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문 아래 뜰에 긴 탁자 셋이 놓였다. 첫 탁자에는 온전한 매화 위탁표, 둘째에는 소림 봉인경 압인, 셋째에는 서백하의 네 요청서와 붉은 흙 봉투가 올라갔다. 현허진인과 위명선, 류정화, 청연도인, 진무백이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산문 제자와 마을 입회자는 돌담 밖에서도 표목을 읽을 수 있었다.
현허는 압인이 무당을 떠나기 전에 진본 여부부터 확인하자고 했다. 문제는 봉인경 원본이 소림에 있다는 점이었다. 류정화는 압인 가장자리의 마모와 선대 위탁 목록의 탁본을 대조하는 임시 확인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종 확인은 오창관 폐쇄 원본 앞에서 해야 했다.
위명선은 운반 중 빼앗길 위험을 이유로 압인을 규율원 본고에 남기자고 주장했다. 진무백은 압인을 두고 위탁표만 가면 소림이 다시 진본을 부정할 수 있다고 했다. “위험을 줄인다는 말로 확인 도구를 가두면 네 번의 거절과 달라지는 게 없소.” 류정화도 자신의 옛 선택을 반복하지 말라고 보탰다.
논쟁 도중 규율원 제자 넷이 뜰 양쪽 문을 닫았다. 위명선의 명령은 아니었다. 선임 검수 조태가 현허의 구두 지시라며 물품을 압수하겠다고 나섰다. 현허는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즉시 부인했다. 조태는 수장의 체면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며 상자 쪽으로 손을 뻗었다.
뜰 밖에서 문 닫는 소리를 들은 역참지기 고씨가 나무 막대를 문틈에 끼웠다. 마을 입회자 둘은 도망치지 않고 게시판의 물품 목록을 큰 소리로 읽었다. 안에서 무엇을 빼앗더라도 바깥 사람이 수량을 기억하게 하려는 행동이었다. 규율원 제자들은 증인이 늘자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진무백은 칼집째 검을 들어 손목을 밀어냈다. 칼날은 나오지 않았고 조태의 손도 부러지지 않았다. 청연도인은 문을 막은 제자들의 발밑에 장삼 띠를 던져 움직임만 묶었다. 위명선은 자기 규율패를 높이 들어 압수 명령이 정식 절차가 아님을 외쳤다. 안팎의 목격자가 동시에 들었다.
조태는 품에서 작은 검은 누각패를 떨어뜨렸다. 흑야루 명령패와 닮았으나 새것이었다. 진무백은 그를 흑야루 사람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누가 건넸고 무엇을 약속했는지 살아서 말하게 해야 했다. 위명선은 조태와 제자들을 분리해 앉히고 각자의 진술을 따로 받았다.
당소연이 남긴 독 판별지 한 장을 패 표면에 대자 옅은 보라색이 번졌다. 사람을 죽이는 독이 아니라 손에 묻어 운반자를 뒤쫓는 추적 향이었다. 청연도인은 패를 만진 사람들의 손을 씻게 한 뒤 씻은 물까지 봉했다. 조태를 미끼로 삼아 뒤를 쫓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에게 또 모르는 위험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
조태는 빚을 갚아 주겠다는 상인에게서 패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압인을 규율원 본고에 하루만 옮기면 된다는 부탁이었다. 상인의 이름은 몰랐지만 손가락에 당문식 약상 반지가 있었다고 했다. 당문이 배후라는 증거는 아니었다. 흑야루가 여러 세력의 표식을 빌려 서로 의심하게 만든 흔적일 수 있었다.
그 사이 류정화는 요청서 뒷면의 수레 배치도와 하늘문 옛 역참 장부를 맞췄다. 서백하가 마지막 방문 뒤 빌린 말은 소림 서북 붉은 흙길의 객점에서 발견됐다. 말 대여표에는 ‘오창관 폐곡창’이라는 도착지가 적혀 있었다. 네 번째 길의 끝이 문서로 확인됐다.
청연도인은 마른 꽃받침의 방충제도 무당 약재표와 비교했다. 황토와 쑥재 비율이 오창관 폐쇄 전 곡물 창고에서 쓰던 조합과 같았다. 소림 상단이 전쟁 뒤 그 배합을 금했으므로 최근 누가 꾸민 흔적이 아니었다. 오래된 위탁물과 경로가 같은 시간을 가리켰다.
현허는 자신이 외유 중 오창관 남쪽에서 서백하의 소식을 들었다고 마침내 밝혔다. 얼굴을 보지는 못했으나 ‘흰 매화 표사가 살아 있는 명부를 옮긴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무당이 과거 은폐에 얽혔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 소문을 보고하지 않았다. 복귀 뒤 순찰을 늘린 까닭에도 그 두려움이 있었다.
