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련은 날이 밝기 전에 약첩의 실밥을 뜯었다. 책장을 훼손하려는 손이 아니었다. 표지 안쪽에 다른 종이가 덧대어진 것을 알아본 의녀의 손이었다. 가느다란 침으로 실을 하나씩 풀자 오래된 지도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맥과 물길 대신 약초 이름들이 길처럼 이어져 있었다.
"황기에서 당귀로, 당귀에서 백지로. 채취지가 아니라 길표예요."
묘련은 지도 조각을 탁자 위에 펼쳤다. 약초의 첫 글자만 읽자 운교객잔에서 북서쪽으로 반나절 떨어진 산중 마을 이름이 나왔다. 묘장덕이 젊을 때 운영했다가 버린 작은 약방이 있는 곳이었다.
남궁세는 여관에 남았다. 보고를 늦출 명분을 만들고 뒤쫓는 눈을 붙들겠다고 했다. 담소하와 노경천, 묘련은 해가 능선에 닿기 전에 길을 나섰다. 묘련이 앞장섰다. 이번에는 누구도 지도를 대신 들겠다고 하지 않았다.
산길은 사람 하나 겨우 지날 만큼 좁았다. 바위 틈마다 쑥이 자랐고, 물기 많은 흙에는 오래된 나막신 자국처럼 패인 홈이 이어졌다. 묘련은 홈의 간격까지 기억하는 듯 망설이지 않았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왔던 길이라고 했다.
"여기 온 기억이 있었어?"
담소하가 묻자 묘련은 한참 뒤에 대답했다.
"냄새만. 단향 냄새랑 피 냄새가 같이 났던 밤. 꿈인 줄 알았어."
폐약방은 밤나무 숲 안에 있었다. 지붕 절반이 내려앉았고 문짝은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묘련이 문을 밀자 먼지와 마른 약재 냄새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안쪽 벽에는 약장 스물네 칸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 비었지만 가장 아래 칸 하나만 못으로 봉해져 있었다.
노경천이 검 손잡이로 못을 빼려 하자 묘련이 그의 손을 밀어냈다.
"약장은 약 쓰는 사람이 엽니다."
그녀는 머리에서 비녀를 빼 못 옆의 작은 구멍에 넣었다. 두 번 돌리자 서랍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안에는 말라붙은 붕대, 반쪽짜리 새 화인, 작은 나무패 하나가 있었다. 나무패 앞면에는 연비화, 뒷면에는 열한 살이라고 적혀 있었다.
담소하는 정묵산에서 만난 젊은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열한 살에 이 약방으로 실려 왔다면 십 년 가까운 시간이 맞았다. 묘련은 붕대를 집어 들지 못하고 한동안 내려다봤다. 천에는 검붉은 얼룩이 남아 있었고 단향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서랍 바닥에는 묘련 어머니의 편지가 붙어 있었다. 종이가 약재 진액에 젖었다 말라 글씨가 군데군데 번졌지만 읽을 수 있었다. 묘련은 처음 몇 줄을 소리 내다가 목이 잠겨 담소하에게 넘겼다.
편지에는 비 오는 밤 위무강이 어린 여자아이를 업고 찾아왔다고 적혀 있었다. 아이는 갈비 아래를 찔렸고 혀 밑에 침묵독이 들어가 말을 할 수 없었다. 위무강은 혈야맹이 아이를 장부와 함께 없애려 한다며 사흘만 숨겨 달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그 장부의 일부를 덮는 데 가담했으며, 아이가 죽으면 자기 죄도 영영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부님이 스스로 말했군."
노경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담소하는 형을 위로하지 않았다. 편지는 위로를 위해 남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 뒤의 문장은 더 뜻밖이었다. 아이가 깨어난 뒤 위무강은 함께 청문으로 가자고 했지만 연비화가 거절했다. 말 대신 붓으로 남궁 암부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썼다. 자신이 없으면 장부는 다른 손으로 넘어가고,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지워질 것이라고 했다. 묘련의 어머니와 위무강은 막으려 했으나 연비화는 새 화인 절반을 떼어 두고 홀로 떠났다.
"열한 살짜리를 혼자 보냈다고요?"
묘련의 분노가 약방 벽을 울렸다. 노경천이 고개를 숙였다.
"사부님은 뒤를 밟았을 거다."
