찍혀 있었지만 문구는 놀랄 만큼 같았다. 왕실 계승이 복구될 때까지 공동 헌장과 수도 판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엘리안은 인장을 깨기 전에 도착 시각과 전달자부터 확인했다. 사절들이 수도를 떠난 뒤 온 문서도 있었고, 사절 손에 미리 들려 왔던 것과 글씨가 다른 문서도 있었다.
하르트의 후임 기록자 루엔은 일곱 밀랍의 온도 흔적을 비교했다. 셋은 각 영지에서 봉해졌지만 넷은 같은 화로와 같은 칼끝을 쓴 흔적이 있었다.
아델린은 네 문서가 한곳에서 작성됐다고 곧바로 위조라 부르지 않았다. 영주들이 공동 서무관을 썼을 수도 있었다. 누가 최종 문구를 읽고 승인했는지 답신을 보내기로 했다.
수도 민병대는 답신보다 군대를 먼저 보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미 다리와 창고를 잠갔으니 탈퇴는 반역 행위라는 주장이었다.
북방 변경 대표들은 성급한 진압이 일곱 영지 주민을 영주 뒤에 세울 수 있다고 반박했다. 전쟁 준비는 하되 누구와 싸우는지 나눠야 했다.
엘리안은 지도에서 영지 전체를 붉게 칠하지 않았다. 영주 성, 사병 집결지, 닫힌 창고, 봉인망 미응답 지점, 반대 청원이 온 마을을 서로 다른 표식으로 적었다.
첫 청원은 베도르 공작령의 제분 마을에서 왔다. 주민 백열세 명은 탈퇴 표결을 본 적이 없고 사병이 곡물 수레를 가져갔다고 썼다.
둘째 영지 칼세른에서는 귀족회의가 공개 표결로 탈퇴를 지지했다. 그러나 시장 주민은 사흘 안에 반대 명부를 내면 통행권을 잃는다는 공고가 있었다고 알렸다.
미레안 영지의 서신은 달랐다. 왕실 복귀는 요구했지만 봉인 협약과 피난민 배급은 유지하겠다고 했다. 하나의 문서 안에서도 끊으려는 기능과 남기려는 기능이 달랐다.
도르반에서는 영주가 병상에 있었고 사병 지휘관이 인장을 대신 눌렀다. 대리 권한 문서는 있었지만 전쟁과 헌장 탈퇴까지 포함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나머지 세 영지는 답신 길이 막혔다. 전령 한 명은 돌아왔고 둘은 억류됐다는 소문만 있었다. 엘리안은 연락이 없다는 사실을 동의로 계산하지 않았다.
의회는 일곱 영지에 확인단을 보내기로 했다. 수도 의원만 보내면 점령 조사처럼 보일 수 있어 상인, 농민, 지방 서기, 봉인 학교 관찰자, 피해자 대표가 섞였다.
확인단 임무는 탈퇴를 취소시키는 일이 아니었다. 표결이 있었는지, 누가 참여했는지, 반대가 처벌됐는지, 군량과 봉인 기능을 끊을 때 주민이 어떤 정보를 받았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왕정 지지 의원은 주민 의사를 묻는 동안 사병이 성벽까지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엘리안은 그래서 방어선을 세우되 영지 출신 피난민을 적으로 등록하지 않는 규칙을 함께 올렸다.
수도 성문에는 출신 영지를 묻는 칸이 생길 뻔했다. 아델린은 그것을 통행 제한이 아니라 가족 연락과 귀환 희망을 위한 선택 항목으로 바꿨다. 답하지 않아도 물과 잠자리를 받을 수 있었다.
첫날 밤 베도르 출신 수레꾼이 붙잡혔다. 수레 밑에서 탈퇴 인장 사본이 나왔기 때문이다. 민병대는 첩자라 불렀지만 그는 마을에 붙일 공고를 억지로 운반했다고 했다.
수레꾼의 짐에는 공고와 함께 영주 창고에서 몰래 베낀 재고표가 있었다. 밀 삼천 자루가 사병용으로 옮겨졌고 주민 배급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운영 심리관은 공고 운반과 재고표 반출을 따로 기록했다. 같은 사람이 명령에 협조하면서 동시에 주민에게 필요한 증거를 가져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일곱 영주의 공동 전령이 도착했다. 그는 모든 주민이 왕을 원하며 수도의 질문은 내정 간섭이라고 선언했다.
