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 시 십 분, 서버실에서 돌아온 윤해진은 회의실 벽에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붙였다. 왼쪽 위에는 ‘현재, 2019년 3월’이라고 썼고 오른쪽에는 ‘원래 생, 약 칠 년 뒤’라고 적었다. 한이겸은 J.K. 출입 기록을 꺼내려다가 손을 멈췄다. 해진이 먼저 닫으려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민가온이 서버 백업의 생성 시각을 읽었다. 설계 초안 파일은 현재보다 넉 달 전 처음 만들어졌고, 사흘 전 PY-03-K 부속표가 덧붙었다. 파일 시스템의 생성 기록과 수정 기록은 보존 장치 두 곳에서 일치했다. 오늘 갑자기 과거 날짜를 입힌 문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부장님은 이 종이를 죽기 넉 달 전 문서라고 했어요.”
해진은 이겸의 수첩을 펼치지 않았다. 대신 이겸이 팀에 공유한 기억 정리표의 문장만 가리켰다. ‘작성 시점, 사망 넉 달 전.’ 그 아래에는 ‘최덕선 확인, 사망 석 달 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현재와 원래 생을 한 줄에 포갠 탓에, 2019년에 칠 년 뒤 종이가 나타난 것처럼 읽혔다.
서다온은 두 문서의 머리글을 확대했다. 현재의 것은 ‘구조 설계 초안’이었고, 이겸이 원래 생에서 움켜쥐었던 것은 여러 해 운용 뒤 거래가 채워진 ‘최종 정산 장부’였다. 형식과 코드 배열이 닮았지만 같은 물건이 아니었다. 초안 끝의 장기 운용 기준 연도는 작성일이 아니라 만기 참고값이었다.
해진은 문서 두 개를 A와 B로 부르자고 했다. A는 지금 서버에 남은 초안, B는 이겸의 기억에만 있는 최종 장부였다. A의 진짜 생성일은 서버와 외부 백업이 입증했다. B의 작성 과정과 발견일은 현재 누구도 입증할 수 없었다. 닮은 서식만으로 A를 B의 과거 모습이라고 확정하는 것도 보류했다.
“A에 적힌 장기 기준을 B의 작성일로 읽은 거죠?” 다온이 물었다.
이겸은 당시 문장을 다시 확인했다. 표 아래 작은 숫자를 보는 순간 죽기 전 손에 든 장부의 날짜가 떠올랐고, 그는 둘을 대조하지 않은 채 같은 시점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회귀 뒤 생긴 문서가 미래에서 넘어온 것이 아니라, 미래에 쓰일 구조가 이미 현재에 초안으로 존재했던 것이었다.
가온은 파일 안의 빈 거래 칸도 보여 줬다. 현재 초안에는 계좌 형식과 배분 공식만 있었고 실제 거래 상대와 지급액은 비어 있었다. 이겸이 기억하는 최종 장부에는 그 빈칸이 여러 해의 거래로 채워져 있었다. 내용의 차이가 두 문서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현재 증거였다.
해진은 연표 오른쪽에 괄호를 그렸다. 원래 생 마지막 넉 달 전체를 묶고, 첫 한 달 끝에 최덕선 확인 표시를 넣었다. 그 지점부터 죽음까지의 석 달을 다른 색으로 칠했다. 서로 충돌하던 두 기간이 포함 관계로 놓이자 다온은 각 문장 옆에 근거 수준을 적었다.
이겸은 오래 침묵했다. 죽던 밤의 바닥은 기억할 때마다 현재보다 선명했다. 손바닥을 적신 피, 장부 모서리, 멀어지던 구두 소리. 그는 그 감각이 너무 확실해서 감각에 붙은 날짜까지 사실이라고 믿었다.
“내가 두 시계를 겹쳐 읽었습니다.”
말을 꺼내자 목 안이 마른 종이처럼 붙었다. 이겸은 왼쪽 종이 아래에 직접 썼다. 현재보다 넉 달 전, 초안 생성. 사흘 전, 부속표 전송. 그리고 오른쪽 종이에는 원래 생의 마지막 구간을 적었다. 최종 장부의 구조가 완성된 때부터 죽음까지 넉 달, 그 구간이 시작된 뒤 한 달 만에 최덕선의 이름을 확인, 이어진 추적은 석 달.
