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중개인은 골목 끝 점포의 셔터를 올리며 “이 가격은 오늘 아니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보증금은 강민주가 마련할 수 있는 범위였고, 월세는 지금보다도 조금 낮았다. 버스 정류장과 시장이 가까워 단골들도 찾아오기 쉬워 보였다.
민주는 빈 바닥의 크기부터 셌다. 세탁기 세 대와 건조기, 다림질대가 모두 들어가고도 접수대 자리가 남았다. 준수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며 이제 운이 풀린 것 같다고 말했다. 중개인은 계약금 액수를 종이에 적어 밀었다.
예전의 민주라면 가격을 먼저 붙들었을 것이다. 전기와 배수는 기계를 들인 뒤 어떻게든 고치고, 부족한 돈은 밤을 더 써서 메웠을 것이다. 그는 계약서를 받기 전에 점검 질문지를 꺼냈다.
“세탁 장비를 놓을 전기용량 확인서가 있나요? 배수관 지름과 역류 방지 상태, 뒤쪽 피난로 사용 권한도 보고 싶습니다.”
중개인은 건물주가 다 된다고 했다며 웃었다. 벽에는 큰 콘센트가 있었고 바닥에도 배수구가 두 개 보였다. 민주는 보이는 구멍과 사용할 수 있다는 확인이 다르다고 말했다. 업종과 장비 목록을 건물주에게 보내 서면 답을 받기로 했다.
전기기사는 다음 날 분전반을 열어 봤다. 점포 계약 용량은 조명과 소형 냉장고 정도를 기준으로 돼 있었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함께 돌리려면 증설 검토가 필요했다. 공용 인입 용량까지 확인해야 해 점포 안 공사만으로 끝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중개인은 기계를 번갈아 돌리면 된다고 했다. 민주는 하루 물량과 건조 시간을 계산했다. 번갈아 돌리면 영업시간 안에 끝나지 않았고, 늦은 밤까지 기계를 켜야 했다. 싼 월세가 다시 자기와 준수의 밤을 비용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배관 업체는 바닥 배수구 하나가 오래 막힌 채 장식 덮개만 놓여 있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뒤편 식당과 같은 좁은 관으로 이어졌다. 사용은 가능할 수 있지만 배출량 시험과 건물주 동의, 역류 방지 공사가 필요했다. 비용 부담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준수가 뒤문을 열자 좁은 통로에 냉장고와 상자가 쌓여 있었다. 건물주는 치울 수 있다고 했지만 통로 일부는 옆 점포 전용 공간이라는 말도 나왔다. 피난로로 인정되는지, 영업 중 항상 열 수 있는지는 도면과 임대 범위를 확인해야 했다.
“이것저것 따지면 싼 가게는 없어요.” 중개인의 목소리가 굳었다. “전에 장사하던 사람도 문제없이 썼습니다.”
민주는 전 세입자의 경험을 무시하지 않았다. 다만 그 가게는 의류 판매점이었고 세탁 장비를 쓰지 않았다. 같은 점포라도 업종과 기계가 달라지면 안전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고 답했다. 중개인에게 불리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지 않고 확인할 사항만 남겼다.
건물주는 전기 증설비 일부를 부담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대신 삼 년 계약과 높은 원상회복 의무를 넣고 싶어 했다. 배수와 통로 문제는 세입자가 알아서 처리한다는 문장도 있었다. 민주는 월세 한 줄만 보던 계산표에 공사비와 책임, 퇴거 비용을 더했다.
첫해 총비용은 다른 후보 점포보다 낮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용 전기용량과 피난 통로가 확인되지 않았다. 확인 뒤 계약할 수 있느냐고 묻자 건물주는 다른 임차 희망자가 있어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준수는 계약금을 걸어 두고 점검하면 어떠냐고 했다. 돌려받는 조건을 쓰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민주는 특약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위험과, 계약부터 해야만 협상할 수 있게 되는 압박을 구분했다. 지금은 돈을 먼저 묶지 않는 선택이 필요했다.
그는 중개인 앞에서 계약서를 덮었다. “가격은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 장비를 안전하게 쓸 수 있다는 확인이 없고, 배수와 피난 책임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계약하지 않겠습니다.”
