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문 서쪽 창고 앞에는 약 냄새보다 젖은 종이 냄새가 짙었다. 밤새 비를 맞은 당소연은 문지방 앞에 세 개의 의자를 놓았다. 하나는 당문 비고지기, 하나는 외곽 약방 의원, 하나는 오창관 운송꾼의 자리였다. 아버지는 닫힌 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이름을 빼면 열쇠를 주마.” 문 너머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분명했다. 당소연은 조건을 다시 말하게 했다. 거래 수량과 물품은 공개하되 부친의 수결이 있는 장은 사망한 창고지기 책임으로 돌리라는 요구였다. 그녀는 그 말을 입회서 첫 줄에 그대로 적었다.
“열지 못해도 그렇게는 안 합니다.” 당소연이 답했다. “아버지 이름을 지운 원본은 원본이 아니에요.” 문 안에서 무거운 것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딸에게 가문을 무너뜨릴 셈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가문이 아니라 사람이 한 거래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고쳤다.
당문 원로 둘이 회랑 끝에 나타났다. 창고에는 독법 비전이 있어 외부인 출입이 불가하다고 했다. 당소연은 물품 이름을 가리고 수량과 출고처만 대조하는 절차를 제안했다. 독 제조법은 보호하되 누가 무엇을 내보냈는지는 감출 수 없다는 선이었다.
원로는 당소연에게 혈족패를 내놓으라 했다. 그녀는 허리패를 탁자 위에 놓았지만 창고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당문 밖 의원으로 살아온 자신에게 혈족패는 이미 치료 권한도 양심도 아니었다. 패를 잃어도 환자의 맥을 짚는 손은 남는다고 말했다.
문 안에서 빗장이 한 칸 내려갔다. 아버지가 작은 창을 열어 반쪽 열쇠를 내밀었다. 나머지 반은 비고지기가 보관해 왔다. 둘을 맞추자 이가 하나 비어 있었다. 비고지기는 삼 년 전 원로회가 열쇠를 바꾸며 한 이를 잘라 갔다고 밝혔다.
당소연은 억지로 돌리지 않았다. 잘린 이의 모양을 밀랍에 뜬 뒤 원로회 열쇠첩과 맞췄다. 원로 한 명의 패 뒤에서 같은 쇳조각이 나왔다. 그는 흑야루 거래가 끝난 뒤 창고를 봉하려 했다고 변명했다. 봉인은 거래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거래한 사람을 지우는 일이었다.
외곽 의원이 문과 열쇠 상태를 읽고 운송꾼이 손도장을 찍었다. 세 조각을 합쳐 자물쇠를 돌렸다. 문틈에서 하얀 가루가 뿜어져 나왔지만 당소연은 미리 젖은 천을 입회자 얼굴에 씌웠다. 가루는 독이 아니라 눈물과 재채기를 일으키는 방충제였다. 공포로 외부인을 물러나게 하는 장치였다.
창고 안 선반에는 독환과 해독제, 지혈약이 같은 날짜표 아래 놓여 있었다. 당소연은 어느 병도 열지 않았다. 병목 인장과 무게만 재고 출고 원본을 찾았다. 아버지는 가장 안쪽 탁자에 앉아 장부 한 권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있었다.
그가 내민 장부는 겉보기에는 온전했으나 제본실 두 마디가 새것이었다. 당소연은 바로 받지 않고 창고지기에게 같은 해 다른 장부를 가져오게 했다. 종이 장수 간격을 재니 가운데 열두 장이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치료 약재 장만 골라 남기려 했다고 인정했다.
“사람을 살린 장을 내놓으면 죽인 장이 사라집니까?” 당소연의 질문에 아버지는 답하지 못했다. 그는 빠진 장을 바닥 약상 아래에서 꺼냈다. 검은 밀랍으로 싸인 열두 장에는 독환, 마비침, 추적 향의 수량과 흑야루 중계창이 적혀 있었다.
첫 장에는 부친의 수결이 선명했다. 대가로 받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오창관에서 빼낸 부상자 일곱을 당문 외곽 약방에서 치료할 권한도 거래 조건에 들어 있었다. 그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곽연수의 운송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환이 어디에 쓰일지 몰랐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당소연은 출고일과 청매표국 피습일을 맞췄다. 마비침 스무 개가 나간 이틀 뒤 서백하의 표사 셋이 사라졌다. 추적 향 한 병이 나간 날은 하늘문 조태가 검은 누각패를 받은 때와 이어졌다. 당문 창고 출고 원본은 흩어진 공격을 한 날짜줄에 올렸다.
