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첫빛이 들기 전에 혜산댁은 객잔 식당의 창문을 모두 열었다. 밤새 말린 원장에서는 젖은 종이와 탄 약재 냄새가 났다. 그녀는 장마다 얇은 대나무 살을 끼우고, 일정한 간격으로 밥그릇을 엎어 눌렀다. 담소령이 돕겠다고 하자 손을 저었다. “먼저 물어야 할 게 있지 않소. 대답을 듣고도 돕고 싶으면 그때 손을 빌리시오.”
담소령은 약첩과 인쇄물 묶음을 들고 마주 앉았다. 세 번째 장의 이름, 혜산이가 위로 오도록 펼쳤다. 서진해와 막금산, 윤세하도 자리에 앉았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혜산댁은 그 이름의 마지막 획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이건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이 아니오. 고성 약방에서 기록을 맡은 사람이 이어받는 전승명이오. 밖에서는 별칭으로 혜산이라 불렀지.”
“이어받는다고요?” 담소령이 되물었다. “약방 주인이 바뀔 때마다?” “주인은 따로 있었고, 혜산이는 장부를 지키는 사람이었소. 의원일 때도 있었고, 약초꾼이나 마부의 아내일 때도 있었지. 글을 읽고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팔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사람이 그 이름을 받았소. 나는 여섯 번째 혜산이요. 장터 사람들은 나를 혜산댁이라 불렀고.”
담소령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가 다시 굳었다. “그럼 제가 어릴 때 들은 혜산이는 당신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맞소. 그때 네 어머니와 함께 일한 이는 다섯 번째였다. 내 이모 백혜순이었지. 이모가 병으로 누운 뒤 나에게 장부와 이름을 넘겼소. 담소린은 사람 이름이 한 사람 몸에만 매이면 그 사람이 죽을 때 길도 끊긴다며 그 방식을 좋다고 했소.”
막금산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찾은 발자국은 누구 것이었소?” 혜산댁은 그를 곧바로 보았다. “내 것이오. 당신이 고성 약방 뒤에 왔던 날, 나는 우물 아래 기록을 옮기고 있었소. 얼굴을 드러내면 당신이 또 혼자 짐을 질 것이 뻔해 발자국만 남겼지.” 막금산은 마땅히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손바닥을 무릎에 폈다.
서진해는 인쇄물의 이름 목록을 훑었다. 같은 글자 옆에 서로 다른 해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의 긴 행적으로 읽으면 앞뒤가 맞지 않던 부분이, 보관자의 계보로 보면 정확히 이어졌다. “그래서 어떤 해에는 북쪽 약창에 있고, 같은 달에 남쪽 나루에도 있었던 것처럼 보였군요.” “사람이 둘이어서가 아니라 이름이 직책이었기 때문이오. 이동할 때에는 앞사람과 뒷사람이 한 달쯤 함께 썼고.”
윤세하가 오래 묵은 기억을 꺼냈다. 청문파가 무너지기 전, 물자 감찰부에서 ‘혜산이 둘을 확인했다’는 보고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백무결은 그것을 이중 첩자로 해석하게 만들었고, 약방 감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썼다. 혜산댁이 고개를 저었다. “둘은 교대 중인 보관자였소. 한 명을 잡아도 기록이 끊기지 않게 인수하던 중이었지. 그 평범한 절차를 죄로 만든 게로군.”
담소령은 객잔 마당에서 발견한 천 조각을 펴 놓았다. 푸른 실 세 가닥과 흰 실 한 가닥이 비스듬히 교차했다. “이것도 기록 보관자들의 표시입니까?” 혜산댁은 천을 돌려 봉제선이 위로 가게 했다. 방금 전까지 새의 날개처럼 보이던 무늬가 산길과 우물 모양으로 바뀌었다. “세 갈래 길 가운데 흰 길을 택하라는 방향표요. 공격하는 무리의 문장이 아니오.”
그녀는 광주리 안쪽을 가리켰다. 같은 천 조각이 작은 주머니마다 매달려 있었고 실의 방향이 조금씩 달랐다. 푸른 실이 위로 향하면 의원으로, 아래로 향하면 객잔으로, 매듭이 둘이면 사람이 다쳤다는 뜻이었다. 글을 모르는 마부도 알아볼 수 있고 붙잡혀도 이름을 털어놓지 않게 만든 약속이었다. 담소린이 병자 명부를 옮길 때 직접 고안한 표시도 섞여 있었다.
“그럼 마당에 이걸 떨어뜨린 그림자는 누구였습니까?” 서진해가 물었다. 혜산댁이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나였소. 그날 객잔에 들어오면 지켜보는 자를 함께 끌고 들어올 것 같아 담을 넘지 않았소. 천만 던지고 서쪽 길로 빠졌지. 막천류가 표시를 알아보고 혼자 따라올 거라 생각했소.” “결국 두 분이 같은 병을 앓는군요.” 담소령의 말에 막금산과 혜산댁이 동시에 헛기침했다.
