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아침, 현우는 출근길 편의점 앞에서 삼각김밥 포장을 뜯다 말고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화면 맨 위에는 어젯밤 세 시까지 고쳐 쓴 문장이 떠 있었다.
'질문 먼저. 설명 나중.'
그 아래로 김정호 씨에게 물어볼 질문 일곱 개가 번호를 달고 줄지어 있었다. 1번은 가장 공들인 문장이었다.
'지난번에 따로 여쭤보고 싶다고 하신 부분이 어떤 쪽인지 먼저 듣고 싶습니다.'
현우는 그 문장을 입술로 한 번 따라 읽었다. 문장 자체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 말을 꺼내는 자기 목소리가 또 흔들릴까 봐 겁난다는 점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박 팀장이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다. 월간 실적 집계 그래프가 빨간 마커로 그려져 있었고, 현우 이름 옆 칸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박 팀장은 아무 말 없이 현우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보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눈길이 등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옆자리의 재윤이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야, 이번 주 안에 하나도 안 올리면 면담이래."
현우는 손에 쥔 김밥 봉지를 구기며 대답했다.
"알아. 오늘 잡힐 수도 있어."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상담을 앞두고 있는데,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뭔가를 잡으러 가는 것처럼 들렸다. 재윤은 별말 없이 어깨만 으쓱했지만, 현우는 자기 말이 하루 종일 귀에 남았다.
오후 두 시가 가까워지자 현우는 상담실 앞 복도에서 심호흡을 세 번 했다. 다시 메모장을 열어 첫 줄을 확인했다.
'질문 먼저. 설명 나중.'
주문처럼 속으로 되뇌고 문을 밀었다. 김정호 씨는 이미 와 있었다. 지난번보다 얇은 재킷 차림이었고, 테이블 위에는 종이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현우가 인사를 건네자 김정호 씨가 먼저 웃었다.
"이번엔 커피 안 엎으실 거죠?"
현우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따라 웃었다.
"그건 확실히 보장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스스로도 아차 싶었다. 하필 이런 자리에서 또 '보장'이라는 단어였다. 김정호 씨는 가볍게 웃었지만, 현우는 앉기도 전에 어깨가 더 굳었다.
자리에 앉은 현우는 메모장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1번 질문을 꺼낼 타이밍을 찾았다. 그런데 먼저 입을 연 건 김정호 씨였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자료 잘 봤어요. 보장 범위가 넓더라고요."
그 한마디가 현우의 머릿속 스위치를 눌렀다. 자료를 봤다. 보장 범위를 확인했다. 관심이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잘만 이어 가면 된다. 방금 전까지 붙들고 있던 질문 리스트는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고, 대신 자료에 적어 둔 항목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그 상품이 괜찮은 이유가 입원 일당 쪽 폭이 넓고요. 수술비 항목도 1종, 2종으로 나뉘는데 2종 같은 경우에는…"
현우의 입이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 속도가 붙자 멈추기가 어려웠다. 김정호 씨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자 현우는 그걸 이해와 동의의 신호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 밀어붙였다. 진단비 특약의 범위, 납입 기간에 따른 보험료 차이, 갱신형과 비갱신형의 구조적 차이까지 거의 쉬지 않고 설명했다.
중간에 김정호 씨가 종이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현우는 그 동작마저 경청의 표시라고 믿었다.
"그래서 정리하면요, 지금 나이대에 가입하시면 비갱신형 기준으로 월 납입액도 꽤 합리적으로 나오거든요. 제가 시뮬레이션도 하나 돌려봤는데—"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돌리던 순간, 현우는 그제야 김정호 씨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참 전에 사라졌는데 현우만 이제야 알아차린 얼굴이었다. 김정호 씨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종이컵 가장자리를 엄지로 천천히 누르고 있었다. 끄덕임은 이미 멈춰 있었고, 시선은 태블릿이 아니라 테이블 한가운데의 빈 곳에 가 있었다.
현우의 말이 허공에서 뚝 끊겼다. 상담실에는 에어컨 바람 소리만 남았다. 몇 초 되지 않는 정적이었지만, 현우에게는 그 짧은 틈이 길고 선명했다.
아, 또 놓쳤다.
이번에는 커피가 아니라 사람의 표정을.
"저기, 도 설계사님."
