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장은 카르몬 무기고의 오래된 갑옷 안감에서 나왔다. 은빛 늑대 머리 아래 왕실 백합이 새겨진 군사고문 표식이었다. 뒤쪽에는 세라 헬몬의 이름과 선왕 말년의 임명 날짜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무기고 병사는 회색늑대 대장이 왕실 군사고문이었다는 사실을 숨겼다며 휘장을 광장에 걸었다. 북방 병사들은 용병이 아니라 왕실이 보낸 감시자였느냐고 수군거렸다.
마렉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회색늑대 대원 몇은 세라가 예전에 왕실 일을 했다는 정도만 알았지, 지휘 문장을 받은 정식 고문이었다는 것은 몰랐다. 레온과 헤릭의 죽음까지 거짓 계약 위에 쌓인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세라는 휘장을 빼앗지 않았다. 광장 기둥에서 풀어 자기 손에 들었다. 오래전 직접 뜯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북방 철수 때 남긴 갑옷에 한 벌이 더 있었던 것이다.
바르논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했다. 왕실 군사고문 자격이라면 북방 혼성군 지휘를 맡을 법적 근거가 생긴다. 단독 명령을 요구하던 장교들도 세라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옛 직함으로 오늘 명령하라는 뜻이군.” 세라가 물었다.
“병사들은 아는 계급이 필요하오. 헌장 조항보다 저 휘장을 더 빨리 이해할 거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서쪽 능선 너머 적 기병이 늘고 있었고, 부대마다 신호와 후퇴 규칙이 달랐다. 세라가 휘장을 달면 몇 시간 안에 지휘선이 하나로 모일 수 있었다.
마렉은 대원들을 모아 설명을 요구했다. 세라는 사람 없는 지휘실이 아니라 광장에서 말하겠다고 했다. 북방 병사와 피난민, 카르몬 서기가 함께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녀는 선왕 말년 왕실 군사고문으로 세 차례 북방 작전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첫 두 번은 수송로를 지켰고, 마지막에는 얼음 협곡 전초대를 철수시키라는 의견을 냈다가 상관의 공격 명령을 따랐다.
“명령서에는 내 반대 의견이 남아 있다.” 세라가 말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결국 내가 진군 신호를 올렸다. 반대했다고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 전투에서 후위대 스물한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세라는 숫자만 말하지 않고 확인된 이름과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을 구분해 읽었다. 회색늑대를 만들게 된 처음의 부채도 그날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대원 하나가 물었다.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지?”
“왕실 경력으로 너희 충성을 사는 것도, 실패한 명령으로 용서를 요구하는 것도 싫었다.”
“그건 네가 정한 이유야.” 마렉이 말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지까지 네가 정했어.”
세라는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의 침묵도 단독 판단이었다. 카이런과 다른 목적이었다고 해서 구조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안은 세라를 감싸는 연설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문 시절 작전 기록을 카르몬 기록소와 회색늑대 정착소에 나눠 보내자고 했다. 세라의 설명과 다른 증언이 나오면 같은 장부에 붙일 수 있게 했다.
옛 부관 한 명이 성 안에 살아 있었다. 그는 세라가 철수를 주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지막 날 부상자 수레보다 왕실 문서 상자를 먼저 빼라는 명령을 즉시 거부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세라는 그 부분까지 인정했다.
바르논은 과거 책임 심리와 현재 전투 지휘는 별개라고 재촉했다. 세라가 휘장을 달고 우선 명령한 뒤 나중에 토론하자고 했다. 적 정찰대가 보급로를 살피는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세라는 휘장을 갑옷에 달지 않았다. 공동 작전판 위에 올려놓고, 자신이 낸 현재 계획을 다른 지휘관들과 같은 칸에 붙였다. 북쪽 능선 방어, 피난로 우선, 후퇴 신호 세 번, 전사자·부상자 수습조 분리.
회색늑대 대원들은 별도로 표결했다. 세라를 평생 대장으로 다시 추인하는 표가 아니었다. 사흘 동안 능선 호송 작전을 맡길지, 중단을 요구할 부대 대표를 누구로 둘지 정했다.
