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시 오십 분이었다. 이겸은 회의실 문을 열기 전에 복도에서 잠깐 멈췄다. 프린터가 마침 한 장을 뱉어내는 중이었고, 종이가 트레이에 떨어지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이겸은 그것을 집지 않았다. 자기가 보낸 파일이 아니었다.
어젯밤 이겸은 TCS-B 원본 파일을 혼자 세 번 읽었다. 첫 번째는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두 번째는 박이연 명의 계약서의 조항 순서를 확인하기 위해, 세 번째는 놓친 것이 없는지 다시 훑기 위해서였다. 세 번 모두 두 번째 첨부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멈추지 않았다. 업무 지침 양식처럼 보였다. 이겸은 그 사실을 지금 이 복도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었다. 확인이라기보다는 다짐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판이 아직 한 층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회의실 안에는 해진이 이미 와 있었다. 노트북 화면이 열려 있었고, 해진은 이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종이컵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이미 반쯤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뚜껑이 닫혀 있었다. 해진이 사다 놓은 것이었다. 이겸 것인지 다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 변호사는요?"
"오고 있다고 했어요. 두 시 전에는 들어온다고."
이겸은 뚜껑이 닫힌 컵을 자기 앞으로 당겼다. 해진이 처음으로 눈을 들었다가 다시 화면으로 돌아갔다. 그 짧은 순간 이겸은 해진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으려 했지만 해진은 이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겸은 컵 뚜껑을 열지 않았다.
서다온이 들어온 건 두 시 삼 분 전이었다.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 동작이 익숙했다. 의자를 빼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온은 자리에 앉기 전에 잠깐 이겸을 봤고, 이겸은 그 시선을 받았다. 어제 오전 다온이 이겸에게 직접 물었던 것들이 아직 공기 안에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열겠습니다."
다온이 먼저 말했다. 이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진이 마우스를 잡았다. 세 사람의 화면이 거의 동시에 같은 문서로 넘어갔다. 이겸이 먼저 읽고 나서 꺼내는 방식이 끝난 첫 번째 자리였다. 형광등이 오전처럼 미세하게 깜빡였다가 멈췄다.
문서는 어제 다온이 확보한 TCS-B 경로 원본 파일의 두 번째 첨부였다. 박이연 명의 법인 서비스 계약서 뒤에 붙어 있던 것으로, 이겸이 어젯밤 혼자 열어봤을 때는 계약 조항보다 수식어가 많은 내부 업무 지침 문서처럼 보였다. 세 사람이 동시에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다온이 가장 먼저 멈춘 곳은 이겸이 어제 두 번 지나쳤던 페이지였다. 다온의 손가락이 화면 위 특정 줄에 닿기까지 걸린 시간은 사 분도 되지 않았다.
"여기요."
다온이 화면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해진이 스크롤을 멈췄다. 이겸은 자기 화면에서 같은 위치를 찾았다. 계약 이행 조건 항목 끝에 괄호로 묶인 코드 두 줄이 있었다.
'TCS-B/AUTH-7'
그리고 그 아래 'REF: PY-03-K'였다.
"PY가 박이연 이니셜이라면 03은 세 번째 명의고, K는—"
해진이 말하다가 멈췄다. 이겸이 해진 쪽을 봤다. 해진의 시선이 화면에서 다온에게로 옮겨갔다가 이겸에게 왔다.
"K는 사람 이름일 수 있어요. 성씨요."
다온이 받았다. 목소리가 낮고 천천히 나왔다. 이겸은 그 두 음절을 들으면서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깐 멈추는 것을 느꼈다. 전생에서 이겸이 죽던 날 쥐고 있던 장부에는 PY-01과 PY-02까지만 있었다. 세 번째 명의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겸은 그날 밤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K는—이겸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닿지 않는 이름.
이겸은 그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커피 뚜껑을 열었다. 식어 있었다.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는 동작 사이에 다온이 이겸을 보고 있었다. 다온의 눈이 이겸의 손을 잠깐 따라갔다가 화면으로 돌아갔다.
"K가 장승민 라인 안에 있는 이름이라면 PY-03은 전략실 직계 구조예요. 그런데 이 코드가 자문 로펌 계약서 뒤에 붙어 있다는 건, 로펌이 단순히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명의 운용 자체에 개입하고 있다는 거죠."
다온이 말을 잇는 동안 해진은 두 번째 창을 열어 조회 창을 띄웠다. 이겸은 해진이 K 하나를 두고 뭘 먼저 치는지 봤다. 해진은 성씨 K로 시작하는 태성 계열사 내부 직함 등록 리스트를 먼저 당겼다. 이겸은 그 선택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겸 씨."
다온이 불렀다. 이겸이 시선을 올렸다.
"이 코드, 어제 밤에 혼자 열어봤을 때 여기서 멈췄어요?"
짧은 질문이었다. 이겸은 대답하기 전에 한 박자가 있었다.
"지나쳤어요. 업무 지침 양식으로 읽혔거든요."
"지나쳤다."
다온이 그 말을 한 번 더 입 안에서 굴렸다. 부정하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냥 한 번 확인하는 것처럼 말했다. 해진은 그 순간 두 사람 쪽을 보지 않고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우스 움직임이 멈춰 있었다.
이겸은 다온의 시선이 자기 얼굴에 머무는 시간을 느꼈다. 길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히 길었다. 다온은 이겸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겸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 차이가 이겸에게는 더 불편했다.
"K가 장승민 직계가 아닐 수 있어요."
다온이 말을 이었다. 이번엔 이겸이 아니라 문서를 향해 말하는 것처럼 나왔다.
"장승민이 이 구조를 설계한 게 아니라, 장승민도 이 구조 안에서 운용자 역할을 하고 있다면, K는 더 위에 있는 이름이에요. 그리고 그 이름이 자문 로펌 계약 안에 코드로만 남아 있다는 건 의도적으로 지운 흔적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문서 위에 올리지 않은 이름이거나."
해진이 마침내 마우스를 다시 움직였다. 조회 결과가 올라왔다. K로 시작하는 계열사 직함 등록 리스트에서 전략실 관련 항목은 다섯 개였다. 해진은 그것을 소리 없이 프린터로 보냈다. 복도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섯 개면 오늘 안에 좁힐 수 있어요."
해진이 처음으로 먼저 말했다. 이겸과 다온 중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해진은 화면을 보면서 말했고, 손은 이미 다음 창을 열고 있었다.
이겸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수첩을 꺼냈다. 거기에 쓸 이름이 아직 없었다. 코드만 있었다. PY-03-K. 이겸은 그 세 글자를 적고 그 아래에 줄을 하나 그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처음 보는 이름이 저 줄 아래 어딘가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오늘 오후 두 시에 다온이 이겸보다 먼저 짚어냈다는 사실이, 이겸의 등 아래에서 무겁고 서늘하게 앉아 있었다. 이겸은 수첩을 덮지 않았다. 줄 아래 빈칸을 그대로 두고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이름이 채워지기 전까지 그 빈칸은 닫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