김정호 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료 잘 정리해 주신 건 감사한데요."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제가 지난번 메일에서 따로 여쭤보고 싶다고 한 건, 사실 이런 보장 내용 말고…"
거기서 말이 끊겼다. 김정호 씨는 종이컵을 내려놓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현우는 '말고' 뒤에 남은 공백이 얼마나 큰지 그제야 실감했다. 지금이라도 물어야 했다. 무엇이 궁금하신지, 어떤 상황인지, 어디서부터 설명이 필요한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입이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물으면 상담이 더 어색해질 것 같았고, 머뭇거리면 더 늦을 것 같았다. 그 짧은 사이, 아침에 본 화이트보드의 빈칸이 번쩍 떠올랐다. 실적 압박이 목을 죄는 순간, 현우는 또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을 놓쳤다.
그때 현우는 선택해야 했다. 다시 설명으로 덮을지, 아니면 어색함을 감수하고 멈출지.
현우는 마른침을 삼키고 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어떤 부분이 궁금하셨는지 제가 먼저 들어도 될까요?"
늦었지만, 이번에는 설명 대신 질문을 꺼내 보려 했다. 그러나 타이밍은 이미 한 박자 지나 있었다. 김정호 씨는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이 좀."
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상담 초반의 농담 섞인 미소와는 전혀 달랐다. 지금의 미소에는 문을 닫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현우도 급히 일어섰다.
"다음에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김정호 씨는 "네, 네" 하고 두 번 고개를 끄덕인 뒤 상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현우 무릎 위에 올려 둔 메모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화면에는 아직도 1번 질문이 그대로 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복도는 올 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현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태블릿을 덮었다. 재윤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현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아직."
그 말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끝난 건 아닌데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놓친 건 분명한데, 정확히 무엇을 어디서부터 놓쳤는지 정리되지 않았다. 아침에 자신이 내뱉은 '잡힐 수도 있어'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사람을 만나러 간 자리에, 자기는 끝까지 실적만 들고 들어갔던 것 같았다.
한 시간쯤 뒤,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김정호 씨에게서 온 문자였다.
'도 설계사님, 오늘 설명 감사했습니다. 다만 제가 여쭤보려 했던 건 보장 내용이 아니라 좀 다른 쪽이었어요. 아내가 최근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와서, 이런 경우에 보험이 어떻게 되는 건지 단순한 궁금증이 있었거든요. 상품 권유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제가 말을 잘 못 꺼낸 것도 있으니 오해는 마세요.'
현우는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세 번째 읽을 때쯤 손끝이 서늘해졌다. 김정호 씨는 가입을 서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의 건강이 걱정돼서,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조차 몰라 조심스럽게 묻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현우는 그 앞에서 보장 범위와 납입 시뮬레이션을 펼쳐 놓고 발표를 했다. 위가 쓰렸다. 편의점 삼각김밥 때문은 아니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고 사무실이 하나둘 비어도 현우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김정호 씨의 문자가 열려 있었다. 그때 서아라 선임이 가방을 메고 지나가다 화면을 힐끗 보았다. 아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답장은 오늘 하지 마."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왜요?"
묻는 사이에도 아라는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한 번 들어 보였고, 곧 문이 닫혔다. 사무실에는 형광등이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현우의 얕은 숨만 남았다. 도와주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은 섣불리 끼어들지 않는 쪽을 택한 거라는 걸 현우도 어렴풋이 알았다. 그게 더 불편해서 문제였다.
현우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당장이라도 답장을 쓰고 싶었다. 죄송하다고, 다음에는 제대로 듣겠다고,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하지만 아라의 말이 손을 붙잡았다. 지금 보내면 또 자기 말이 먼저 도착할 것이다. 사과조차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기 전에 쏟아내면, 그것도 결국 자기 편한 쪽으로 서두르는 일일지 몰랐다.
그 생각이 들자 답답함이 조금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민망함과 조급함만 있던 자리에, 늦게나마 부끄러움이 정확한 모양으로 들어왔다.
현우는 메모장을 다시 열었다.
'질문 먼저. 설명 나중.'
그 아래 새 줄에 천천히 적었다.
'답장도 나중.'
손가락이 느렸지만,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형광등 하나가 천장 위에서 한 번 깜빡였다. 현우는 가방을 챙기다 말고 상담실 쪽을 돌아보았다. 김정호 씨가 앉았던 자리에 종이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반쯤 남은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현우는 컵을 집어 들다가 손을 멈췄다. 김정호 씨가 종이컵 가장자리를 엄지로 누르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그건 경청의 제스처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는 사람의 손이었다.
건물을 나서자 삼월 바람이 차게 불었다. 현우는 내일 아라에게 물어볼 말을 정리했다. 답장을 언제 보내야 하는지, 다시 연락한다면 어떤 첫 문장으로 시작해야 하는지. 그런데 그보다 먼저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아라는 왜 그렇게 정확하게, 오늘은 말하지 말아야 할 타이밍을 알고 있었을까.
마치 예전에 누군가에게 같은 방식으로 늦어 본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