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전 열 시 반, 박미경은 처음 왔을 때와 같은 시간에 상담실 문을 열었다. 짙은 회색 가방도 같았지만 이번에는 두꺼운 투명 파일을 들고 있었다.
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름을 정확히 말했다. "박미경 님, 다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미경은 의자에 앉기 전에 물었다. "제가 지난번에 전부 정리하고 싶다고 했던 말, 어떻게 적어 두셨어요?"
현우는 수첩을 돌려 보여 주지 않고 당시 고객 교부용 상담 메모를 꺼냈다. '기존 계약 전반 정리 요청, 구체 범위 재확인 필요'라고 적혀 있었다.
"모르는 범위를 전부라고 채우지 않았습니다. 오늘 어떤 결과물을 원하시는지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박미경은 투명 파일을 열었다. 여러 회사의 계약 안내서와 최근 갱신 통지, 자동이체 내역이 섞여 있었다. 어떤 문서는 오래돼 현재 상태를 알 수 없었고, 어떤 문서는 한 장만 남아 있었다.
"새로 들겠다는 뜻이 아니었어요. 회사 게시판에는 정리를 잘한다고 돼 있었고, 저는 이 종이들이 무엇인지 한 번에 보고 싶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목록은 다섯 칸이었다. 계약 회사, 계약 상태, 납입·갱신 시기, 공식 사본 확인 여부, 본인이 다음에 물을 일. 보장이 좋다거나 부족하다는 평가는 아직 원하지 않았다.
"수익자나 가족 이름도 표에 넣을까요?" 현우가 물었다.
"제가 직접 확인해야 할 항목이라고만 써 주세요. 여기서 가족 이름을 다시 모으고 싶지는 않아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록이 자세할수록 좋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박미경이 필요한 판단 순서만 남겼다.
첫 계약은 공식 고객센터 사본으로 현재 유지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갱신 통지만 있고 원계약 사본이 없어 '문서 확인 필요'로 표시했다. 세 번째는 납입이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계약 상태는 별도 조회가 필요했다.
박미경이 물었다. "납입이 끝났으면 보장도 끝난 건가요?"
현우는 문서만 보고 답하지 않았다. "납입기간과 보장기간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자료에는 보장기간을 확인할 공식 사본이 없어 지금은 분리해 적겠습니다."
그는 확인된 것과 확인할 것을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색만으로 의미가 전달되지 않도록 각 칸에 글자도 넣었다.
박미경은 자동이체 내역을 한 장 꺼냈다. 계좌번호는 종이로 가렸다. 현우는 금액과 이체일만 보되 사본을 만들지 않았다. 납입 사실이 계약 상태 전체를 증명하지 않는다는 주석도 달았다.
"김정호 이사님이나 오진수 대리에게 제가 뭘 갖고 있는지 말하지 않는 거죠?"
"네. 소개 경로만 내부에 남고 상담 내용과 결과는 공유하지 않습니다. 원하시는 특정 내용이 있어도 범위를 서면으로 확인한 뒤에만 전달합니다."
박미경은 전달할 내용이 없다고 했다. 게시판을 보고 직접 선택해 왔으니 소개자가 결과까지 알 이유가 없었다.
현우는 첫 상담에서 들은 '칭찬은 아직 아니다'라는 말을 물어볼지 망설였다. 목적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질문인지 생각한 뒤 조심스럽게 꺼냈다.
"지난번에 다음에 와서 확인해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제가 평가나 시험을 받는 자리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박미경은 잠시 현우를 보다가 웃었다. "문서를 보고 꼼꼼한 사람인지 제가 확인하겠다는 뜻이었어요. 회사에서 누가 시킨 건 아닙니다. 말이 좀 딱딱했죠."
현우도 웃었지만 바로 기록하지 않았다. 박미경의 설명은 자신의 오해를 풀었을 뿐 보험 상담 정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두 시간 가까이 문서를 분류했다. 현우가 상품의 장단점을 설명하려 할 때마다 박미경은 먼저 목록을 끝내자고 했다. 그는 설명하고 싶은 충동을 목록 뒤로 미뤘다.
점심이 가까워지자 표가 완성됐다. 유지 확인 두 건, 공식 사본 필요 두 건, 상태 조회 필요 한 건. 갱신일은 확인된 문서에 있는 날짜만 적혔다.