중개인은 이 기회를 놓치면 더 비싼 곳밖에 없다고 했다. 민주의 손은 잠깐 계약금 봉투를 붙들었다. 옛 가게의 협의 기간은 줄고 있었고, 보증금 반환안도 아직 최종 확정 전이었다. 싸고 빠른 답은 정말 필요했다.
그는 봉투를 가방 안쪽에 넣었다. “비싼 곳을 고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확인 가능한 곳을 더 찾겠다는 뜻입니다.” 준수는 아쉬운 얼굴로 셔터가 내려가는 것을 봤지만 어머니를 설득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비가 조금 내렸다. 민주는 예전 세탁소 첫 계약 때 배수구를 보지도 않았던 일을 말했다. 준수는 그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했다. 민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나를 탓하는 건 아니야. 지금 선택지가 있는데도 같은 방식으로 고를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그날 저녁 첫 점포 건물주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계약금을 낮추고 전기 증설은 나중에 협의하자는 제안이었다. 민주는 가격이 달라져도 확인되지 않은 항목은 그대로라고 답했다. 압박이 약해졌다고 위험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는 옛 단골 세 명에게 후보 지역의 이동 편의를 물었다. 가게를 따라오겠다는 약속을 받으려는 설문이 아니라 버스 노선과 주차, 계단 접근을 확인하려는 질문이었다. 한 사람은 가까운 첫 점포보다 시장 반대편의 평평한 출입구가 더 편하다고 했다. 지도 거리만으로 손님 동선을 판단할 수 없었다.
세 번째 후보 주변 상인들에게는 배수 냄새나 정전 경험, 공용 통로 관리 방식을 물었다. 대답은 제각각이었고 공식 기록을 대신하지 않았다. 민주는 주민 말은 생활 관찰로, 검사 자료는 설비 확인으로 나눠 표에 붙였다.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은 임대인에게 추가 질문으로 보냈다.
자금 상담에서는 보증금 대출 가능 범위와 상환일을 확인했다. 상담자는 승인 여부가 심사 뒤 정해진다고 했다. 민주는 최대 가능액을 확정 자금처럼 쓰지 않고, 대출이 안 될 때 보증금 분할이나 더 작은 점포를 선택하는 두 번째 계획을 만들었다.
준수는 첫 점포를 놓친 아쉬움이 이제 조금 줄었다고 했다. 민주도 싸다는 숫자를 볼 때마다 여전히 마음이 흔들린다고 인정했다. 성장했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 다시 펼칠 질문과 자료가 생긴 것이었다.
두 번째 후보는 월세가 높았지만 전기 증설 가능 확인과 단독 배수관 도면이 있었다. 다만 계단 하나가 턱으로 남아 손님 접근이 불편했다. 민주는 바로 좋다고 하지 않고 개선 비용과 건물주 부담, 계약 종료 때 원상회복을 물었다.
세 번째 후보는 시장 반대편이라 단골 이동이 걱정됐지만, 전기·배수·소방 점검 기록이 공개돼 있었고 앞뒤 출입구가 분명했다. 임대인은 장비 설치 전 공동 확인을 계약 특약에 넣는 데 동의했다. 보증금은 첫 점포보다 높아 자금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다.
민주는 세 후보를 월세 순으로 세우지 않았다. 안전 확인 완료, 필요한 공사와 부담 주체, 총비용, 손님 접근, 계약 해지 조건을 같은 표에 올렸다. 받을지 모르는 지원이나 옛 건물 정산금은 확인된 금액만 넣었다.
일주일 뒤 그는 세 번째 후보를 우선 협상 대상으로 정했다. 계약 전 전기 부하 시험과 배수 시험, 피난로 확인, 장비 배치 도면을 통과하고 보증금 반환 일정이 맞을 때만 최종 서명하기로 했다. 임대인은 그 조건을 특약 초안에 넣었다.
준수는 왜 가장 싼 곳을 포기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는 “포기한 게 아니라 우리 밤을 가격표에서 뺀 거야”라고 답했다. 새 주소를 고르는 첫 결정은 간판 색도, 월세 숫자도 아니었다. 불을 켰을 때 누군가의 무리와 운으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자리인지 확인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