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몬 요새의 성문은 아군 깃발을 보고도 열리지 않았다. 새벽 안개 속에서 로벨 군량 수레와 피난민 수레가 한 줄로 섰고, 문장 없는 빈 깃발만 성벽 위 바람을 받았다. 망루의 궁수들은 화살을 내리지 않았다.
성벽 아래에는 전날 밤부터 도착한 피난민이 웅크리고 있었다. 요새 안 막사는 비어 있지 않았지만 사령부는 출신과 감염 여부, 배급 수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바깥 대기 명령을 내렸다. 아이들은 수레 밑에서 얼어붙은 흙을 긁었다.
바르논 사령관의 목소리가 나팔관을 통해 내려왔다. “정통 왕실 인장이나 계승 후보의 단독 명령서를 올려라. 누가 이 병력과 곡식을 책임지는지 분명하지 않으면 문을 열 수 없다.”
엘리안은 혈통 확인서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공동 전시권한 사본을 펼쳤다. 작전, 군량, 피난, 봉인 대응을 서로 다른 담당자가 맡고 서른 날 뒤 자동으로 끝난다는 문서였다.
“사령관은 전투를 지휘하십시오. 그러나 피난민을 들일지와 곡식을 어디에 둘지는 현장 대표들과 함께 정해야 합니다.”
망루에서 웃음이 터졌다. 적이 강 건너까지 왔는데 책임을 나누자는 말이 책임을 피하는 것으로 들린 것이다. 바르논은 여러 사람이 서명한 종이는 전장에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종이라고 잘라 말했다.
세라는 성벽의 투석기 방향을 살폈다. 회색늑대가 동쪽 비탈을 오르면 작은 문 하나는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아군 요새를 공격해 문을 열면 헌장이 도착한 첫날부터 칼이 규칙을 대신하게 된다.
“억지로 들어가면 해 질 때까지는 요새를 가질 수 있어.” 세라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는 안에서 우리 등을 겨눌 병사도 함께 갖게 되겠지.”
엘리안은 수레를 성벽 사거리 밖으로 물리지 않았다. 대신 첫 군량 수레를 요새문 앞 지정선까지 보내고 덮개를 열게 했다. 마센이 보리 포대 수와 출발 시각, 동행 기록자 이름을 큰 소리로 읽었다.
바르논은 곡식은 받되 피난민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요새 안 물과 땔감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엘리안은 그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안쪽 창고와 우물의 실제 수량을 성벽 밖 수량판에 적어 달라고 요구했다.
“군사 기밀이다.”
“그 기밀 때문에 사람을 밖에 둘 거라면, 적어도 물이 며칠 남았는지는 밖에 있는 사람도 알아야 합니다.”
대치가 길어지자 피난민 줄에서 고함이 나왔다. 안에 친척이 있는 사람은 이름을 불렀고, 요새 병사 가족은 성벽 위에서 답했다. 명령으로 나뉜 두 무리가 목소리로는 이미 서로를 알아보고 있었다.
하르트는 성문 앞 눈밭에 탁자를 놓았다. 왕실 문서가 아니라 세 장의 빈 인계표를 펼쳤다. 첫 장은 요새 작전, 둘째는 군량 창고, 셋째는 피난민 수용과 이동이었다.
요새 부사령관이 작은 문으로 나왔다. 그는 단독 왕명이 없으면 전투 중 잘못된 선택을 누가 재판받을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카이런의 판결 뒤 장교들은 명령을 따르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다.
엘리안은 면책을 약속하지 않았다. “사령관의 작전 판단은 사령관 이름으로 남습니다. 제가 대신 잘했다고 만들지도, 실패를 혼자 떠넘기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군량과 피난 판단까지 한 사람에게 묶지 않겠습니다.”
부사령관은 요새 우물 두 곳 중 하나가 얼었고 땔감은 엿새분이라고 털어놓았다. 군량은 열흘분이었지만 귀족 기병대 몫과 보병 몫이 따로 봉인돼 합쳐 쓰지 못했다. 부족한 것은 곡식 총량보다 나뉜 열쇠와 닫힌 명부였다.
아델린은 요새 안 도시 대표를 불러 달라고 요구했다. 왕실 표 하나를 들고 왔지만 그 표로 문을 열겠다고 하지 않았다. 카르몬 상인회와 우물 관리인, 치료관이 성벽 안에서 자기 수량을 확인해 인계표에 올리도록 했다.