"보험이 많다는 결론도 적지 마세요." 박미경이 말했다. "몇 개인지는 보이니까, 많은지 적은지는 제가 생각할게요."
현우는 표 하단에 넣으려던 '중복 점검 필요' 문구를 지웠다. 실제 보장 내용과 고객 목적을 보지 않고 개수만으로 중복을 단정할 수 없었다.
박미경은 다음 행동도 자신이 골랐다. 공식 사본 두 건은 각 회사 고객센터에 직접 요청하고, 상태 조회 한 건만 현우가 동석해 문의하기로 했다. 새 비교안은 만들지 않았다.
"이걸로 계약 상담이 끝난 건가요?" 그가 물었다.
"오늘 요청하신 정리 작업은 끝났습니다. 조회 결과가 오면 목록을 한 번 갱신하고, 추가 제안은 박미경 님이 원하실 때만 시작하겠습니다."
현우는 문서 교부 목록을 읽었다. 기존 계약 정리표, 확인 한계, 다음 문의 목록. 상품 설계안이나 가입신청서는 없었다.
박미경은 각 장의 페이지 수를 확인하고 수령란에 서명했다. 그 서명은 새 계약 동의가 아니라 자신이 요청한 정리 자료를 받았다는 확인이었다.
상담실을 나가기 전 그는 말했다. "이번에는 칭찬해도 되겠네요. 모르는 걸 빈칸으로 둔 게 제일 좋았어요."
현우는 고맙다고 답했지만 실적 메모에 칭찬을 옮기지 않았다. 고객 만족 문구를 홍보에 쓰는 동의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아라는 박미경이 나간 뒤 물었다. "계약은?"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기존 문서 목록과 확인 절차만 마쳤어요."
"소개자한테 보고할 건?"
"없습니다."
아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박미경 파일을 '정리표 교부 완료, 공식 조회 한 건 대기, 신규 제안 요청 없음'으로 바꿨다.
오후에 오진수에게서 동료 상담이 어땠냐는 문자가 왔다. 현우는 개별 결과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새 기준과, 문의가 있으면 본인 상담 범위만 연락해 달라는 문장으로 답했다.
다음 날 공식 상태 조회 한 건의 회신이 도착했다. 현우는 기존 계약 목록 원본에 바로 덧쓰지 않고 조회 시각과 회신 출처가 있는 새 버전을 만들었다. 박미경은 전화로 계약 회사와 상태, 다음 갱신일을 한 줄씩 다시 읽어 확인했다.
"이제 표가 끝난 겁니까?" 박미경이 물었다.
"요청하신 목록은 이번 회신까지 반영됐습니다. 보장 내용의 충분함이나 새 제안은 검토하지 않았고, 공식 사본이 없는 두 건은 확인 한계 표시가 남아 있습니다."
박미경은 그 상태로 받겠다고 했다. 현우는 갱신된 파일의 페이지 수와 기준일을 알려 주고 이전 버전에는 교체 표지를 붙였다. 옛 문서를 없애지 않았지만 상담자가 최신 상태를 감으로 고르지 않게 했다.
교부 링크의 접근 기록과 전달 실패 여부를 확인한 뒤 현우는 한 차례 안내 일정을 닫았다. 박미경에게 상품 알림이나 소개 감사 문자는 붙지 않았고, 오진수에게도 상태 변화가 돌아가지 않았다. 정리표의 완성은 다른 상담을 여는 신호가 아니었다.
박미경의 이름은 소개 실적표에 한 건으로 남아 있었지만 계약 수는 늘지 않았다. 현우는 그 칸을 실패로 고치지 않았다. 요청한 일을 끝낸 기록과 판매 결과는 다른 표에 있어야 했다.
저녁 무렵 그는 '전부 정리'라는 첫 메모 옆에 다섯 칸짜리 목록 번호를 적었다. 전부라는 말은 모든 답을 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아직 확인해야 하는지 한눈에 보고 싶다는 요구였다.
투명 파일이 사라진 상담실 테이블에는 빈 물컵 두 개만 남았다. 현우는 의자를 밀어 넣고 목록 사본을 잠금 서류함에 넣었다. 고객이 가져간 것은 답안지가 아니라, 다음 질문을 자기 순서로 고를 수 있는 지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