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을 내리던 비는 기상 나팔이 울리기 전에 멎었다. 성벽 홈통에서는 아직 물이 떨어졌고, 안마당 흙은 장화가 발목까지 빠질 만큼 무르렀다. 세라 헬몬은 그 진창 한가운데에 빈 문서함을 내려놓았다. 철제 모서리가 흙에 박히며 둔한 소리를 냈다.
"동쪽 기록고로 옮길 물건이야. 정오 전에 끝낸다."
그녀는 일부러 문지기 셋과 창고 인부 둘이 듣는 자리에서 말했다. 문서함 안에는 젖은 장작 조각과 깨진 기왓장뿐이었다. 진짜 궁 출입 기록 사본은 루키안의 외투 안감에도, 그의 숙소 서랍에도 없었다. 밤사이 하르트가 쓰지 않는 우물 도르래 축 안에 말아 넣어 두었다.
엘리안은 회랑 그늘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세라가 고개를 아주 조금 돌렸다.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동쪽 기록고로 가는 길은 세 갈래였고, 세라는 그중 담장이 낮은 길만 비워 두었다. 누군가 거짓 정보를 밖으로 넘긴다면 가장 먼저 고를 길이었다.
루아는 이미 성 안에 없었다. 새벽에 채소 수레 바닥을 이중으로 깔고 북문 밖 제분소 지하실로 옮겼다. 마센과 회색늑대 대원 둘이 지키고 있었다. 루아는 떠나기 전에 자기 숙소 문고리에 붉은 실 한 올을 묶었다. 누가 문을 열면 실이 끊어지도록 만든 서툰 장치였다.
해가 성벽 위로 반 뼘쯤 올라왔을 때 실이 끊어졌다. 드론이 루아의 숙소에서 나왔다. 그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고 걸음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서쪽 창고 앞에서 물동이를 들던 인부에게 한마디를 건넨 뒤, 예정에 없던 마구간 뒤편으로 꺾었다.
세라는 드론을 바로 붙잡지 않았다. 인부가 물동이를 내려놓고 화장실 쪽으로 가는 척하다가 낮은 담장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진창 속에 엎드려 있던 회색늑대 대원들이 일어났다. 한 명은 담장 안쪽을, 다른 한 명은 밖의 좁은 배수로를 막았다.
담장 너머에서는 베도르 사병 장화를 신은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인부에게서 종이쪽지를 받는 순간 세라가 흙벽을 딛고 넘어갔다. 사내가 칼을 뽑았지만 칼날은 절반도 나오지 못했다. 세라의 팔꿈치가 손목을 꺾고, 뒤따른 대원의 방패가 무릎을 쳤다. 사내는 진창에 얼굴부터 처박혔다.
"빈 상자 하나 옮기는 데 사람이 셋이나 움직였군."
세라가 사내의 허리띠에서 작은 밀랍통을 떼어 냈다. 회색 밀랍 아래에는 세 줄이 교차한 봉인 문양이 눌려 있었다. 루키안이 장부에서 그려 온 위조 인장과 같았다. 밀랍통 뚜껑 안쪽에는 베도르가 수송대가 쓰는 숫자 부호가 긁혀 있었다.
드론은 마구간 문 앞에서 붙잡혔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도 시선은 자꾸 북문 쪽으로 갔다. 엘리안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드론은 입술을 깨문 끝에 루아부터 찾았다.
"그 여자를 죽이라는 지시는 아니었습니다. 명단 사본을 빼내라고만 했습니다. 실패하면 북문 밖 제 동생이 대신 끌려간다고 했습니다."
"누가 했지?"
"이름은 모릅니다. 베도르 수송패를 보여 줬습니다. 명령은 늘 밀랍통으로 왔습니다. 제가 넘긴 건 경비 교대와 창고 동선이 전부입니다. 궁 기록 이야기는 어젯밤 처음 들었습니다."
세라가 드론의 멱살을 잡으려다 손을 멈췄다. 레온을 수레 위에서 돌려받던 날과 빙설 협곡의 피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주먹 대신 드론의 허리에서 열쇠를 빼 하르트에게 건넸다.
"동생이 있는 곳부터 확인해. 거짓이면 내가 다시 묻고, 사실이면 저쪽이 사람 목숨을 전달 봉투로 쓴 증거가 돼."
정오 무렵, 회색늑대 정찰병이 북문 밖 폐초소에서 결박된 청년 하나를 데려왔다. 드론은 그제야 무릎의 힘을 잃었다. 엘리안은 형제를 같은 방에 넣지 않았다. 각각 진술을 받고, 마을 서기와 용병단 대원, 성의 경비병이 한 명씩 입회하게 했다. 한 사람의 입을 또 다른 권력이 독점하지 못하게 하려는 첫 조치였다.
