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금산이 돌아온 건 해가 중천을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서진해는 담소령의 방 안에서 그 발소리를 먼저 들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걸음이었다.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은, 그러나 어딘가 무게가 실린 걸음걸이. 문이 열리기 전에 서진해는 이미 일어서 있었다.
담소령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무릎 위에 인쇄물 묶음을 얹은 채 찻잔만 내려놓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묶음의 끈 위에 가늘게 걸려 있었다. 끈은 아까부터 풀린 채였다. 서진해는 그 끈이 묶음을 가로질러 늘어진 모양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누군가 다시 묶으려 들지 않는 이상, 오늘 이 방 안에서 그 종이들은 전부 열릴 것이었다.
"다녀왔소."
막금산은 문지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신발을 벗었다. 담소령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말 대신 시선이 오갔다. 서진해는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기보다,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았다.
"앉으세요."
담소령이 먼저 말했다. 막금산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서진해는 그제야 막금산의 신발 밑창에 흙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마른 흙이었다. 먼 길을 다녀온 사람의 신발이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서진해가 물었다. 막금산은 잠깐 서진해를 보았다가 담소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담소령이 찻잔을 한 번 더 내려놓았다. 아까보다 소리가 조금 컸다.
"나중에 물어보세요. 지금은 이걸 먼저요."
담소령이 묶음 위에 손을 얹었다. 첫 번째 장, 두 번째 장을 넘겼다. 세 번째 장이 나왔다. 서진해는 지난번에 막금산이 그 장을 보고 종이를 손 안쪽으로 당겼던 것을 기억했다. 이번에는 담소령이 그 장을 바닥에 평평하게 펼쳤다. 누구도 가져가거나 가릴 수 없게.
고성 약방 이름이 상단에 있었다. 그 아래로 활자들이 줄을 맞춰 이어졌다. 그리고 중간쯤, 다른 글씨체로 적힌 이름 하나가 있었다. 인쇄된 글자들 사이에서 혼자 손으로 쓴 것처럼 보이는 글자. 서진해는 그것을 읽었다. 읽었다는 말이 맞지 않았다. 눈이 닿았다. 그리고 닿는 순간 멈췄다.
"혜산이."
담소령이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조용하고 분명하게. 방 안의 공기가 그 두 글자를 받아들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서진해는 숨을 한 번 고르고 그 이름을 다시 종이 위에서 찾았다. 손으로 쓴 글씨는 인쇄된 활자보다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서두른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손버릇인지 알 수 없는 기울기였다.
"어릴 때 들은 이름이에요. 어디서 들었는지는 지금 말하기 어렵고."
담소령이 말을 잇지 않았다. 막금산이 팔짱을 끼고 바닥의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저 나간 것과 이어진다는 것도, 서진해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진해는 그 어느 쪽도 묻지 않았다.
"서 낭자?"
막금산이 먼저 불렀다. 서진해가 고개를 들었다. 막금산의 눈이 서진해의 얼굴 어딘가를 살피고 있었다. 담소령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모으는 것이 서진해에게는 묘하게 불편했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이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이 이름 몰라요."
서진해가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혜산이.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어떤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담소령의 표정이 이상했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막금산은 팔짱을 풀었다가 다시 끼었다. 두 번의 동작이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벌어졌다.
"그렇군요."
담소령이 말했다. 그것뿐이었다. 그것으로 끝내려는 것 같았다. 서진해는 그 '그렇군요'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담소령이 기대했던 반응이 서진해의 '모른다'가 아니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어떤 반응을 기대했는지는 몰랐다.
"그 이름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서진해가 물었다. 막금산이 대신 입을 열었다.
"고성 약방 쪽에서 그 이름을 쓴 사람이 있었소. 내가 오늘 그쪽으로 나갔다가 확인한 건데."
그는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직접 만난 건 아니고, 발자국 정도."
발자국. 서진해는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더 되풀이했다. 직접 만나지 못하고 발자국만 확인했다는 말이, 그 사람이 이미 그 자리를 떠났다는 뜻인지, 아니면 아직 그 근방에 있다는 뜻인지, 막금산은 어느 쪽도 말하지 않았다.
"발자국이라면."
"그것도 나중에요."
막금산이 잘랐다.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서진해는 입을 닫았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담소령이 세 번째 장을 원래 순서로 돌려놓고 묶음 위에 손을 올렸다. 끈을 다시 묶지는 않았다. 그냥 손을 얹은 채였다.
"밥은 먹고 오셨어요?"
담소령이 막금산에게 물었다.
"못 먹었소."
"그럼 제가 뭐라도."
"아, 됐어요. 나 밥 없어도 이틀은 버티는 사람이오."
막금산이 손을 저었다. 담소령이 그 손을 보고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그냥 일어섰다. 서진해는 그 순간 막금산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담소령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틀은 버틴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보다, 담소령이 그 말을 듣고도 일어선 이유가 뭔지가 더 궁금했다.
부엌 쪽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막금산은 바닥의 인쇄물 묶음을 내려다보다가 서진해 쪽을 한 번 보았다.
"서 낭자, 혜산이라는 이름, 정말 처음이오?"
"네."
"그 이름을 쓴 사람 얼굴도?"
"모르죠. 이름도 처음인데."
막금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고개 끄덕임이 납득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서진해는 그 차이를 알았다. 납득과 확인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막금산이 다시 입을 열려는 듯 숨을 고르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그냥 시선을 창 쪽으로 돌렸다. 오후 햇살이 기울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담소령이 국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막금산 앞에 내려놓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막금산도 고맙다는 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그 정도의 말은 이미 생략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서진해는 그 생략의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려다 그만뒀다.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진해는 그 방 안에서 혼자 바깥사람 같은 기분이었다. 이름 하나가 공기를 바꿔놓았는데, 그 이름이 어떻게 바꿔놓은 것인지를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담소령은 어릴 때 들었다고 했다. 막금산은 발자국을 확인했다고 했다.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그 이름과 이미 연결되어 있는데, 서진해만 그 이름 앞에서 완전한 공백이었다.
그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서진해는 아직 몰랐다. 다만 담소령이 '그렇군요'라고 말하던 순간의 표정이 자꾸 머릿속에 걸렸다. 안도와 실망이 동시에 있는 얼굴. 두 가지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서진해는 오늘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