해가 오를 무렵 적 정찰기병 여섯이 서쪽 능선에 나타났다. 망루 종이 울렸고 바르논은 모든 외부 수레를 후퇴시키라고 명령했다. 피난민 수레가 좁은 길에서 돌기 시작하며 서로 부딪쳤다.
세라는 작전권한으로 회색늑대를 능선 아래에 배치했다. 그러나 수레 이동을 멈추라는 권한은 피난 담당 치료관과 주민 대표에게 있었다. 그들은 길을 한꺼번에 비우면 아이와 부상자가 눈밭에 남는다고 판단해 앞줄부터 순서대로 움직이게 했다.
바르논은 느리다고 소리쳤지만 세라는 수레를 몰아내지 않았다. 대신 빈 썰매 둘에 로벨기를 달아 서쪽 길로 보냈다. 적 정찰대가 그것을 좇는 동안 실제 수레는 성벽 사각을 따라 이동했다.
첫 공격은 화살 열두 발로 끝났다. 한 수레 덮개가 찢어졌지만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요새 궁수는 세라의 신호를 받아 쏘았고, 회색늑대는 성벽 지휘를 빼앗지 않은 채 정찰대를 물렸다.
피난 수레가 멈춘 자리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드러났다. 성 안으로 들어가도 잘 곳이 정해지지 않았고, 바깥 숙영지의 화로와 변소 위치도 뒤섞여 있었다. 문만 여는 것을 구조 완료로 적을 수 없었다.
카르몬 치료관은 전염을 두려워 모든 피난민을 사흘 격리하자고 했다. 로벨 쪽 치료관은 증상 없는 사람까지 추위 속에 묶으면 오히려 병이 늘어난다고 반박했다. 둘은 검진이 필요한 사람, 추위에 취약한 사람, 일반 이동자를 구역별로 나눴다.
피난민 대표는 성 안 빈 마구간을 먼저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바르논은 군사 시설 공개를 꺼렸지만, 사람을 들일 공간의 바닥과 난방 상태만 공동 확인하게 했다. 무기 배치와 주민 생활 공간을 같은 비밀로 묶지 않았다.
성문 병사들도 발언권을 요청했다. 매번 다른 인장을 보고 판단하다 잘못 열면 자기들만 처벌받는다는 두려움이었다. 인계표에는 문서 확인자와 교대 암호, 이상할 때 문을 닫고 질문할 권한이 새로 적혔다.
바르논은 방금 일어난 일을 성벽 위에서 보았다. 단일 명령이 아니어도 작전과 피난이 충돌한 뒤 조정될 수 있었다. 더 느렸지만 피난민을 미끼로 삼지 않았다.
정오에 작은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간 것은 엘리안이나 병력이 아니라 카르몬 우물 관리인과 로벨 군량 동행자였다. 그들은 안쪽 수량을 세고 밖의 판과 맞췄다.
군량 창고는 카르몬 상인 대표와 마센, 요새 보급관이 각기 다른 열쇠를 맡았다. 귀족 기병대 몫은 전투일 기준으로 다시 계산하고, 피난민 배급과 섞은 수량은 매일 해 질 때 공개하기로 했다.
피난민은 한꺼번에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 요새에 가족이 있는 사람, 남쪽 거점으로 계속 갈 사람을 나눴다. 들어간 사람과 떠난 사람의 이름을 같은 명부에서 지우지 않고 다음 확인 장소를 적었다.
마지막으로 바르논이 성문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엘리안의 인장 자리를 가리켰다. “조정자라면 적어도 여기에는 당신 혼자 서명해야 하지 않소?”
엘리안은 자기 이름을 작전 명령자 칸이 아니라 `권한 충돌 공개 조정` 칸에 썼다. 옆에는 종료일과 교대자 이름이 있었다. “제가 쓰러져도 이 문이 다시 닫히지 않게 하려는 서명입니다.”
바르논은 끝내 헌장 전체에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카르몬 현장 인계안에는 사령관 자격으로 서명했다. 왕을 대신한다는 문구는 긋고, 자기가 책임질 성벽 구역과 보고 시각을 적었다.
오후 늦게 큰 성문이 절반만 열렸다. 군량 수레 한 대와 피난민 수레 한 대가 번갈아 들어갔다. 병력 행렬이 먼저 승리하듯 통과하지 않았다.
빈 깃발이 문지방을 넘을 때 성벽 병사 하나가 경례했다. 어떤 왕에게 한 경례인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카르몬을 연 것은 왕실 단독 인장이 아니라, 누가 싸우고 누가 먹이고 누가 사람을 멈춰 세울 수 있는지 적힌 세 장의 인계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