아버지는 곽연수가 약을 내주지 않으면 치료 중인 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운송꾼 입회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같은 협박을 들었다고 했다. 당소연은 협박 사실을 기록하되 선택이 사라졌다고 적지 않았다. 도움을 청하거나 거래를 끊을 기회가 있었는지도 따로 물었다.
아버지는 당문 원로에게 보고할 수 있었지만 가문이 환자들을 버릴까 두려워 혼자 결정했다고 답했다. 독환 수량을 줄여 적고 남은 대금으로 해독제를 만들었다. 그 해독제로 열두 명을 살렸지만, 누가 독환에 당했는지는 알려 하지 않았다. 살린 숫자를 방패로 죽은 이름을 보지 않은 책임이었다.
원로들은 거래가 개인 일탈이라고 주장했다. 비고지기가 보조 수불부를 펼치자 원로회 결재 도장 셋이 나왔다. 독환 재료를 보충하고 외부 약방 비용을 승인한 기록이었다. 당소연의 아버지 혼자만의 비밀도, 당문 전체가 똑같이 가담한 일도 아니었다. 결정마다 다른 이름이 있었다.
창고 뒤편에서 불붙은 냄새가 났다. 잘린 열쇠 이를 숨겼던 원로가 향로를 넘어뜨려 빈 포대에 불을 붙였다. 당소연은 원본을 먼저 안지 않고 가까운 견습 약동 둘을 밖으로 밀어냈다. 운송꾼이 모래통을 엎고 비고지기가 방화문을 닫았다. 불은 선반 하나에서 멎었다.
도망치던 원로는 당소연의 가는 침에 소매만 벽에 고정됐다. 피부에는 닿지 않았다. 그녀는 독을 쓰지 않고도 움직임을 멈출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는 불길 앞에서 빠진 장들을 스스로 안고 나왔다. 그 행동이 과거 거래를 씻지는 않았지만 더 훼손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남았다.
창고 마당에서 원본 재결합이 이루어졌다. 옛 제본 구멍과 뜯긴 실밥을 맞추고 빠진 열두 장을 원래 자리에 끼웠다. 당소연의 시약은 먹의 나이가 다른 장과 같음을 보였다. 입회자 셋이 장수, 물품 수량, 수결 위치를 차례로 확인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입회 증언을 직접 읽었다. 흑야루에 독환과 추적 향을 내준 거래, 환자들을 살리려 했던 동기, 원로회 보고를 피하고 장부를 잘라 낸 은폐를 모두 인정했다. 사망한 창고지기에게 책임을 돌려 달라는 처음 조건도 취소했다. 창고지기의 이름은 누락 피해자 칸에서 복권됐다.
당소연은 아버지를 용서한다거나 부녀 관계를 끊는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공개 대조일까지 당문 의원 감시 아래 머물며 피해자 질문에 답하게 했다. 치료는 다른 의원과 함께 계속하되 독재고와 장부에 홀로 접근할 권한은 내려놓게 했다. 사람을 살리는 기술과 거래 권한을 분리했다.
당문 원로회도 출고 원본 사본을 가문 안에만 두지 못했다. 한 부는 백매진, 한 부는 오창관 생존자, 한 부는 당문 외곽 약방에 보냈다. 제조 비법이 드러나는 열은 가리되 수량과 날짜, 승인자는 가리지 않았다. 피해자가 자신의 상처와 출고일을 맞출 수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출발 전 당소연에게 오래된 약칼을 내밀었다. 그녀는 받지 않았다. 물려받을 것은 도구가 아니라 잘못까지 포함한 기록이라고 했다. 대신 장부 운반 상자의 한 열쇠를 외곽 의원에게 주고 자신은 다른 열쇠를 맡았다. 부녀가 서로를 감시하는 구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당소연이 창고 문을 다시 닫을 때 자물쇠는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다. 독환 재고, 치료 약재, 거래 기록이 각각 다른 사람의 열쇠 아래 놓였다. 당문 창고 출고 원본은 불을 피했고 부친의 수결도 남았다. 딸이 아버지 이름을 지우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살린 사람과 해친 사람 모두 같은 햇빛 아래 말할 자리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