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에서 현우는 핸드폰을 일곱 번 확인했다. 메일함에는 광고와 사내 공지만 쌓여 있었다. 김정호 씨에게 보낸 정리 메일은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문을 닫듯 화면을 끄고 가방 안에 밀어넣었는데, 역 하나를 지나기도 전에 다시 꺼내 들었다. 읽음 없음. 현우는 숨을 내쉬며 이어폰 줄을 만지작거렸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탕비실 쪽에서 커피 내리는 소리가 났다. 신입 동기 민재가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나오다 현우를 보더니 눈짓을 했다. "형, 서아라 선임 오늘 아침부터 상담실에 있어." 민재는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뭐 물어보려고 한 건데, 분위기가 좀… 냉장고야." 현우는 민재의 종이컵에서 올라오는 김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엎지른 커피 자국이 떠올라서 종이컵을 건네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데 메신저 알림이 떴다. 서아라. '현우 씨, 10시에 2번 상담실. 어제 메모 가져와.' 마침표까지 정확한 문장이었다. 현우는 키보드 위에 올린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네, 알겠습니다'를 쳤다. 느낌표를 넣을까 말까 2초쯤 고민하다 그냥 마침표로 보냈다.
2번 상담실 문을 열었을 때, 아라는 이미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A4 한 장이 놓여 있었고, 거기에 현우가 어제 적은 상담 메모의 내용이 아라의 글씨로 다시 정리되어 있었다. 현우가 메모를 쓸 때 급하게 줄여 쓴 부분까지 원문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아라가 직접 물어봤을 리 없으니 현우의 메모를 들여다본 것이다. 현우는 의자를 빼며 입을 열었다. "저, 어제 상담은 제가 좀 부족—" 아라가 손을 들어 말을 잘랐다.
"부족했다는 건 나중에 하고." 아라는 A4 용지의 첫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네가 김정호 씨한테 처음 꺼낸 말. '혹시 건강 쪽 걱정되시는 부분 있으세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질문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아라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 질문, 왜 했어?" 현우는 잠깐 멈칫했다. "그게… 기본이니까요. 건강 상태 파악이 먼저라고 교육에서도—" "교육이 시킨 거야, 네가 궁금한 거야?" 아라의 목소리에는 비난이 없었다. 그래서 더 찔렸다.
현우는 대답 대신 볼펜 뚜껑을 눌렀다 뗐다 반복했다. 딸깍. 딸깍. 아라는 기다렸다. 상담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5초쯤 지났을 때 현우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교육 순서대로 한 거 맞습니다." 아라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A4의 두 번째 줄로 넘어갔다.
"김정호 씨가 '글쎄요'라고 했을 때, 네가 바로 보장 내용 설명으로 넘어갔어." 아라는 현우의 메모에서 해당 부분을 가리켰다. 현우도 기억했다. 김정호 씨의 '글쎄요'가 생각보다 길었다는 것. 그 '글쎄요' 뒤에 뭔가 더 이어질 것 같았는데, 침묵이 무서워서 자기가 먼저 다음 슬라이드를 넘긴 것. "사람이 '글쎄요'라고 하면 대부분은 거절이 아니야." 아라가 말했다. "생각 중인 거야. 근데 너는 그 틈을 못 참았어." 현우의 볼펜 딸깍이 멈췄다.
아라는 세 번째, 네 번째 줄도 차례로 짚었다. 커피를 엎지른 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현우가 당황한 뒤 급히 쏟아낸 보장 항목 나열을 빨간 밑줄로 표시해뒀다. "이 부분, 네가 1분 안에 여섯 개 보장을 말했더라." 현우는 머리를 긁으며 낮게 웃었다. "좀 빨랐죠?" "빨랐다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따라올 수 없었어." 아라의 어조는 여전히 담백했지만, 그 담백함이 오히려 현우의 가슴 한가운데를 눌렀다.
"선임님."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는 어제… 상담을 한 게 아니라 혼자 발표를 한 건가요?" 아라는 잠깐 현우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A4로 돌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현우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형광등 불빛이 눈에 시렸다.
침묵이 흐른 뒤, 아라가 A4를 뒤집었다. 뒷면은 비어 있었다. "김정호 씨한테 네가 보낸 메일, 봤어?"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답장은 아직이에요." "안 올 수도 있어." 아라가 말했다. 현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라는 덧붙이지 않았다. 그 한 마디가 사무실 전체의 공기를 바꾸는 것 같았다. 현우는 입술을 다물고 볼펜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A4를 현우 앞에 밀어놓았다. "이거 가지고 있어. 다음 상담 전에 다시 읽어." 문에 손을 대기 직전, 아라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현우 씨, 네가 어제 엎지른 건 커피가 아니야." 현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문은 닫히고 있었다. 복도에서 아라의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현우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빈 A4 뒷면을 내려다봤다. 하얀 종이 위에 아무 글자도 없었는데, 그게 오히려 어제의 상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현우는 구내식당 대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들고 계단 통로에 앉았다. 입맛이 없었다. 아라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엎지른 건 커피가 아니야.' 그러면 뭘 엎지른 건가. 현우는 김밥 포장을 뜯다가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메일함. 읽음 없음. 다시 넣었다. 삼각김밥의 김이 손가락에 눅눅하게 달라붙었다.
오후 내내 현우는 아라가 남긴 A4를 펼쳤다 접었다 했다. 옆자리 민재가 "그거 무슨 시험지야?" 하고 웃었지만 현우는 웃지 못했다. 세 번째로 읽을 때쯤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아라가 빨간 밑줄을 긋지 않은 부분. 현우가 김정호 씨에게 "가족분들은 건강하시죠?"라고 물었을 때 김정호 씨가 0.5초쯤 말을 멈추고 "네"라고 대답한 순간. 현우 본인의 메모에는 '정상 응답'이라고 적어뒀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0.5초의 망설임을 '정상'이라고 쓴 건 자기 자신이었다. 김정호 씨는 정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퇴근 30분 전,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일 알림. 발신자: 김정호. 현우의 심장이 가슴에서 목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열었다. 제목은 '지난번 상담 건으로'였다. 본문은 짧았다. '도현우 설계사님, 보내주신 정리 자료 잘 받았습니다. 저 사실은 보험보다 여쭤보고 싶은 게 따로 있었는데, 지난번에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시간 되시면 다시 한번 뵐 수 있을까요.' 현우는 메일을 두 번 읽었다. 세 번째 읽을 때 비로소 한 문장이 가슴에 걸렸다. '보험보다 여쭤보고 싶은 게 따로 있었는데.' 현우는 고개를 들어 사무실 저편에 앉아 있는 아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라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현우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볼펜 뚜껑을 누르는 대신, 메일의 답장란에 커서를 올려놓고 타이핑하지 않은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쓸지보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