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트 렌발이 열쇠를 꺼낸 곳은 허리춤도, 목에 건 주머니도 아니었다. 그는 로벨가 예배실의 낡은 촛대 밑을 돌려 속에서 녹슨 열쇠 하나를 꺼냈다. 엘리안은 어린 시절부터 그 촛대 앞에서 수없이 무릎을 꿇었지만 밑판에 이음새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언제부터 숨겨 두셨습니까."
"주군께서 돌아가시기 전날부터입니다."
하르트의 대답은 평소처럼 짧았다. 다만 열쇠를 쥔 손이 떨렸다. 전직 기사였던 그의 손이 칼 앞에서도 떨리지 않았다는 것을 엘리안은 알고 있었다.
예배실 북쪽 벽에는 로벨가 선대 영주들의 이름을 새긴 석판이 있었다. 하르트가 가장 아래 무명 석판의 홈에 열쇠를 넣자 돌판이 손바닥 너비만큼 밀려났다. 안쪽에는 기름 먹인 천으로 세 번 감싼 문서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밀랍은 로벨가 문장이 아니라 왕실의 갈라진 해 문양이었다.
세라와 루키안, 아델린은 문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엘리안은 누구도 내보내지 않았다. 어머니에 관한 기록이라 해도, 그것이 왕국의 권력을 바꾼다면 가족만의 비밀일 수 없었다.
첫 문서는 출생 증명서였다. 엘리안의 어머니 이름은 미레아 리온. 궁정 기록에서 그녀는 지방 기사 집안의 시녀로 정리돼 있었지만, 이 문서에는 선왕의 이복누이이자 왕실 방계의 적법한 구성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왕실 서기관과 두 귀족, 당시 마도회 기록관의 인장이 남아 있었다.
아델린이 미레아 리온이라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그녀의 얼굴에서 예법으로 다듬은 표정이 잠깐 벗겨졌다.
"궁에서는 미레아 님이 병으로 죽은 뒤 기록을 닫았다고만 들었습니다. 자녀가 있다는 말은 없었어요."
두 번째 문서는 적통 심사 보고서였다. 미레아가 왕실 방계로 인정될 경우, 그녀의 자녀는 왕위 공석 때 심사 대상이 된다는 원래 문장이 가느다란 칼로 긁혀 있었다. 그 위에는 '모계 신분 불명'이라는 문구가 다른 잉크로 덧씌워졌다. 잉크 가장자리에는 베도르가 서무관이 쓰던 청동 가루가 박혀 있었다.
루키안이 종이를 빛에 비춰 봤다. 긁힌 아래쪽에서 원래 획이 희미하게 살아났다.
"봉인만 위조한 게 아니었군요. 사람의 태어난 자리도 다시 썼습니다."
하르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엘리안의 아버지는 조작을 알아낸 뒤 문서를 가져왔으나, 미레아와 어린 엘리안까지 계승 싸움에 끌려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문서를 감추고 군량과 세금으로 영지를 버티려 했다. 그 침묵을 카이런은 빚과 횡령으로 되받아쳤다.
"아버지가 옳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엘리안의 질문에 하르트는 오래 침묵했다. 촛농이 심지 아래로 한 방울 흘렀다.
"그때는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숨긴 진실이 도련님을 살렸는지, 더 오래 혼자 싸우게 했는지."
"왜 이제 여셨습니까."
"오스렌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자가 적통 심사 때 왕실 기록관 보조로 들어온 출입 명단에도 있습니다. 봉인 위조와 혈통 조작이 같은 기술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더 늦추면 제가 지키는 것은 도련님이 아니라 제 비겁함이 됩니다."
세 번째 문서는 반쪽뿐이었다. 위아래가 불에 그슬렸고 마지막 문장은 중간에서 끊겼다. 선왕의 유언 일부였다. 왕실 직인 옆에 당시 변경 도시 대표 네 명의 손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꾸러미 맨 아래에는 공문이 아닌 짧은 편지도 한 장 있었다. 미레아가 어린 엘리안 로벨에게 남긴 글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피를 증명해야 할 날이 오더라도, 그 피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지 말라는 문장이 있었다. 하르트는 그 편지만큼은 여러 번 펼쳐 본 흔적이 있었다. 모서리가 닳고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얼룩이 남아 있었다.