엘리안은 주민 이름과 표결 수를 물었다. 전령은 영주의 인장이 곧 주민의 뜻이라고 답했다. 그 문장이 회의장에 그대로 기록됐다.
“인장은 명령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엘리안이 말했다. “그러나 듣지 않은 사람의 생각까지 대신 찍을 수는 없습니다.”
전령은 로벨도 엘리안 한 사람의 영지 아니냐고 비웃었다. 엘리안은 로벨의 군량표, 주민 중단권, 공동 열쇠 명부를 내놓았다. 자기 영지도 질문 밖에 두지 않았다.
탈퇴 인장 일곱 개는 증거함에 한꺼번에 넣지 않았다. 각 영지의 청원, 답신, 봉인망 상태, 사병 명부와 짝을 이뤄 별도 칸에 놓였다.
세라는 군사 지도를 가져왔다. 가장 가까운 영지 사병이 강변 다리를 점거했고, 수도 쪽 곡물 수레 둘을 돌려보냈다. 아직 칼을 쓰지는 않았지만 활을 걸고 통행세를 요구했다.
의회는 다리 탈환 명령을 표결하려 했다. 엘리안은 민간 수레가 빠져나올 시각과 사병에게 명령을 거부할 통로가 없는 안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변경 대표들은 그의 신중함이 수도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불평했다. 수도 의원은 오히려 변경 영주 출신인 그가 귀족을 감싼다고 의심했다.
엘리안은 두 비난을 회의록에 남겼다. 왕관을 거부했다고 판단이 자동으로 공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 출신과 군사 이해도 공개했다.
방어안은 다리를 즉시 공격하지 않고 양쪽 강둑에 민간 통로를 먼저 표시하는 것으로 수정됐다. 사병이 공격하면 맞서되 다리 너머 마을을 적지로 봉쇄하지 않는다.
봉인 학교는 미응답 거점에 학생을 보내겠다고 했다. 루키안은 학생이 전투 정찰대로 쓰이지 않도록 치료·측정 임무와 귀환 시각을 명단에 적게 했다.
확인단 첫 보고는 칼세른에서 왔다. 공개 표결은 실제로 있었으나 반대 상인 열일곱 명이 사병에게 창고 열쇠를 빼앗겼다. 찬성도 존재했고 강요도 존재했다.
두 번째 보고는 정반대였다. 펠가의 산촌 셋은 주민 회의를 열어 탈퇴를 지지했고, 수도 군량 요구가 자신들에게 더 큰 부담이었다고 밝혔다. 다만 사병 징집은 별도 표결 없이 내려왔다.
엘리안은 탈퇴 찬성과 징집 반대를 한 문장으로 모순이라 부르지 않았다. 주민은 정치 질서를 선택하면서도 자기 가족을 전쟁에 보내는 조건을 따로 정할 수 있었다. 확인표에도 두 결정을 나눠 적었다.
의회 안에서는 그 복잡한 결과를 믿지 못하는 탄식이 나왔다. 선량한 주민과 악한 영주로 나누면 전쟁 지도가 쉬웠지만 실제 영지는 한 장의 색으로 칠해지지 않았다.
아델린은 탈퇴에 찬성한 주민도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왕을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물과 재판을 잃게 하면 헌장은 승자의 신앙이 된다고 말했다.
왕정 지지 주민 대표는 처음으로 확인단 참여를 신청했다. 그는 탈퇴에는 찬성하지만 사병 징집과 배급 중단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날 오후 일곱 영지 중 하나가 공동 봉인망 신호를 다시 켰다. 탈퇴를 철회한 것이 아니라 지하수 과열을 막기 위해 연결한 것이었다. 수도는 그것을 충성 복귀로 선전하지 않았다.
대신 신호표에 `정치 협정 중단, 생명 보호 기능 유지`라고 적었다. 관계가 끊어져도 함께 지켜야 할 기능은 남을 수 있었다.
해 질 무렵 의회 창가에 일곱 인장이 놓였다. 붉은 밀랍은 단단했지만 그 아래 주민 의사는 서로 달랐고 아직 듣지 못한 목소리도 많았다.
엘리안은 일곱 영지를 반역 영토로 선포하는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확인된 사병 공격과 군량 압수를 방어하되, 출신과 침묵을 죄로 만들지 않는 명령에만 자기 표를 보탰다.
밤 강변에서 첫 화살이 날아왔다. 내전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러나 첫 기록에는 일곱 적이 아니라, 일곱 인장과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