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봉인탑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능선을 곧장 오르면 한 시간 안에 카이런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계곡을 돌아가면 북동쪽 세 마을을 거쳐야 했고 반나절이 걸렸다. 카이런은 두 길 사이의 오래된 수문을 열어 놓았다.
눈 녹은 물이 아직 불지 않은 계절이었지만, 봉인탑 아래 저수지에는 마도 열기가 차 있었다. 수문이 완전히 열리면 뜨거운 흙탕물이 계곡 마을을 덮는다. 능선에서 붉은 신호가 두 번 올라오자 수문 쇠사슬이 한 칸씩 풀리기 시작했다.
카이런의 전령이 흰 깃발을 들고 내려왔다. 그가 내민 상자 안에는 에르반 왕실의 철제 관이 들어 있었다. 보석은 거의 없고 안쪽에 오래된 피 자국만 남은 전시용 왕관이었다.
"미레아 리온의 아들로서 왕관을 쓰고 왕실 병력을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공작님이 수문을 닫고 봉인탑을 넘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거절하면 세 마을의 피해는 엘리안 로벨의 선택이 됩니다."
세라가 전령을 노려봤다. "사람을 물에 세워 놓고 선택이라 부르는군."
엘리안은 왕관을 손에 들지 않았다. 관 안쪽의 마른 피를 잠깐 본 뒤 뚜껑을 닫았다. 지금 쓰면 왕실 병력 일부는 명령을 따를 수 있었다. 동시에 공개 심리도 적통 검증도 끝나기 전에 카이런이 만든 전장에서 왕이 되는 셈이었다.
"마을로 갑니다."
능선 추격을 준비하던 기사들이 술렁였다. 카이런을 놓치면 귀족 연합이 다시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엘리안은 그 가능성을 인정했다. "잡을 기회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수문 아래 사람들을 미끼로 둔 채 대관하지 않습니다."
세라는 병력을 네 무리로 나눴다. 회색늑대가 첫 번째 마을의 대피를 맡고, 로벨 경비대가 두 번째 마을의 가축과 곡물 수레를 빼냈다. 왕실 병사 중 무기를 내려놓은 자들은 세 번째 마을의 다리를 보강했다. 어느 깃발 아래 있었는지가 아니라 지금 맡은 구역을 기준으로 지휘표를 다시 썼다.
하르트는 마을별 가구 명부를 펼쳐 빈집까지 확인했다. 아델린은 왕실 전령의 말에 기대지 않고 직접 봉인탑 수문 도면을 기억에서 그렸다. 선왕이 그녀를 데리고 시찰했던 어린 시절, 네 개의 보조 쇠사슬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주수문을 닫지 못해도 보조 쇠사슬을 반대로 걸면 흐름을 네 갈래로 나눌 수 있어요."
루키안은 천으로 감싼 왼손을 가슴에 붙이고 도면을 봤다. "봉인도 같습니다. 탑의 중심핵 하나를 뺏으려 하지 말고, 계곡의 오래된 표지석을 깨워 압력을 나누면 됩니다. 문제는 열두 개를 같은 순간에 열어야 한다는 거고요."
"열두 명에게 가르치십시오."
"어제 일곱 명도 겨우 맞췄습니다."
"오늘은 일곱 명이 다른 다섯 명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루키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웃었다. "이래서 독점하는 사람들이 교육을 싫어하는군요. 하루 만에 제 쓸모가 절반이 됐습니다."
마센과 마렉, 아델린을 포함한 어제의 일곱 사람이 새 담당자를 하나씩 붙잡고 문양을 그렸다. 글을 모르는 대원에게는 획마다 돌멩이 수를 붙였다. 중단 신호는 붉은 깃발 하나, 재개 신호는 흰 깃발 둘로 통일했다.
첫 마을의 마지막 수레가 다리를 건널 때 베도르 궁수들이 능선에서 내려왔다. 세라는 방패벽을 세우되 추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화살이 방패에 박히는 동안 회색늑대 대원들은 쓰러진 적병 하나까지 벽 안으로 끌어당겼다. 포로에게도 수문 아래 죽을 이유는 없었다.
카이런은 봉인탑 난간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저들을 모두 살리다가는 누구도 잡지 못한다!" 그의 목소리가 계곡에 울렸다.
엘리안은 대답 대신 세 번째 수레의 바퀴를 직접 밀었다. 진흙에 빠진 바퀴가 올라오자 주민들이 다리를 건넜다. 마지막에는 지붕 위에 숨었던 노인 하나가 발견됐다. 하르트의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덕분이었다.