“칠 년 뒤에 나타난 건 거래가 채워진 최종 장부였어요. 지금 있는 건 그 구조의 초기 틀입니다. 최덕선을 쫓은 석 달은 마지막 넉 달과 모순되지 않아요. 한 달 늦게 이름을 잡았으니까.”
가온이 두 연표 사이에 굵은 세로선을 그었다. “그러면 현재 문서로 입증할 수 있는 건 현재의 생성·수정·전송뿐이에요. 칠 년 뒤 기억은 조회 순서를 정하는 단서일 뿐이고요.”
“맞아요.” 이겸은 대답했다. “그 선을 내가 지웠습니다.”
해진은 그제야 의자를 끌어 앉았다. “왜 지웠는지도 말해 주세요. 날짜 하나 틀린 문제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부장님이 먼저 안다고 생각한 것과 원본이 말하는 걸 계속 구분해야 해요.”
이겸은 2019년 3월 4일 오전 11시 22분에 눈을 떴던 순간부터 말했다. 칠 년 뒤 장부를 들고 죽었다는 것, 그 직전 석 달 동안 최덕선을 쫓았다는 것, 장승민의 구두를 보았다는 것. 설명하면서도 자신이 믿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지, 단지 고백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온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가온도 웃지 않았다. 해진만 두 장의 연표를 오래 보다가 물었다. “그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는 데 동의해요?”
“동의합니다.”
“맞더라도 원본을 대신할 수 없다는 데도요?”
“그것도 동의해요.”
해진은 검은 펜으로 기억 정리표 위에 ‘단서 전용, 입증 자료 아님’이라는 붉은 도장을 찍었다. 이겸에게서 수첩을 빼앗지 않았고, 없애라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기억에서 나온 이름은 독립된 자료 두 개가 확인하기 전까지 조사 결론 칸에 옮기지 않는다는 규칙을 적었다.
그때 가온의 노트북에서 경고음이 났다. 서버실 J.K. 자격으로 원격 접속을 시도한 흔적이었다. 접속은 아직 열리지 않았지만 인증 요청이 연속으로 쌓였다. 누군가 팀이 로그를 본 사실을 알고 접근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겸의 몸이 먼저 문 쪽으로 움직였다. 혼자 서버실로 내려가 접속자를 잡겠다는 오래된 습관이었다. 해진이 그의 소매를 붙들지는 않았다. 대신 벽의 두 시계를 가리켰다.
“지금 증거로 할 수 있는 일을 같이 정해요.”
가온은 IT보안 당직자에게 보존 요청 번호를 읽어 주고 원격 세션을 읽기 전용 격리망으로 돌려 달라고 했다. 다온은 감사위원회 담당자에게 통화 사실을 기록하는 조건으로 긴급 보존 범위를 확인했다. 해진은 회의실 화면을 녹화하는 대신 시스템이 만든 접속 사건 번호와 시각을 받아 적었다. 이겸은 문을 열지 않고 그 세 사람의 말을 들었다.
십이 분 뒤 인증 시도는 멈췄다. 격리망에는 발신 경로와 인증서 일련표가 남았다. 누구의 손인지 아직 단정할 수 없었지만, 지워지기 전에 잡힌 현재의 증거였다. 원래 생의 기억을 미끼로 던져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해진은 벽에 세 번째 종이를 붙였다. ‘현재 확인: 공동 접근 자격, 외부 발신, 원본 보존 중.’ 이름 칸은 비워 두었다. 이겸은 그 빈칸을 보고도 불안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어 둔 종이가, 아는 척 채운 수첩보다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받아들였다.
“내 말을 전부 믿습니까?” 이겸이 물었다.
해진은 잠깐 생각했다. “회귀를 믿을지 말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부장님이 틀릴 수 있다고 우리 앞에서 말한 건 믿어요. 그리고 다음 자료를 같이 보겠다는 선택도요.”
다온이 두 연표를 사진이 아닌 사건철 사본으로 남겼다. 현재의 넉 달과 원래 생의 마지막 넉 달은 서로 다른 칸에 들어갔다. 석 달의 추적은 그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칠 년이라는 간격도 더는 종이를 건너뛰는 구멍이 아니었다.
밤 여덟 시, 네 사람은 J.K. 발급 원장을 공식 조회하기로 했다. 이겸은 회의실 불을 끄기 전 벽의 두 종이를 다시 봤다. 하나는 살아 있는 오늘을 가리켰고, 다른 하나는 이미 끝난 죽음을 가리켰다. 두 시계는 같은 벽에 있었지만 더는 같은 시간을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