엘리안은 편지를 한 번 읽고 아델린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같은 왕실 피 때문에 지워졌지만, 그 상처가 어느 한쪽에게 왕좌를 양보하라는 빚은 아니었다. 아델린도 편지를 읽은 뒤 말없이 루키안에게 넘겼다. 비밀이 가족의 위안으로만 남지 않고 함께 검증할 기록이 되는 순간이었다.
편지는 혈통 증명의 부속물이 아니라, 권력을 얻은 뒤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경계문이 됐다.
아델린이 기억하는 문장을 먼저 읽었다. "용의 봉인이 왕좌의 명령으로 흔들릴 때, 왕국의 생존권은 왕실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는다." 하르트가 가진 반쪽에는 그 뒤가 남아 있었다. "변경의 수호자와 도시의 대표, 봉인 지식을 맡은 자가 서로의 열쇠를 나누어 가진다."
예배실 안에 누구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선왕이 왕관을 버리라는 유언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왕이 나라의 생존 장치까지 혼자 움켜쥐지 못하도록 초안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 초안은 공개되지 않았고, 적통 심사는 조작됐으며, 봉인 열쇠는 마도회와 귀족 연합의 손에 남았다.
세라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문서를 수도에 들고 가면 당신을 왕으로 세우자는 자들이 하루 안에 생길 거야."
"하루까지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아델린이 말했다. 그녀는 문서에서 손을 뗐다. "저를 밀던 사람들 중 절반은 엘리안 쪽으로 옮겨 갈 거예요. 더 깨끗한 혈통을 찾았다고 말하면서. 어제까지 저를 정통성 없는 아이로 부르던 입으로요."
엘리안은 적통 심사 보고서를 접지 않았다. 접힌 자국 하나도 나중에는 조작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하르트에게 넓은 판과 투명한 봉인천을 가져오게 했다. 문서 세 장을 판 위에 펼치고, 각자 본 순서와 시간을 적었다.
"왕위를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적어도 이 문서만으로는."
하르트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엘리안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혈통이 사실이라면 공개된 자리에서 검증받아야 합니다. 조작된 적통 심사도 원본과 증언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비밀 문서가 나를 왕으로 만들 수 있다면, 다른 비밀 문서가 내일 나를 끌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루키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왕관이 눈앞에 와도 장부부터 펼치는군요. 참 로벨답습니다."
"장부가 비어 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이미 봤으니까요."
엘리안은 선왕의 유언을 네 부로 베끼게 했다. 원본 필사에는 하르트와 아델린이 함께 참여했고, 루키안은 봉인 잉크를 검사했으며, 세라는 문밖 입회자를 불렀다. 미레아의 출생 증명은 왕실 서무처, 변경 도시 연합, 중립 사원에 각각 확인을 요청하기로 했다.
해가 질 무렵 예배실 문이 활짝 열렸다. 평생 닫힌 공간처럼 냄새 나던 방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하르트는 빈 벽감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안이 그의 옆에 섰다. "숨긴 죄를 혼자 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선택도, 당신의 침묵도 기록에 함께 남깁니다."
"가문의 수치가 될 수 있습니다."
"수치를 감춘 품위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르트 렌발은 마침내 열쇠를 엘리안에게 내밀었다. 엘리안은 받지 않고 예배실 입구의 공개 문서함에 넣게 했다. 문서함에는 두 개의 자물쇠를 달았다. 하나는 하르트가, 다른 하나는 성 주민 대표가 맡게 했다.
미레아 리온의 이름은 그날 처음으로 로벨가 석판 아래 임시 명패에 적혔다. 왕의 누이도, 계승 후보의 어머니도 아닌, 기록에서 지워졌다가 돌아온 한 사람의 이름으로. 엘리안은 그 앞에 왕관을 상상하지 않았다. 대신 누구도 다시 이름을 긁어내지 못하게 할 공개 심리의 자리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