대피 완료 깃발이 오르자 루키안이 오른손을 들었다. 열두 표지석에서 푸른 빛이 차례로 솟았다. 처음 셋은 박자가 맞지 않아 계곡 바닥이 흔들렸다. 어제 문양을 익힌 마센이 옆 사람의 손을 잡아 획 방향을 고쳤다. 두 번째 신호에서는 열두 빛이 하나의 원이 아니라 넓은 그물처럼 연결됐다.
주민 대피가 끝났다는 확인 없이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공동지휘 원칙이 모든 깃발 신호의 앞에 놓였다. 루키안은 이 방식에 분산봉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중심의 강한 한 점 대신 열두 사람의 약한 빛이 서로의 실패를 받아 주는 구조였다.
수문으로 몰리던 마도 열기가 네 갈래 수로와 표지석 아래로 흩어졌다. 뜨거운 물은 무릎 높이의 증기로 바뀌었고, 계곡의 돌이 하얗게 김을 뿜었다. 루키안의 봉인흔은 어깨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혼자 중심핵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라는 대피가 끝난 것을 확인한 뒤에야 공격 신호를 냈다. 회색늑대와 로벨 경비대, 무기를 내려놓은 왕실 병사가 같은 줄로 능선을 올랐다. 지휘권은 세라에게 있었지만 각 부대 대표가 후퇴와 정지 신호를 함께 확인했다.
봉인탑 아래 전투는 짧고 거칠었다. 베도르 병사 다수는 수문이 무력화되자 창을 버렸다. 카이런의 친위대만 탑 계단을 막았다. 마렉이 옆 절벽의 정비 사다리를 찾아 세라에게 길을 열었고, 세라는 난간 위로 올라가 친위대장의 검을 방패 틈에 걸어 꺾었다.
카이런은 왕관 상자를 들고 탑 정상으로 물러났다. "당신이 쓰지 않으면 누군가는 쓴다. 빈 왕좌는 가장 잔혹한 자를 부르는 법이야."
엘리안은 검을 뽑지 않은 채 계단을 올랐다. "그래서 왕좌를 비워 두는 데서 끝내지 않을 겁니다. 누구도 혼자 수문과 군량과 봉인을 쥐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카이런이 상자를 난간 밖으로 던지려 했다. 세라의 칼집이 그의 손목을 쳤고 왕관은 돌바닥을 굴렀다. 엘리안은 왕관을 잡으러 가지 않았다. 카이런이 숨겨 둔 두 번째 봉인지가 타오르는 것을 보고 발로 덮었다. 카이런은 그 짧은 틈에 칼을 뽑았지만 마렉과 왕실 병사 둘이 함께 팔을 눌렀다.
세라는 칼끝을 카이런의 목에 대지 않았다. 손목에 쇠고리를 채우고 공개회의가 발부한 체포장을 읽었다. 북부 봉인 파괴, 증거 인멸, 주민을 인질로 삼은 수문 개방, 왕실 명령서 위조 혐의. 카이런은 살아서 모든 항목을 들었다.
전투가 끝난 뒤 부상자는 양쪽을 합쳐 스물하나였다. 회색늑대 대원 한 명과 베도르 병사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라는 두 사람의 이름을 같은 전사자 수습 장부에 적었다. 적으로 만났다는 사실이 시신을 버릴 이유는 아니었다.
왕관은 탑 바닥에 찌그러진 채 남아 있었다. 아델린이 그것을 천으로 감싸 공동 증거 수레에 실었다. 왕실 전령, 변경 도시 대표, 회색늑대 대원이 자물쇠 세 개를 나눠 가졌다.
해가 질 때 세 마을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물에 잠긴 밭은 있었지만 집은 남았다. 열두 표지석의 빛도 낮게 이어졌다. 루키안 없이도 담당자들이 교대 순서를 맞췄다.
엘리안은 가장 늦게 봉인탑을 내려왔다. 왕좌를 차지할 가장 빠른 길을 버렸고, 그 때문에 두 사람을 잃었다. 선택이 옳다는 말로 죽음을 가볍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전사자 이름을 직접 읽고 유족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카이런이 제시한 두 길 밖에 세 번째 길이 있었다. 왕관을 쓰거나 마을을 버리는 대신, 사람을 먼저 빼내고 지식과 지휘를 나누어 싸우는 길. 그 길은 늦고 복잡했지만 누구도 혼자 왕국의 목을 조를 수 없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