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은상단은 국을 공짜로 나눠 주며 파서진에 들어왔다. 수레 옆에는 `실종 가족의 몫을 먼저 찾아드립니다`라는 푸른 천이 걸렸고, 글을 모르는 노인들에게는 서기가 대신 문장을 읽어 줬다. 열아홉 이름을 기다리던 가족들은 청명보다 빠른 돈을 준다는 말에 줄을 섰다.
상단주 정가량은 회복 재원이 지급되기까지 몇 달이 걸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신들이 곡식 열 섬을 먼저 주고, 나중에 받을 몫의 절반을 수고비로 가져간다는 조건이었다. 말만 들으면 위험을 나누는 거래 같았다. 그러나 계약 아래쪽에는 신원 확인과 이의 제기 권한까지 상단에 넘긴다는 줄이 있었다.
담여화는 줄 끝에서 기침하는 소리를 들었다. 얼굴이 누렇게 뜬 사내가 딸의 부축을 받으며 손도장 탁자에 앉아 있었다. 상단 의원은 서명하면 즉시 귀한 해열약을 주겠다고 했다. 사내의 손은 열로 떨렸고, 딸은 문장을 읽을 틈도 없이 그의 엄지를 먹물에 눌렀다.
담여화는 계약서를 빼앗지 않았다. 먼저 사내의 눈빛과 숨, 손끝을 확인하고 진료가 급하다고 알렸다. 정가량은 상단 소속 환자이니 자기 천막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담여화는 환자가 아직 어떤 계약도 유효하게 선택할 상태가 아니며, 치료 장소는 환자와 가족이 고른다고 맞섰다.
딸은 약값이 없어서 상단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소령은 청명 공동 약재에서 긴급 치료분을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 도움을 받더라도 상단 계약을 철회하거나 청명에 가입할 의무는 없었다. 선택지마다 비용과 기다리는 시간을 말한 뒤, 딸은 객잔 진료소를 골랐다.
상단 경비들이 길을 막았다. 윤채는 검을 차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에 섰지만 지휘하지 않았다. 시장 수레꾼 대표가 통로를 만들고, 객잔 주인이 환자를 실을 문짝을 가져왔다. 한소령은 경비와 맞서는 동안에도 담여화가 정한 이동 속도를 따랐다. 환자는 싸움의 깃발이 아니라 숨이 막히는 사람이었다.
진료소에서 담여화는 사내가 단순 열병이 아니라 약물에 취해 있음을 알아냈다. 손톱 아래에 졸음을 부르는 수련씨 가루가 끼어 있었다. 상단 의원이 맥을 진정시킨다며 준 환약에 섞인 듯했다. 정신이 흐린 상태에서 찍은 손도장은 선택의 증거가 될 수 없었다.
사내의 딸은 자기가 약을 먹였다고 울었다. 담여화는 그녀를 공범처럼 묻지 않고 포장지와 남은 환약을 따로 봉했다. 언제, 누구에게, 어떤 설명을 듣고 먹였는지 질문을 짧게 끊었다. 딸은 `서명할 때 떨지 않게 하는 약`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기억했다.
새은상단은 수련씨가 흔한 진정 약재라며 발뺌했다. 담여화도 약재 자체를 죄로 만들지 않았다. 용량과 투약 목적, 환자에게 알린 내용, 서명 시각을 대조해야 했다. 같은 약이 치료가 될 수도 있고 판단을 빼앗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청명 사람들은 상단 천막을 수색하자고 했지만 한소령은 회당 감독 서리를 불렀다. 민간 공동체가 의심만으로 다른 이의 물건을 뒤지는 권한은 없었다. 대신 떠나려는 수레 번호와 계약 상자 위치를 여러 사람이 기록했다. 감독 서리가 올 때까지 시장 출구의 교통을 정상 절차로 늦췄다.
정가량은 가족들이 자발적으로 줄을 섰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계약자 스물일곱 명 중 여덟은 내용을 이해하고 긴급 곡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청명은 모든 거래를 사기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문장을 다시 읽고 유지·재검토·철회 심리를 따로 고르게 했다.
문제는 미확인 열아홉 이름이었다. 상단은 가족의 손도장만 있으면 당사자를 대신해 생존 확인과 재원을 청구할 수 있다고 써 놓았다. 당사자가 살아 돌아와 다른 뜻을 밝혀도 이미 권한이 넘어가도록 했다. 가족의 기다림이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의 권리까지 팔고 있었다.