모두가 웃지는 못했다. 그 표시 때문에 담소령은 어머니가 감춘 누군가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고, 서진해는 새 추격 조직이 객잔을 겨눈다고 생각했다. 막금산은 두려움을 덜어 주려다 더 큰 두려움을 만들었다. 혜산댁은 천을 접어 담소령에게 돌려주었다. “침묵은 뜻을 보존하지 못하오. 함께 약속을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만 말이 되지. 남겨진 이에게는 흉터 같은 모양일 뿐이오.”
담소령은 다섯 번째 혜산이에 관해 물었다. 백혜순은 담소린과 함께 청문파에서 나온 환자 기록을 고성으로 옮겼고, 멸문 뒤에는 죽은 이와 살아남은 이의 이름을 따로 베껴 두었다. 두 해 전 세상을 떠나기 전, 기록을 여섯 번째 보관자에게 넘기며 한 문장을 남겼다. ‘이름은 숨기기 위해 받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잃지 않기 위해 받는다.’
그 문장을 들은 담소령은 약첩을 무릎 위에 놓았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왜 모든 사정을 말하지 않았는지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기록을 맡은 이들이 생존을 위해 이름을 나누어 가졌다는 것은 이해하겠다고 했다. “저는 담소린의 딸이지만 어머니의 침묵까지 물려받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아는 건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거예요.” 혜산댁은 그제야 원장 한쪽을 내주었다.
다섯 사람은 기록에 나타난 전승명의 계보를 한 장으로 정리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오래전에 병으로 죽었고, 다섯 번째 백혜순은 인수 날짜와 사망 날짜가 남아 있었다. 여섯 번째는 지금 눈앞의 혜산댁이었다. 각 이름 옆에는 두 사람 이상의 확인자가 있었다. 한 명의 주장으로 계보가 만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윤세하는 그 확인자 중 살아 있는 셋의 거처를 알고 있었다.
“내가 왜 그들을 아는지부터 말해야겠군.” 윤세하가 말했다. “물자 감찰부에서 감시 명단을 옮겼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흐리지 않았다. 혜산댁은 그 말을 기록 아래에 그대로 쓰게 했다. 도운 일만 남기고 가담한 일을 빼면 또 다른 조작이 된다는 이유였다. 윤세하는 자신의 이름과 당시 직책, 명단을 옮긴 날짜를 적고 손도장을 찍었다.
막금산도 붓을 들었다. 그는 고성 약방의 존재를 알면서 서진해와 담소령에게 늦게 말한 사실, 편지를 받은 뒤 혼자 떠난 사실을 적었다. 마지막 줄에서 붓이 오래 멈췄다. ‘보호를 이유로 당사자의 선택을 빼앗았다.’ 담소령은 그 문장을 읽고 지우지 않았다. 대신 그 아래에 ‘함께 이동하고 함께 보관한다’고 적었다.
정오 무렵 객잔 앞에 고성 현리가 보낸 역졸이 도착했다. 붙잡힌 두 사람이 학영회 표식을 지녔으며, 한 명의 허리띠 안쪽에서 백무결의 사저 창고 출입표가 나왔다는 확인서였다. 도망친 한 사람은 다리에 상처를 입어 멀리 가지 못했지만, 추적보다 증거와 증인을 지키는 일이 먼저라는 당부도 적혀 있었다. 서진해는 확인서를 두 벌 베껴 각각 다른 봉투에 넣었다.
혜산댁은 자신의 본명을 위원회에서 밝힐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밝히지 않기로 한 까닭을 분명히 기록했다. 본명을 감추어 책임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음 보관자가 이어받을 전승명을 개인의 족보로 바꾸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만 위원회 서기와 두 명의 증인에게는 봉한 문서로 본명과 거처를 남겨 허위 증언의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숨김의 범위와 책임의 범위를 함께 정한 셈이었다.
서진해는 그 결정을 들으며 청문파라는 이름을 생각했다. 이름을 되찾는 것과 이름에 갇히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혜산이는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이어진 이름이었고, 청문은 죽은 문파의 명예만을 위한 글자가 아니어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실을 묻고 답할 수 있는 문이 되어야 했다.
저녁 장사를 시작하기 전 담소령은 천 조각을 객잔 벽에 붙이지 않고 작은 장부 첫 장에 꿰매었다. 그 아래에 문양의 방향과 뜻, 사용한 사람, 발견한 장소를 적었다. 더는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비밀 표식으로 두지 않기 위해서였다. 혜산댁은 푸른 실 한 가닥을 보태 마지막 매듭을 묶었다.
막금산이 솥뚜껑을 열자 무 냄새가 식당에 퍼졌다. 그는 혜산댁에게 국자를 건넸고, 혜산댁은 국물 간을 본 뒤 소금을 한 꼬집 덜어 냈다. 담소령은 그 모습을 보다가 처음으로 편하게 웃었다. 인쇄물 속 혜산이도, 문 앞에 앉은 혜산댁도 이제 서로를 밀어내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이어받은 이름의 앞과 뒤가 한 밥상에서 맞물렸고, 오래된 의혹은 더 숨길 필요 없는 기록으로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