"밟았다는 기록은 어디 있어요. 살았다는 결과가 어른의 책임을 없애 주지는 않아요."
묘련은 편지를 빼앗듯 받아 다시 읽었다. 마지막 부분에는 위무강이 사흘 뒤 돌아와 아이가 남궁의 행렬에 스스로 섞여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아이를 끌어내지 못했다. 대신 장부를 읽는 열쇠를 둘로 나눠 하나는 죽간에, 하나는 제자의 등에 숨기겠다고 했다. 언젠가 연비화가 자기 선택으로 돌아올 때만 열리게 하겠다는 약속도 남겼다.
담소하는 등에 남은 흉터가 당기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채 열쇠가 된 일도 옳지 않았다. 연비화를 기다리겠다는 명분으로 어린아이를 위험 속에 남겨 둔 일도 옳지 않았다. 사부의 후회가 죄를 지워 주지는 않았다.
약장 뒤쪽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담소하가 벽판을 밀자 작은 틈이 열렸다. 그 안에는 마른 먹과 봉투 세 장이 있었다. 첫 봉투에는 백천리의 이름이, 두 번째에는 노경천, 세 번째에는 묘씨 의녀의 딸이라고 쓰여 있었다.
묘련이 자기 앞으로 온 편지를 펼쳤다. 어머니의 글씨였다. 네가 이 글을 읽는 날에는 내가 설명하지 못한 손님이 다시 너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 아이가 돌아오면 치료한 사람의 은혜를 갚으라 하지 말고, 왜 돌아왔는지 먼저 물으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묘련은 편지를 접지 못했다. 종이를 두 손으로 든 채 오래 서 있었다. 담소하는 옆에서 기다렸다. 눈물을 보지 않은 척하거나 말을 건네는 대신, 무너진 지붕 틈으로 들어오는 빗물을 받을 그릇을 찾아 놓았다.
노경천 앞으로 온 봉투에는 한 줄뿐이었다. 연비화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소하의 등을 열쇠 삼지 말라.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면 둘에게 사실을 먼저 말하라. 노경천은 그 줄을 두 번 읽고 편지를 가슴께로 내렸다.
"나는 이 편지를 받지 못했다."
"사부가 보내지 않은 겁니다."
담소하는 말했다.
"그래도 형이 숨긴 일까지 사부 탓은 아닙니다."
노경천은 변명하지 않았다. 약방 밖에서 비가 시작됐다. 묘련은 어머니의 편지와 나무패만 챙기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두려 했다. 담소하가 말라붙은 붕대를 깨끗한 천으로 감쌌다.
"이것도 가져갑시다. 연비화가 누구인지 증명할 때 필요할 수 있어."
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약첩에는 붕대의 상태와 꺼낸 날짜를 먼저 적었다. 기록은 가져가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누구라도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하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세 사람이 약방을 나설 때 묘련이 문을 다시 세웠다. 무너진 집을 고치는 일은 아니었다. 안에 남은 흔적이 비를 덜 맞게 하는 정도였다. 담소하는 그 작은 손길이 사부의 거대한 후회보다 더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약방 뒤 우물에서는 작은 놋단추 하나가 더 나왔다. 새 화인의 날개와 같은 흠집이 있었고 안쪽에는 연비화가 떠난 뒤 세 번 무사하다는 신호를 남긴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첫 두 날짜는 한 달 간격이었지만 마지막 뒤로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묘련의 어머니가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는 흔적이었다. 연락이 끊긴 뒤에도 약방 문을 봉하지 않은 이유가 이제 보였다.
묘련은 놋단추를 가져가지 않고 종이에 본만 떴다. 연비화가 돌아오면 자기 물건을 어디에 둘지 직접 정하게 하겠다고 했다. 담소하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냈다는 이유로 소유권까지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마음에 새겼다.
산을 내려가는 길에 묘련이 앞서 말했다.
"연비화를 찾으면 왜 돌아왔는지 먼저 물을 거예요. 엄마가 시킨 대로가 아니라, 내가 궁금해서."
담소하는 대답 대신 보폭을 맞췄다. 사람의 선택을 듣기 전에는 그 사람을 구했다거나 이용했다고 이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약첩에 찍힌 새는 남궁의 감시가 아니라, 한 아이가 밖으로 날아가기 위해 남긴 방향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