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통행세 징수소에는 깃발이 없었다. 지붕 절반이 내려앉은 돌집과 마른 우물, 말 한 마리가 겨우 지날 오솔길만 안개 속에서 드러났다. 베른 대위는 병력을 세 겹으로 숨기지 않고 두 겹으로 벌렸다. 안쪽은 대화와 체포, 바깥쪽은 도주로와 민가 보호를 맡았다.
카일은 레오가 그린 지도를 품에 넣고 돌집 앞에 섰다. 약속 시간보다 해가 한 뼘 올랐을 때, 문 안에서 쇠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검은 망토를 벗은 그라스가 빈손을 보이며 걸어 나왔다.
그라스의 왼쪽 어깨에는 굳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북방에서 카일의 칼을 받고 후퇴했던 상처였다. 얼굴은 수척했지만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유언이 아니라 살아남아 계산을 이어 온 사람의 눈이었다.
"혼자 오라고 했을 텐데." 그라스가 말했다.
"그 조건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카일이 답했다. "말하려면 입회 아래 말하고, 가져온 것이 있으면 목록에 올린다. 당신은 여기서 자유롭게 떠나지 못한다."
그라스는 카일 뒤의 베른과 서기, 양쪽 언덕의 병사를 차례로 봤다. 비웃음은 짧았다. "노예였던 아이가 절차를 방패로 드는군."
"내가 노예였다는 사실과 당신을 구금할 근거는 별개다."
그라스는 돌집 안 탁자를 가리켰다. 탁자 위에는 세 권의 작은 장부와 검은 기수단 인장, 다크스의 봉인이 찍힌 명령서가 놓여 있었다. 베른은 물건에 손대지 않고 그라스에게 한 걸음 물러나게 했다. 서기가 위치를 그린 뒤 장갑 낀 기록관이 하나씩 봉투에 넣었다.
첫 장부는 운송 날짜와 수레 번호, 둘째는 경비 교대와 뇌물, 셋째는 이름 대신 낙인 부호가 적힌 거래표였다. 미라의 원장과 겹치는 번호가 있었지만 빠진 줄도 많았다. 그라스가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랐을 가능성을 누구도 숨기지 않았다.
"왜 가져왔지?" 베른이 물었다.
"다크스가 나를 없애려 하니까. 장부가 없으면 나는 그의 칼이고, 장부가 있으면 거래 상대가 된다."
그라스는 양심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다크스보다 먼저 협상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가르친 생존 규칙도 같은 계산에서 나왔다. 카일은 솔직함을 선의로 바꾸지 않았다.
레오는 바깥 지휘막에서 소리를 듣고 있었다. 베른은 그와 그라스가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다리우스에 관한 질문은 증거가 보존되고 구금이 끝난 뒤 별도 조사에서 다루기로 했다.
카일이 검은 기수단의 현재 인원을 묻자 그라스는 스물셋이라고 답했다. 다크스에게 충성하는 자가 열둘, 돈만 보고 붙은 자가 일곱, 도망치려는 자가 넷이었다. 그러나 그 숫자도 확인 전 진술일 뿐이었다. 베른은 각자의 위치와 무장, 민간인 여부를 나눠 말하게 했다.
그라스가 북쪽 창문을 한 번 보았다. 카일은 눈길을 따라가지 않고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창밖 새 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외곽 경계를 맡은 엘라가 종 대신 나무딱지를 세 번 부딪혔다. 접근 경고였다.
첫 화살은 그라스가 아니라 탁자 위 등잔을 향했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화살촉에 불붙은 천이 감겨 있었다. 카일은 등잔을 발로 차지 않고 두꺼운 모포로 덮었다. 기록관은 봉인한 장부를 돌상자 안으로 밀었고, 베른은 사람부터 낮은 벽 뒤로 이동시켰다.
돌집 뒤편에서 다크스의 부하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검은 기수단의 망토 대신 세관 경비 복장을 하고 있었다. 베른은 휘장을 보고 아군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미리 정한 암구호를 요구했다. 답이 없자 바깥 병력이 퇴로를 막았다.
그라스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향해 몸을 틀었다. 카일의 칼끝이 먼저 그의 손목 앞에 닿았다. "당신의 선택은 싸우는 게 아니다. 엎드려서 살아서 조사받는 거다."
"그렇게 하면 네가 나를 지켜 주나?"
"재판 전 죽임을 당하지 않게 지킨다. 죄를 없애 준다는 뜻은 아니다."