노진수 어머니의 이름도 계약 명단에 있었다. 그녀는 손도장을 찍지 않았지만 누군가 벽의 짚신 모양을 베껴 대리 표시를 만들었다. 정가량은 노모가 구두로 허락했다고 했다. 노모는 상단 사람과 국 간 이야기를 나눴을 뿐 재원을 넘긴 적이 없다고 맞섰다.
막리연은 손도장 종이의 날짜를 대조하다 같은 날 한 사람이 두 고을에서 서명한 사례를 찾았다. 그는 발견을 자기 공로로 발표하지 않고 회당 서기에게 원본 위치부터 확인시켰다. 지난날 숫자 하나를 서둘러 믿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두 종이 중 하나는 잉크가 아직 새것이었다.
감독 서리가 천막을 열자 손도장 나무틀 열아홉 개가 나왔다. 가족이 한 번 찍은 지장을 밀랍에 떠서 반복 인쇄하는 도구였다. 틀 옆에는 병명과 약값, 빚의 크기가 적혀 있었다. 가장 급한 사람부터 찾아가 계약을 권하려는 순서표였다.
담여화는 병명 목록이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상단 의원은 시장 약방에서 샀다고 말했다. 약방 주인은 처방을 팔지 않았지만 외상 장부를 보여 준 적은 있다고 인정했다. 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환자의 어려움을 넘길 책임까지 없애 주지는 않았다.
진료소는 그날부터 외상 장부에서 병명을 빼고 필요한 약재와 미납 수량만 별도 번호로 적었다. 환자 연락처는 치료 담당자 둘만 볼 수 있게 했다. 공동 재원을 투명하게 관리하면서도 누가 어떤 병으로 급한지 장사꾼이 고를 수 없도록 기록을 갈랐다.
심리 첫날, 열병 사내는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곡식 열 섬이 여전히 필요하지만 권리 절반을 넘기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이미 받은 두 섬은 어떻게 돌려줄지 걱정했다. 심리자는 강요 아래 건넨 선지급분인지 판단하기 전까지 빚 독촉을 멈추게 했다.
내용을 알고 서명한 여덟 명 중 셋은 계약을 유지했다. 한 여인은 기다리다 아이를 굶길 수 없다며 손해를 알아도 오늘의 곡식을 택했다. 한소령은 그녀의 선택을 잘못이라 부르지 않고, 상단이 약속한 위험과 실제 가져갈 몫을 공개 장부에 명확히 적게 했다.
다른 가족들은 상단이 사라지면 급한 돈을 구할 길도 사라진다고 불안해했다. 청명은 처벌만 요구하지 않고 시장 곡식상들과 작은 선지급 창구를 만들었다. 수고비는 공개된 정액으로 제한하고, 가족 지장은 실종자 본인의 장래 권한을 넘기지 못하게 했다. 재원 부족 시에는 대기 순서를 숨기지 않았다.
정가량은 자기가 위험을 감수했으니 이익도 마땅하다고 소리쳤다. 노진수 어머니는 벽에서 왼짝 짚신을 내려 그의 탁자 앞에 놓았다. “기다리는 동안 굶는 게 우리 약점인 건 맞다. 그렇다고 이 신발 주인의 입까지 네 것이 되진 않는다.” 그녀는 신발을 다시 품에 안았다.
상단 의원은 담여화에게 치료자끼리 일을 덮자고 제안했다. 수련씨 용량만 문제 삼고 손도장 계약은 장사 문제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담여화는 약을 쓴 목적과 설명 의무를 공개 심리에 제출했다. 같은 의원이라는 이유가 서로의 침묵을 보장하는 표가 될 수 없었다.
새은상단 수레가 압수 장소로 이동할 때 환약이 필요한 환자들의 약은 따로 분리됐다. 상단의 죄를 묻는다고 그 약에 의존하던 사람의 치료까지 끊지 않았다. 담여화는 성분을 다시 확인해 안전한 분량을 지급하고, 다른 진료소를 고를 권리도 알렸다.
한 달 뒤 손도장 심리 결과는 한 줄로 통일되지 않았다. 유효 계약 아홉, 강요·판단 불능으로 재심 열하나, 위조 일곱이었다. 미확인자 권한을 포괄 양도한 조항은 모두 효력이 정지됐다. 각 가족은 같은 피해자이면서도 다른 선택과 사실을 가진 사람으로 남았다.
공짜 국을 나눠 주던 상단 천막 자리에는 계약 읽기 탁자와 작은 약물 설명판이 섰다. 담여화는 해열약을 건네고도 어떤 종이에도 지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한소령은 열아홉 이름 옆에 `가족 서명만으로 양도 불가`라는 줄을 붙였다. 새벽 장터에서 가장 값비싸게 지켜진 것은 돈이 아니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