오후가 되자 동쪽 회랑 접견실에 엘리안과 세라, 루키안, 아델린이 모였다. 탁자 위에는 밀랍통, 궁 출입 기록 사본, 남부 분관 희생자 명단, 드론의 첫 진술서가 서로 닿지 않게 놓였다. 하르트는 문 옆에 서서 각 문서가 들어온 시각을 별지에 적었다.
아델린은 희생자 명단의 빈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잉크가 긁혀 나간 자리였다. 그 아래 남은 획 두 개를 오래 바라본 뒤, 마침내 소리 내어 읽었다.
"이르반 테셀. 선왕의 마지막 봉인 점검 때 내원에 들어온 두 봉인술사 중 한 명입니다. 궁 서무처 사본에서는 이 이름이 통째로 빠졌어요."
루키안이 궁 출입 기록을 돌렸다. 약자로 남은 서명과 이르반의 분관 서명을 나란히 대자 마지막 획의 방향이 달랐다.
"그럼 이 약자는 이르반이 아닙니다. 오스렌 카르딘이에요. 죽었다고 기록된 사람이 궁에서는 다른 이름을 빌려 쓴 겁니다."
아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렌은 베도르 공작가의 외부 봉인 고문으로 궁에 들어왔다. 이르반은 봉인을 약화시키는 계산을 거부했고, 남부 분관 붕괴 당일 현장에 남았다. 죽은 사람의 이름은 지워졌고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것으로 기록됐다. 기록의 방향이 정확히 뒤집혀 있었다.
"승인자는 누구입니까."
엘리안이 묻자 아델린은 품 안에서 접은 쪽지를 꺼냈다. 이번에는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 쪽지에는 젊은 귀족의 이름과 당시 직책이 적혀 있었다. 북부 봉인 물자 조정관, 카이런 베도르.
세라가 짧게 숨을 뱉었다. 카이런이 빙설 협곡에서 수송로를 끊기 오래전부터 봉인의 붕괴 시각을 사고팔았다는 뜻이었다. 군량을 빼돌려 로벨 영지를 약하게 만든 일과 봉인 유예 수당이 같은 손으로 이어졌다.
엘리안은 아델린에게 신변 보호를 약속했다. 다만 로벨 병력을 한 사람에게만 붙이지는 않겠다고 했다. 루아와 드론 형제, 문서를 만진 서기들까지 같은 보호 명단에 넣었다. 아델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건문 끝을 스스로 고쳤다.
"좋습니다. 제 신변이 아니라 증언자 전원의 신변 보호로 기록하세요. 저도 그 명단 안에 들어가겠습니다."
하르트가 문장을 적었다. 네 사람이 차례로 읽고 입회자 셋이 아래에 서명했다. 원본은 한 상자에 모으지 않았다. 궁 기록은 아델린, 장부는 루키안, 진술서는 하르트, 밀랍통은 세라가 맡았다. 엘리안에게는 어느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세라는 담장 밖에서 붙잡은 사내의 칼집도 따로 봉했다. 칼집 안쪽 가죽에는 북부 세금 창고의 옛 번호가 눌려 있었다. 하르트가 장부를 확인하자 그 창고는 카이런이 물자 조정관으로 있던 해에 베도르가로 넘어간 곳이었다. 거짓 전달 경로로 잡은 한 사람이 과거 수송망까지 잇는 물증이 된 셈이었다. 엘리안은 이 사실 역시 추측과 확인된 사실을 나눠 진술서 여백에 적게 했다.
해질 무렵 진창 위로 긴 그림자가 생겼다. 빈 문서함은 동쪽 기록고 앞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엘리안은 뚜껑을 열어 깨진 기왓장을 꺼냈다. 증거를 지키는 일은 상자를 무겁게 채우는 일이 아니라, 누구도 혼자 상자를 들고 달아날 수 없게 만드는 일이었다.
비가 그친 자리에서 감춰졌던 이름들이 하나씩 제 소리를 되찾았다. 오스렌 카르딘, 이르반 테셀, 카이런 베도르. 그리고 그 이름을 말하기 위해 살아남은 루아와 드론. 엘리안은 하르트가 들고 있던 진술 시각표를 덮으며 말했다.
"이제 이름을 칼처럼 쓰지 맙시다. 법정까지 살아서 데려갈 길부터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