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온이 커피를 내려놓은 것은 오전 열 시 사십 분이었다. 잔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회의실은 어제와 같은 자리였고, 형광등 한 쪽이 어제처럼 미세하게 깜빡이다가 멈췄다. 이겸은 그것을 오늘도 두 번 올려다봤다가 시선을 내렸다.
다온은 자리에 앉기 전에 창가 쪽을 한 번 봤다. 흐린 하늘이었다. 햇빛이 없는 날이었다. 그가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파일 꺼내는 소리가 순서대로 났다. 이겸은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 보고용 파일을 정리하는 척 손을 움직였다. 해진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들지 않고 있었다. 회의실 안에 세 사람이 있었고,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2분쯤 됐을 때 다온이 입을 열었다.
"한 부장님."
목소리는 낮고 평탄했다. 이겸은 그 평탄함 안에서 무게를 먼저 읽었다. 고개만 들었다.
"이 문서."
다온이 프린트된 두 장을 나란히 밀었다. 한 장은 TCS-B 수탁 경로 요약, 다른 한 장은 사모펀드 설계 원본 문서의 첫 페이지였다.
"작성 일자가 넉 달 전이에요. 이겸 씨가 처음 이 경로를 들여다봐 달라고 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두 장 중 아래쪽 것을 자기 쪽으로 당겨 날짜를 한 번 더 봤다. 마치 처음 확인하는 사람처럼. 다온은 그 동작을 눈으로 따라가다가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 당겼다. 웃음이 아니었다. 해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모르는 척하는 거면 괜찮아요. 그것도 전략이니까."
다온이 커피를 다시 들었다.
"근데 나는 증거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움직이면 안 돼요. 이 구조의 설계자가 누구인지, 지금 우리가 가진 문서가 그걸 특정할 수 있는 수준인지 먼저 알아야 해요."
이겸은 잠깐 있었다. 복도에서 프린터가 한 번 돌아가고 멈췄다. 창밖으로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아직 특정 못 합니다."
이겸이 천천히 말했다.
"설계자 이름이나 내부 코드가 문서 안에 있는지 확인이 안 됐어요."
"그게 전부예요?"
이겸은 다시 한 번 잠깐 있었다. 다온은 기다렸다. 해진이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들지 않으면서 손가락 움직임만 멈췄다. 그 정적이 3초쯤 됐을 때 이겸이 말했다.
"전부입니다."
다온은 커피를 내려놓고 메모지에 짧게 뭔가를 썼다. 이겸은 그 메모를 읽으려다가 각도가 나오지 않아서 포기했다. 다온이 쓴 것이 질문인지 의심인지 아니면 그냥 다음 할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더 불편했다. 이겸은 커피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완전히 식어 있었다.
해진이 그때 입을 열었다.
"부장님, 박이연 명의 조회 하나 더 뽑았어요."
이겸이 고개를 돌렸다.
"어제 제가 돌린 두 개 코드 말고요."
해진이 노트북을 테이블 쪽으로 밀었다.
"박이연 명의로 된 법인 서비스 계약 건인데, 계약 상대방이 태성 외부예요. 로펌이에요."
이겸의 손이 멈췄다. 파일 위에 올려두었던 손이 그대로 굳었다. 해진은 그것을 보지 않는 척했다.
"어떤 로펌이요?"
해진이 화면을 가리켰다. 이겸이 읽었다. 다온도 일어서서 화면 쪽으로 걸어왔다. 세 사람이 같은 줄을 읽는 동안 회의실은 조용했다. 복도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형광등이 다시 한 번 미세하게 깜빡였다.
다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알아요."
"아세요?"
해진이 돌아봤다.
"전략실이 승계 관련 법률 자문을 쓰는 데예요."
다온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공식 계약은 아니에요. 비공식 자문 라인이에요. 이름은 이미 알고 있던 곳이고."
이겸은 그 말을 들으면서 두 가지를 동시에 계산했다. 하나는 다온이 이 로펌 이름을 어디서 알고 있는가. 다른 하나는 박이연 명의가 이 자문 라인과 연결되어 있다면 설계자가 장승민 직계라는 것이 한 단계 더 좁혀진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이겸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 하나. 이 접촉 흔적이 해진의 독립 조회에서 나왔다는 것.
이겸은 해진을 봤다.
"이거 언제 찾았어요?"
"오전 아홉 시쯤요."
해진이 짧게 말했다.
"말씀드리려다가 다온 씨가 오시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어요."
이겸은 그 말에서 '타이밍을 놓쳤다'는 부분을 오래 들었다. 해진의 표정은 평탄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다만 해진의 조회가 이겸의 순서 바깥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이제 사실이었다. 이겸은 그것을 막아야 하는지 허용해야 하는지 아직 결론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결론을 낼 시간도 없었다.
"이겸 씨."
다온이 다시 불렀다. 이겸이 돌아봤다. 다온의 시선이 정확하게 이겸의 눈 위에 있었다.
"문서 분석 오늘 안에 같이 합시다. 세 사람이. 설계자 특정 코드가 있는지 없는지, 있으면 어디에 있는지. 혼자 먼저 읽고 나중에 꺼내는 방식은 오늘부터 안 됩니다."
이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온의 말은 요청이 아니었다. 조건이었다. 이 공조를 계속할 것인지 아닌지를 지금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이겸은 테이블 위 프린트된 두 장을 내려다봤다. 넉 달 전 날짜. 자신이 먼저 읽었던 문서. 순서를 쥐는 것이 판을 이기는 것과 같다고 믿어왔던 방식.
창밖으로 구름이 움직였다. 회의실 바닥 위에 빛이 없었다.
이겸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오후 두 시에 시작합시다. 가온 씨도 불러야 해요."
다온은 메모지를 접어서 가방 안에 넣었다. 해진은 노트북을 다시 당겨왔다. 이겸은 식은 커피 잔을 들어 마셨다. 쓴맛이 혀 위에 오래 남았다.
다온이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추지 않고 말했다.
"한 가지만요."
이겸이 기다렸다.
"박이연을 이 자리에 올린 사람이 장승민 본인이 아닐 수도 있어요. 장승민이 움직이는 중간 층이 따로 있을 경우, 우리가 지금 잡으려는 게 설계자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예요."
다온은 그 말만 남기고 문을 열고 나갔다. 이겸은 그 뒤를 보면서 잠깐 있었다. 해진이 이겸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복도에서 다시 프린터 소리가 들렸다. 짧게 돌아가고 멈췄다.
이겸은 식은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다온이 그 말을 나가면서 한 것은 경고가 아니었다. 이겸이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전제 위에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이겸은 알고 있었다. 장승민 바로 아래 어딘가에 이름 없는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 박이연을 올린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전생에서는 끝내 그 이름을 확인하지 못했다. 장부를 손에 쥐고 죽던 날까지도.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오후 두 시, 세 사람이 같은 문서를 동시에 열게 된다. 이겸이 먼저 읽고 순서를 정하는 방식은 오늘부로 끝났다. 그것이 손해인지 이득인지는 아직 몰랐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다온이 이겸의 침묵에서 무언가를 이미 읽었다면, 오후 두 시의 문서 앞에서 이겸이 먼저 봤던 것을 다온이 더 빨리 짚어낼 수 있었다. 그 가능성이 이겸의 등 아래쪽에서 서늘하게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