진무백은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물었다. 현허는 압수 시도를 보고 침묵이 물건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답했다. 류정화는 늦은 고백이 책임을 지우지는 않지만 경로 확인에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허의 진술은 별도 봉투에 들어갔다.
온전한 위탁표를 압인 경첩에 다시 끼우자 안쪽 경문 아래 아주 작은 글자가 드러났다. ‘오창관 제이 곡창, 법경 입회.’ 꽃잎 천이 없으면 경첩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읽을 수 없는 위치였다. 궤짝의 비기록 물건과 매화 조각의 관계가 길의 끝까지 증명했다.
서백하의 요청서, 붉은 흙, 말 대여표, 방충제, 압인 속 글자는 모두 오창관을 가리켰다. 진무백은 지도 위에 다섯 근거를 따로 적었다. 하나가 거짓이어도 나머지로 경로를 검증할 수 있게 했다. 서백하가 하늘문에서 오창관 생존자 길로 향했다는 결론이 공개 입회서에 올라갔다.
남은 문제는 누가 원본을 들고 갈지였다. 현허는 무당 대표 한 명에게 맡기자 했고 진무백은 거절했다. 압인 상자에는 세 자물쇠를 달았다. 하나는 위명선, 하나는 진무백, 하나는 마을에서 뽑힌 역참지기 고씨가 맡았다. 어느 문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세 번째 열쇠를 가지게 됐다.
세 사람은 빈 상자로 인계 연습부터 했다. 한 열쇠가 늦거나 봉인끈이 젖었을 때 누구에게 알리는지, 길손이 쓰러졌을 때 상자를 먼저 지킬지 사람을 먼저 옮길지까지 정했다. 답은 사람이 먼저였다. 상자는 사본으로 복구할 수 있지만 증언자는 되살릴 수 없다는 문장이 호송표 둘째 줄에 들어갔다.
요청서 원본은 압인과 다른 수레에 실었다. 위탁표도 진무백이 품지 않고 류정화와 청연도인이 교대로 지키는 납함에 넣었다. 세 물건이 한꺼번에 탈취되지 않도록 이동 시각과 길을 달리하되, 밤마다 공개 객점에서 봉인을 대조하기로 했다.
조태의 압수 시도는 숨기지 않았다. 위명선은 규율원의 수치를 드러낸다며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진술 요약을 산문 게시판에 붙였다. 현허도 자신의 구두 명령이 아니었음을 서면으로 남겼다. 누군가 뒤에 있더라도 그 이름을 찾기 전까지 조태가 한 행동과 자신이 받은 약속은 분명히 기록됐다.
빚을 대신 갚아 준 상인의 영수표도 조태의 방에서 나왔다. 영수표 상호는 실제 약상과 달랐고 인장 가장자리에 검은 누각패의 같은 칼흠이 있었다. 위명선은 조태를 처벌하기 전에 채무가 어떻게 이용됐는지 조사하겠다고 했다. 약점을 산 사람과 문을 닫은 사람의 책임을 한 칸에 섞지 않기 위해서였다.
류정화는 동행하지 않겠다고 했다. 마지막 입회자로서 하늘문에 남아 사본과 추가 증언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대신 자신의 닫힌 문 인장을 공동 상자에 넣어 소림에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위명선은 그녀의 처소를 감시실이 아니라 공개 진술소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진무백은 떠나기 전 하늘문 기록고 문턱을 손으로 쓸었다. 그곳에는 새 매화 흠이 더 생기지 않았다. 앞서 발견한 칼끝은 류정화의 것이었고 조태의 패는 새 거래의 물증으로 따로 봉해졌다. 설명되지 않은 발자국을 억지로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산문 아래에서는 세 수레가 서로 다른 시각에 출발했다. 진무백은 첫 수레에 타지 않고 걸었다. 청연도인이 옆으로 와 “서백하를 찾으면 무엇부터 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진무백은 오래 생각한 뒤 대답했다. “왜 살아 있었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살리며 누구를 위험에 두었는지부터.”
해가 기울자 하늘문은 뒤로 작아졌다. 그러나 그곳에서 열린 것은 비밀 문 하나가 아니었다. 위탁표와 소림 봉인경 압인, 서백하의 네 번 거절 기록이 공동 호송 규칙 아래 길 위로 나왔다. 오창관이라는 목적지는 더는 소문이 아니었고, 누구도 혼자 감출 수 없는 공개된 경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