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 사십 분이었다. 수로를 완전히 빠져나오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이동조 다섯 명이 강변 제방 아래 콘크리트 사면에 등을 기댔을 때,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발목부터 무릎 아래까지 젖은 채였다. 세온은 오른쪽 장화를 벗어 물을 쏟아냈다.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윤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강 쪽에서 바람이 왔다. 오염된 공기 특유의 금속 냄새가 얇게 섞여 있었지만, 수로 안에서 맡던 것보다는 나았다. 하린이 방진 마스크를 끌어내리고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다 바로 다시 당겨 올렸다. 도혁이 그걸 보고 작게 웃었다.
"아직 밖이라고 공기가 좋진 않아요."
하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세온은 손전등을 껐다. 제방 위로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넘어오고 있었다. 빛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실루엣이 노출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태민은 이미 제방 끝 쪽으로 올라가 사면 위를 살피고 있었다.
"삼십 미터 앞에 수문 보조 구조물이 있어. 그 밑에서 한 번 쉬어야 해."
세온이 말했다. 태민이 내려오며 고개만 끄덕였다. 윤호가 뒤따라 일어섰다. 도혁은 제방 콘크리트 벽면에 손을 짚은 채 아직 앉아 있었다.
태민이 걸음을 멈추고 도혁을 봤다.
"움직여."
짧았다. 도혁은 손바닥을 벽에서 떼면서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기울였다.
"잠깐요. 이거 좀 보고."
벽면이었다. 수로 출구 바로 옆, 콘크리트 이음새 위에 뭔가가 있었다. 세온이 되돌아와 손전등을 다시 켰다. 작은 표식이었다. 수평선이 아니었다. 세 개의 짧은 수직선이 가로 하나로 묶인 형태. 어떤 글자 같기도 하고, 방향 표시 같기도 했다.
"수로 안 표식이랑 달라."
하린이 옆에 붙어 화면도 없는 태블릿을 들어올렸다가 내렸다. 버릇처럼 꺼낸 것이었다. 신호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면서도.
세온은 그 표식을 손전등으로 한 번 더 비췄다. 수로 안에서 본 수평선은 두 집단이 서로 다른 시점에 남긴 것이었다. 지금 이건 수로 밖이었다. 위치가 달랐다. 다른 목적이거나, 다른 집단이거나. 세온은 그 가능성 두 가지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동하자."
수문 보조 구조물 아래는 제법 넓었다. 무너진 콘크리트 기둥 두 개가 지붕처럼 그늘을 만들고 있었고, 강 쪽으로 열려 있어서 바람이 통했다. 세온은 거기서 자원 점검을 다시 했다. 물은 두 개 반. 건식 식량은 사흘치. 응급 키트는 유리에게 절반을 남겨두고 왔다. 남은 것은 붕대와 지혈 패드가 전부였다.
윤호가 그 옆에 앉아 배낭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손이 잠깐 배낭 옆면을 눌렀다가 떨어졌다. 세온은 그 손을 봤다. 윤호는 세온의 시선을 느낀 것 같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주파수 얘기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먼저 말을 꺼낸 건 도혁이었다. 태민이 도혁을 봤다. 도혁은 태민 쪽을 보지 않고 세온을 봤다.
"하린 씨 태블릿에서 잡혔던 신호 있잖아요. 24화 때. 주파수 범위가 병원 반경 이 킬로 안이라고 했는데."
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내가 말한 게 아닌데."
"아, 내가 그때 옆에서 들었어요.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강변이잖아요. 병원에서 직선으로 이 킬로 넘었거든요. 그 말은 지금 여기서 그 방송이 안 잡힌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가 잠깐 멈췄다.
"저 표식이요. 수로 밖에 생긴 거. 그거 방향 표시예요."
침묵이 흘렀다. 강물 소리만 낮고 일정하게 아래서 올라왔다.
"어떻게 알아."
태민이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을 요구하는 말투였다.
도혁이 처음으로 태민을 봤다.
"군납 규격 이동 마킹이에요. 세 선은 거점 수, 가로는 방향 축이고. 이게 민간 쪽에서 쓰는 방식이랑 달라요. 직접 본 적 있어요."
"어디서."
"그건."
도혁이 한 박자 쉬었다. 쉬는 박자가 길지 않았지만 태민은 그걸 잡아냈다.
"말할 수 있을 때 말할게요."
태민이 일어섰다. 세온이 한 발 먼저 가로막았다. 몸으로 막은 게 아니라 손을 들어 태민 쪽에 올린 것이었다. 태민은 그 손을 보고 멈췄다.
"도혁 씨."
세온이 도혁을 봤다.
"지금 말 못 하는 이유가 뭔지, 다음 거점까지 가기 전에 한 번은 얘기해야 해요. 그 전에는 루트 안내를 믿기 어렵다는 게 내 얘기가 아니라."
세온이 태민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우리 전체 얘기야."
도혁은 잠시 세온의 얼굴을 봤다. 반박하지 않았다. 고개를 약간 숙이며 눈을 내렸다.
"알겠어요."
그 대답이 어떤 무게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수락인지 시간 벌기인지.
윤호가 그때 말했다.
"방향 표시가 맞다면, 세 거점 중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가 문제예요."
모두가 윤호를 봤다. 윤호는 배낭을 내려놓지 않았다. 손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별첨 B 본문에는 강변 수로 이후 분기가 두 개예요. 북쪽이 군 검문소 쪽이고, 남쪽이 민간 안전지대 루트인데. 제가 가진 건 본문까지예요."
세온이 물었다.
"첨부 도면은."
윤호가 잠시 세온을 봤다. 그 눈 안에 뭔가가 지나갔다. 계산인지 망설임인지.
"여기서 꺼내는 게 맞는지 아직 모르겠어요."
정직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정직함이 가장 불편했다. 세온은 더 묻지 않았다.
하린이 일어섰다. 다들 그 움직임을 봤다. 하린은 제방 끝 쪽으로 두 걸음 나가더니 강물 방향을 바라봤다. 신호 없는 태블릿을 다시 들어올리지는 않았다.
"표식에서 수직선 세 개. 북쪽을 향하면 왼쪽 기준이에요. 지금 강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으면, 저 표식의 가로 축은 북쪽을 가리키는 게 맞아요."
아무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태양 위치로 봤어요."
하린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오후 세 시 사십 분이면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해요. 지금 그림자 방향이랑 표식 가로 방향이 수직으로 맞아요."
태민이 처음으로 하린을 똑바로 봤다. 도혁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가 태민의 시선을 느끼고 멈췄다.
세온은 하린의 뒷모습을 봤다. 열여덟 살이 신호 없이 방향을 잡았다. 태블릿 화면을 꺼버린 뒤 처음으로 내린 실전 판단이었다. 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북쪽이면 군 검문소 루트야."
세온이 말했다.
"그래요."
도혁이 이번엔 먼저 말했다.
"그리고 그 루트, 저 알아요."
태민이 팔짱을 끼지 않고 손을 내렸다. 그 손이 허벅지 옆에 가만히 있었다. 세온은 그 손을 봤다. 태민이 뭔가를 참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참음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
강물 소리가 다시 올라왔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갔다. 해가 조금 더 기울었다. 오늘 밤을 어디서 보낼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이동조는 거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