그라스는 잠시 카일을 보다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머리 뒤에 얹었다. 베른의 병사가 밧줄이 피부를 베지 않게 손목 보호대를 먼저 대고 결박했다. 그라스는 협조의 대가를 묻지 않았고, 카일도 현장에서 약속하지 않았다.
습격자 둘은 도망쳤고 여섯은 붙잡혔다. 한 명은 화살에 다쳤지만 치료를 받았다. 카일은 추격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바깥조가 이미 흔적을 맡았고, 그의 임무는 기록과 구금된 사람을 안전하게 성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돌상자를 확인하던 기록관이 세 번째 장부 표지 안쪽에서 얇은 종이를 찾아냈다. 다크스의 손으로 쓴 명령 목록이었다. 그라스 제거, 징수소 방화, 장부 회수. 그 아래에는 성 안 협조자 세 명의 직책이 있었다. 이름은 암호였지만 미라의 장부 날짜와 맞추면 좁힐 수 있었다.
"저 종이는 내가 넣지 않았다." 그라스가 말했다.
베른은 믿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발견 위치와 그의 주장을 함께 적었다. 누가 넣었는지는 종이 섬유와 접힘, 다른 장부와의 관계를 확인할 문제였다.
성으로 돌아가는 행렬에서 그라스는 가운데 수레에 탔다. 창살 없는 화물 수레가 아니라 경비가 동행하는 구금 마차였다. 기한과 아이들이 이용하는 길과 겹치지 않게 경로도 바꿨다. 가해자를 들여오는 장면 때문에 구조된 아이들이 다시 숨을 이유는 없었다.
성문 앞에서 레오가 멀리 서 있었다. 그라스는 그를 알아봤지만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베른이 접촉 금지 명령을 먼저 읽었다. 다리우스 관련 진술은 레오가 동의한 대리인과 서기가 있는 자리에서만 진행하기로 했다.
그라스는 지하 독방이 아니라 감시 가능한 조사실 옆 구금실에 들어갔다. 창문과 물, 치료 기록이 확인됐고, 장부 제공과 별개로 운송·살인·감금 혐의가 적혔다. 그의 협조가 처분에 어떻게 반영될지는 현장 지휘관이 정하지 않았다.
카일은 구금 인계서 마지막 줄을 읽었다. '대상자 그라스, 생존 상태로 인계. 북방 전투 후 후퇴 사실 확인. 자진 출석이 아니라 협상 장소에서 적법 구금.' 한 문장 안에서도 사실은 서로 자리를 빼앗지 않았다.
해가 질 때 엘라는 종탑 아래에서 습격자의 말발굽 자국을 정리했고, 미라는 장부 사본 세 부의 봉인을 확인했다. 레오는 다리우스의 낡은 칼끈을 책상 위에 놓고 조사 일정을 신청했다. 이안은 다크스 체포 영장을 청구할 근거 목록을 만들었다.
카일은 막사로 돌아가 기한에게 그라스가 살아서 구금됐다고 알렸다. 기한은 안도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한참 뒤 창턱의 돌을 들어 벽의 네 줄 옆에 짧은 점 하나를 찍었다.
"선은 아직 아니오." 소년이 말했다. "도망치지 못했다는 표시요."
카일은 그 차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라스가 붙잡힌 것은 끝이 아니었다. 다크스의 길, 사라진 이름, 다리우스의 죽음, 살아남은 아이들의 내일을 각각 밝혀야 했다. 다만 오늘은 죽었다는 잘못된 소문 대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 문 안에 있었다.
베른은 구금 첫날 밤부터 면담 기록을 두 벌로 남겼다. 하나는 그라스의 진술 원문, 다른 하나는 확인된 사실과 모순 목록이었다. 말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진술 신뢰가 올라가지 않게 했다.
그라스의 상처를 치료한 약사는 환자의 말과 치료 시각만 증언했다. 약사가 그를 숨겨 줬는지 강요받았는지는 별도 조사로 남았다. 카일은 도움을 준 모든 사람을 즉시 공범으로 부르지 않았다.
기한이 벽에 남긴 점은 조사 기록에 옮기지 않았다. 그 표시는 소년의 판단이었고 체포 성공을 장식하는 휘장이 아니었다. 카일은 공식 보고서에 구금 절차와 증거 수량만 적었다.
새벽, 그라스가 물을 요청했다는 보고가 왔다. 경비는 죄인의 요구라며 늦추지 않고 정해진 양을 줬다. 기본적인 처우를 지킨 일이 용서나 특혜로 기록되지 않았다. 책임을 묻는 절차가 가해자의 방식과 닮지 않게 하는 최소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