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사무실은 커피 향과 복합기 예열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하는 자판기 앞에서 버튼을 두 번 눌렀다. 첫 번째는 잔액 부족, 두 번째는 블랙 대신 카페라떼. 종이컵을 받아 드는데, 지우가 뒤에서 등을 툭 쳤다.
"야, 카페라떼 마시면 오늘 하루 달콤할 줄 알아? 회의실 예약 바뀐 거 봤어?"
서하는 사내 메신저를 열었다. 평소 팀 회의가 잡히는 소회의실 B 대신, 8층 대회의실로 장소가 변경되어 있었다. 발신자는 보상기획팀 관리자 계정이었다.
"대회의실이요? 우리 팀 인원이 다섯인데."
지우가 자판기 옆에 기대며 종이컵을 흔들었다. "다섯이 쓰라고 잡은 게 아닌 거겠지. 위에서 누가 온다는 소리야." 장난기 섞인 말투였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서하가 자리로 돌아가자 도윤은 이미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 떠 있는 건 사내 소송관리 시스템이었고, '미지급 보험금 청구소송 — 건번 LT-2024-0387'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서하가 인사를 건네자 도윤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마우스를 클릭했다. 화면이 닫혔다.
"선배, 오늘 회의 대회의실로 바뀐 거 혹시…"
"알아. 앉아."
도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서하는 질문을 삼키고 의자에 앉았다. 모니터를 켜는 동안 수진이 복도에서 걸어오며 팀 단체 메신저에 올라온 공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장기보상수석 차진혁 — 3월 25일자 부임. 인사발령 게시판에 올라왔어. 전무 직속이래."
수진은 서하 옆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끝을 잘랐다. "도윤 씨, 이 사람 알아?" 도윤은 대답 대신 턱으로 시계를 가리켰다. 아홉 시 사십분. 회의까지 이십 분.
8층 대회의실은 형광등이 유난히 밝았다. 긴 테이블 끝에 프로젝터가 켜져 있었고, 화면에는 'LT-2024-0387 미지급 보험금 청구소송 개요'라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서하가 팀원들과 함께 자리를 잡을 때, 문이 열리며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마흔 후반, 회색 넥타이에 검은 정장. 표정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은 서하가 몇 번 복도에서 스친 적 있는 장기보상팀장 오승우였다. 승우는 회의실에 들어서며 도윤을 보고 짧게 웃었다. 도윤은 웃지 않았다.
차진혁은 인사 없이 자리에 앉았다. 프로젝터 리모컨을 누르지도 않고, 테이블 위에 종이 서류 한 뭉치를 올려놓았다.
"이 건은 피보험자 유족이 사망보험금 5억 원의 지급을 청구한 소송입니다. 회사는 고지의무 위반과 면책 사유를 근거로 지급을 거절했고, 1심에서 패소했습니다."
차진혁의 목소리는 감정이 빠져 있었다. 보고서를 읽는 것처럼 정확했고, 그래서 더 차가웠다.
"항소심이 4월 셋째 주에 잡혀 있습니다. 이번에도 지면 회사 손실은 보험금에 소송비용까지 합쳐 6억을 넘깁니다. 이 건을 맡을 팀이 이 팀이라고 들었는데—"
그가 처음으로 시선을 들어 도윤을 봤다.
"강 심사역, 현재 진행 중인 건 몇 건입니까."
도윤이 대답했다. "배당 기준 열네 건, 실질 관리 아홉 건입니다."
"아홉 건에 이걸 더하면 열. 인원 대비 효율이 하위권입니다. 알고 있겠죠."
회의실 공기가 바뀌었다. 지우가 볼펜을 돌리던 손을 멈췄다. 수진은 시선을 테이블 위 서류에 고정했다. 서하는 숨을 참았다.
차진혁이 서류 뭉치에서 한 장을 뽑아 테이블 중앙에 밀었다. "항소심 준비 일정표입니다. 핵심 쟁점은 피보험자의 기왕력 고지 여부, 그리고 보험 모집인의 설명의무 이행 기록. 1심 판결문을 보면 회사 측 증거가 허술합니다. 이번에는 증거를 새로 구성하든, 합의를 끌어내든 결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일어서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비효율적인 팀에 중요한 건을 맡기는 건 제 취향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건의 결과에 따라 하반기 조직 개편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알아두세요."
문이 닫혔다. 승우가 남아서 "잘 부탁합니다" 한마디를 건넸다. 도윤과 눈이 마주치자 승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나갔다. 서하는 승우가 문을 닫기 직전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것을 봤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회의실에 네 사람만 남았다. 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직 개편 방향이 달라진다? 이거 그냥 '못하면 팀 날린다' 소리 아냐?"
도윤이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하."
"네."
"이 건 소송 기록 전부 PDF로 정리해. 1심 판결문, 양측 준비서면, 증거목록. 오늘 안에."
서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원고 — 유족 대리인 이름 아래 피보험자란에 적힌 이름. 서하의 시선이 멈췄다. 피보험자의 주소지가 서하에게 익숙한 동네였다. 아버지가 사는 곳과 같은 구, 같은 동.
우연이었다. 그냥 우연이어야 했다. 하지만 서류를 넘기자 보험 모집인란에 적힌 이름 옆에 작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누군가 연필로 흐리게 적어둔 글씨 — '설명의무 녹취 미확인'.
서하는 고개를 들어 도윤을 봤다. 도윤도 같은 부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건 일초도 안 됐지만, 서하는 도윤의 눈에서 처음 보는 것을 읽어냈다. 경계가 아니라 무게. 이 건이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점심시간, 서하는 구내식당 대신 편의점 삼각김밥을 사서 계단 통에 앉았다. 입맛이 없었다. 핸드폰을 열자 은별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월요일인데 살아있어? 이번 주 금요일 저녁 비워둬. 내가 산다.'
서하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웃기 전에 메신저 상단에 뜬 알림을 봤다. 아버지와의 대화방. 여전히 마지막 메시지는 서하가 보낸 '아빠 밥 먹었어?'였고, 그 아래에 읽음 표시만 찍혀 있었다. 서하는 키보드를 열었다가 닫았다.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오후 내내 서하는 소송 기록을 정리했다. 1심 판결문은 38쪽이었다. 읽어 내려갈수록 복잡해졌다. 피보험자는 가입 당시 건강 상태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게 회사 측 주장이었고, 유족은 모집인이 중요 사항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법원은 유족 손을 들어줬다. 증거가 부족했다. 서하가 증거목록을 비교하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회사 측이 제출한 청약서 사본의 접수일자와, 시스템에 기록된 접수일자가 하루 어긋나 있었다.
하루. 겨우 하루. 하지만 서하는 민주 건에서 배운 게 있었다. 서류의 하루는 누군가의 서명이 오가는 시간이고, 그 시간 안에 빠지거나 바뀌는 것들이 있다는 걸.
서하는 도윤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접수일자 불일치 건 확인했습니다. 보고 올릴까요?'
답장은 삼십 초 만에 왔다. '내일 아침. 나한테 먼저.'
퇴근 시간이 넘어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졌다. 서하는 모니터를 끄기 전 마지막으로 소송 기록 첫 장을 다시 봤다. 피보험자 주소지, 익숙한 동 이름, 그리고 연필로 적힌 '설명의무 녹취 미확인'. 그 글씨가 누구의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서하의 손끝이 살짝 차가워진 건, 월요일의 형광등 탓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