마렉은 찬성하면서 조건을 붙였다. 왕실 휘장이나 과거 공로로 명령하지 않고, 정해진 피난로를 바꾸려면 현장 수레 담당자의 확인을 받는다. 부상자 수습을 늦추는 명령은 누구든 거부할 수 있다.
두 대원은 기권했고 한 명은 반대했다. 세라는 반대표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반대한 대원은 정착소 경비로 돌아갈 권리를 선택했고 급료를 잃지 않았다.
카르몬 병사들도 세라의 계획을 검토했다. 그들은 용병 지휘를 받는 데 반발했지만, 바르논이 직접 지휘할 성벽 구역과 세라가 맡을 호송 구역을 나누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첫 출동에서 세라는 왕실 신호기가 아니라 회색과 흰색 두 천을 들었다. 회색은 능선 방어, 흰색은 피난로 중단이었다. 왕실 군사고문 휘장은 기록관이 봉인 상자에 넣었다.
적 정찰대가 나타났을 때 젊은 카르몬 기병이 추격을 요구했다. 예전의 세라라면 전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허락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수레 마지막 줄이 협곡을 벗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정찰대는 멀어졌고 승전 보고에 적을 쓰러뜨린 숫자는 없었다. 대신 피난민 수레 마흔둘 대가 정해진 시간에 도착했다. 후미에서 다친 말 한 필과 병사 한 명도 버리지 않았다.
밤 회의에서 바르논은 작전 성공을 세라의 옛 경험 덕분이라고 기록하려 했다. 세라는 `현장 계획 승인자 여섯, 중단권 담당 둘`로 고쳐 썼다. 자기 경험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수레가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보고가 끝나자 광장 한쪽에서 백발의 남자가 세라를 불렀다. 그는 과거 얼음 협곡 전초대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의 형이었다. 왕실 기록에는 동생이 명령 불복종 뒤 실종됐다고 적혀 있었지만, 세라가 읽은 명단에는 철수 지연 중 전사로 남아 있었다.
세라는 자신이 가진 옛 사본을 보여 줬다. 전사 위치와 마지막 신호는 적혀 있었지만 시신을 확인했다는 표시는 없었다. 남자는 어느 기록이 맞느냐고 물었다.
“제가 아는 데까지는 후퇴선을 지키다 연락이 끊겼습니다. 시신은 찾지 못했습니다. 전사라고 단정한 것도 제 잘못입니다.”
남자는 영웅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실종과 추정 전사, 왕실의 불복종 기록을 나란히 남기고 수색이 끝난 이유를 밝혀 달라고 했다. 세라는 현재 북방 기록위원회에 그 요청을 제출했다.
회색늑대 대원들은 세라가 과거 이름을 직접 정정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시절 지휘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 기록관과 유족 대표가 검토하고 세라는 자료 제출자와 증언자로만 참여하기로 했다.
그날 밤 세라는 마렉에게 휘장을 숨긴 이유를 다시 말했다. 부끄러움이 가장 컸다고 인정했다. 마렉은 이유를 이해하는 것과 결정에 동의하는 것은 다르다고 답했다. 둘은 화해를 선언하지 않고 다음 작전 회의에 나란히 앉았다.
마렉은 봉인 상자 앞에서 물었다. “휘장을 없앨 건가?”
“아니. 내가 왕실과 무관했던 것처럼 만들지는 않겠다.” 세라가 말했다. “다만 다시 입지는 않을 거야. 내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 확인할 때만 열어 본다.”
휘장 상자의 열쇠는 회색늑대 대원 대표와 카르몬 기록관이 나눠 가졌다. 세라는 아무 열쇠도 갖지 않았다. 과거 직함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현재 지휘권의 근거에서도 내려왔다.
다음 날 병사들은 세라를 고문 각하가 아니라 정해진 사흘의 호송 지휘자라고 불렀다. 이름이 길고 불편했다. 세라는 그 호칭을 고치지 않았다. 불편한 이름이야말로 자신이 다시 한 문장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계산하지 못하게 하는 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