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전 열 시, 아르덴 1층 연회장 입구 복도에는 루셀 측 담당자 박준혁이 먼저 와 있었다. 정각보다 십오 분 일찍. 서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다가 그 뒷모습을 보고 잠깐 멈췄다. 박준혁은 창가 쪽을 보며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통화를 끊는 타이밍이 서린과 눈이 마주친 것과 거의 동시였다. 먼저 손을 들어 인사한 쪽은 박준혁이었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가 말했다.
서린은 창밖을 한 번 봤다. 6월 초의 하늘이 흐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맑다고 부를 만하지도 않았다.
"준비해 오신 서류 먼저 확인하시겠어요."
서린이 대답 대신 말했다. 박준혁이 웃었다. 그게 칭찬인지 거절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도윤은 오전 열 시 오 분에 나타났다. 셔츠 소매를 반쯤 접은 채, 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었다. 지민이 뒤에서 따라 들어오면서 "셰프님, 사인 펜은 제가 챙겼어요" 하고 말하자 도윤이 "사인 펜을 왜 네가 챙겨" 하고 받았다. 지민은 "만년필이 없잖아요" 하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서린은 그 대화를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테이블 쪽으로 내렸다. 만년필이 없다는 말이 어쩐지 우습고, 그 우스움이 어쩐지 불편했다.
서명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열다섯 쪽짜리 계약서에 사인이 두 곳, 이니셜이 다섯 곳이었다. 박준혁이 각 장을 넘기며 항목을 확인하는 동안 서린은 옆에 서서 도윤의 손끝을 보고 있었다. 볼펜 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 도윤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서린만 본 것 같았다. 지민은 카메라 앱을 열어놓고 기념 사진 각도를 재고 있었으니까.
"잘됐다."
박준혁이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아르덴이 다시 화제가 되겠네요. 솔직히 저도 기대됩니다."
말투가 진심처럼 들렸다. 서린은 "감사합니다" 하고 정확하게 답했다. 도윤은 커피잔을 손에 든 채 박준혁과 악수했다. 그 자리에서 지민이 셔터를 눌렀다. 기념사진이 세 장 찍혔다. 세 장 모두 서린의 표정은 적당히 단단했고, 도윤의 표정은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박준혁이 나가고 지민이 "저 서류 팀에 올리고 올게요" 하며 먼저 자리를 뜨자, 연회장 입구 복도에는 서린과 도윤만 남았다. 창밖으로 아르덴 앞 가로수가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서린은 손에 들고 있던 볼펜 뚜껑을 닫으면서 먼저 말했다.
"수고했어요."
도윤이 "그거 다예요?" 하고 물었다.
서린은 그를 봤다. 도윤은 창가 쪽을 보고 있었다.
"그거 다예요, 오늘."
다시 한번 말했다. 질문인지 확인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말투였다.
서린은 가방 안쪽 지퍼를 열었다. 손이 그쪽으로 갔다. 소희에게 받은 반 장짜리 종이가 거기 있었다. 어젯밤 내내 꺼냈다 다시 집어넣었던 그 종이. 서린은 그것을 꺼내 도윤 쪽으로 내밀었다. 아무 말 없이.
도윤이 받았다. 종이를 펼쳤다. 읽었다. 읽는 동안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서린은 그 얼굴을 보면서 기다렸다. 도윤이 종이를 한 번 접었다가 다시 폈다. 그리고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서린은 숨을 한 번 골랐다.
"언제부터요."
"떠나기 직전."
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평평했다.
"배성재 쪽에서 누가 움직였는지, 어떤 언론사를 통했는지. 그때 알았어요. 그래서 안 잡았어요, 그 사람들."
"왜요."
도윤이 처음으로 서린을 봤다.
"서린 씨가 거기 엮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말이 짧았다. 그 짧음이 긴 설명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서린은 창밖을 봤다. 가로수가 또 흔들렸다. 아까와 같은 바람인지 달라진 바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다 혼자 지고 간 거예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그게 제일 빠른 방법이었으니까."
도윤이 대답했다. 그리고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틀렸다는 거 알아요. 지금은."
서린은 그 말을 받지 않았다. 받으면 그 다음에 뭔가를 말해야 했다. 아직 그 말을 찾지 못했다. 대신 종이 아래쪽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두 번째 이름, 봤죠."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우진이에요?"
도윤이 대답하는 대신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서린은 종이를 다시 받아 가방에 넣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지금 이 순간이 조용했다.
그때 지민이 복도 끝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구두 소리가 아니라 운동화였다. 뭔가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지민이 내는 소리를 서린은 이미 외우고 있었다.
"언니."
지민이 멈추지도 않고 말했다.
"1층 로비에 차우진 이사 와 있어요. 박준혁 씨 나가는 거 봤는지, 지금 프런트에서 기다리고 있대요."
서린은 도윤을 봤다. 도윤이 서린을 봤다. 둘 사이에 말이 없었다. 지민이 그 침묵을 보다가 "제가 내려가서 응대할까요" 하고 물었다.
"아니요."
서린이 먼저 말했다.
"내가 내려갈게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 도윤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같이 내려가요."
서린이 그를 봤다. 계약서에 없는 말이었다. 계약 기간이 끝난 자리에서, 계약 바깥의 언어로 도윤이 처음 한 말이었다. 서린은 대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도윤이 옆에 섰다. 지민이 둘을 번갈아 보다가 "저는... 서류 올리고 올게요" 하고 혼자 자연스럽게 빠졌다.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린은 정면을 봤다. 도윤도 정면을 봤다. 층수 표시등이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도윤이 낮게 말했다.
"그 이름, 더 파야 해요."
서린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냥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게 대답이었다.
1층 로비에서 차우진은 소파에 앉지 않고 프런트 옆 기둥에 기대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린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걸 보고 그가 먼저 몸을 폈다. 시선이 도윤 쪽으로 한 번 갔다가 서린에게 돌아왔다.
"잘됐네요. 서명 끝났죠?"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언제나처럼.
"예정대로요."
서린이 답했다.
"아르덴이 버텼네요."
차우진이 말했다. 그 말에는 축하도 아니고 체념도 아닌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서린은 그 뉘앙스를 들으면서 그의 얼굴을 정확히 봤다. 차우진이 웃었다.
"서린 씨, 밥 한 번 먹어요. 오래된 얘기가 있어요."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우진은 도윤에게 짧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유리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로비에 그의 잔향이 잠깐 남았다가 사라졌다.
도윤이 서린 옆에서 말했다.
"오래된 얘기가 뭔지 알아요?"
서린은 "아직은요" 하고 말했다. 손이 가방 안쪽으로 갔다. 소희의 종이 옆에, 어젯밤 뒤늦게 발견한 작은 메모 한 장이 있었다. 아르덴 오래된 파일 사이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 이름 석 자, 그 아래 날짜 하나, 그리고 숫자가 두 개. 서린은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꺼낼 자리가 아직 아니었다.
프런트 직원이 체크인 손님 안내를 시작했다. 캐리어 바퀴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서 굴렀다. 아르덴의 오전이 다시 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린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창가 쪽으로 한 발 옮겼다. 도윤이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그 거리가 계약서가 있을 때보다 조금 멀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게 더 진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