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전에는 구름이 낮게 깔렸다. 빗방울은 없었지만 공기가 눅눅했고, 현우는 출근하면서 재킷 소매가 이미 축축해진 것을 느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봤더니 머리카락이 약간 눌려 있었다. 손으로 한 번 털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상담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라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 두 시 예약, 강준혁 씨 맞죠?"
"맞아요."
현우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라는 이미 예약 확인을 마친 표정이었다. 종이컵에 커피를 내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피 냄새가 상담실 안쪽까지 번졌다. 그 침묵이 자연스러운 건지 아닌지, 현우는 아직 구분하지 못했다.
오전 상담은 한 건이었다. 기존 고객의 갱신 건으로, 서류를 확인하고 서명을 받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열두 시 전에 마쳤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한 시 반이었다. 현우는 의자에 앉아 수첩을 꺼냈다. 강준혁. 오진수가 같은 팀이라고 했다. 그것 외에 아는 게 없었다. 수첩에는 이름 석 자와 연락처만 적혀 있었다. 볼펜 끝으로 이름을 한 번 짚었다가 그냥 덮었다. 미리 뭔가를 적어두고 싶었는데 적을 게 없었다.
두 시 정각에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은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어깨가 넓었고, 면 재킷을 걸친 차림이 딱히 격식을 차린 것도 아니었다. 눈이 조용했다. 빠르게 사무실을 한 번 훑었다가 현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시선이 잠깐이었는데도 현우는 뭔가를 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진수 때도 그랬다. 이 회사 사람들은 왜 다 들어오자마자 한 번씩 재는 건가.
"박현우 설계사님이세요?"
"네, 맞습니다. 강준혁 씨?"
"네."
짧았다. 현우는 자리를 권하며 속으로 한 번 생각했다. 낮고, 단단하고, 빈틈이 없는 목소리. 오진수도 딱 이 온도였다. 이 사람들은 왜 다 이 모양인가.
강준혁은 의자에 앉으면서 재킷 안쪽에서 명함을 꺼냈다. 현우가 받아 보니 회사 이름과 직급이 적혀 있었다. 같은 회사, 같은 층이었다. 오진수와 같은 팀이 맞았다. 현우는 명함을 수첩 옆에 나란히 내려놓고 잠깐 두 개를 같이 봤다. 회사 로고가 똑같았다. 당연한 건데 괜히 눈이 갔다. 아라가 내다본 건지 슬쩍 돌아봤는데 그쪽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오 대리님 통해서 연락했습니다."
"네, 들었어요. 보험 상담 원하신다고."
"암보험이요. 서른다섯에 처음 드는 거라 뭘 봐야 하는지 모르겠어서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을 폈다. 서른다섯, 첫 암보험. 그건 이해가 됐다. 상담 자체는 특이할 게 없었다. 현우는 질문을 이어 나갔다. 흡연 여부, 가족력, 직업군 관련 위험도, 현재 가입된 다른 보장 내역. 강준혁은 하나씩 짧고 정확하게 대답했다. 과장하지 않았고, 빠뜨리지도 않았다. 현우가 뭔가를 받아 적는 동안 강준혁은 말을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그 여유가 편한 건지 계산된 건지 현우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중간에 현우가 잠깐 말을 고르다 틈이 생겼다. 볼펜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그 침묵이 이 초 정도 됐을까.
"오 대리님이 먼저 가입하셨나요, 혹시?"
강준혁이 약간 멈췄다. 그 멈춤이 아주 짧았다.
"어. 뭐, 얘기는 들었어요."
현우는 그 말을 수첩에 받아 적지 않았다. 받아 적을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뭔가 걸렸다. 오진수가 가입했다는 건지, 그냥 얘기를 들었다는 건지, 대답이 살짝 비껴나간 느낌이었다.
'가입했다'
가 아니라 '얘기는 들었다'. 현우는 그냥 넘겼다. 지금 그걸 파고들 자리가 아니었다. 파고들었다가 틀리면 더 민망했다.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현재 실손은 있으시고요?"
강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상담이 이어졌다. 현우는 질문을 고를 때마다 강준혁의 눈을 한 번씩 확인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의 눈인지, 다음 수를 보는 사람의 눈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냥 조용한 눈이었다.
상담은 삼십 분 안에 마무리됐다. 강준혁은 상품 두 가지를 비교해달라고 했고, 현우는 다음 주까지 비교 자료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강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킷을 여미면서 명함을 하나 더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연락 편하게 주세요."
"네, 그럴게요."
현우도 일어서며 인사했다. 강준혁이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한 박자 늦게 돌아봤다. 그 타이밍이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잊었다가 떠올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려던 말을 마지막에 꺼내는 사람의 타이밍이었다.
"임도현 씨도 이번 주에 오죠?"
현우는 딱 한 박자 굳었다.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수요일에 예약됐어요."
"그렇군요."
강준혁은 그냥 나갔다. 문이 닫혔다. 현우는 서 있는 채로 문을 한 번 쳐다봤다. 조용했다. 상담실 공기가 다시 가라앉는 데 몇 초가 걸렸다. 강준혁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생각해봤다. 오진수가 소개했으니까 서로 얘기했을 수도 있다. 같은 팀 동료끼리 협력업체 일정을 공유하는 게 이상한 일인가. 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생각하려고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아라가 종이컵을 들고 왔다. 현우가 자리에 앉으면서 받아 들었다. 식어 있었다. 아까 내린 건데 벌써 이렇게 됐나 싶었다. 한 모금 마셨더니 밍밍했다.
"어떠셨어요?"
"뭐가요."
"강준혁 씨요."
현우는 잠깐 생각했다. 어떠셨냐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몰랐다. 상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고객으로서는 준비가 잘 된 사람이었다. 다만.
"나가면서 임도현 씨 예약 아냐고 물어봤어."
아라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표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알고 있었나 보네요."
"그러게요."
놀라지 않았다. 현우는 그 반응을 한 번 더 봤다. 아라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키보드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현우는 커피를 내려놓고 수첩을 폈다. 강준혁. 이름 아래에 뭔가 더 적고 싶었는데 적을 문장이 마땅하지 않았다. 그냥 느낌이었다. 느낌을 수첩에 적어봤자 나중에 보면 민망하기만 했다. 예전에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이 사람 뭔가 이상함' 이라고 적어뒀다가 다음 상담 때 멀쩡한 사람이었던 적. 그 페이지를 찢어버렸던 기억이 났다. 지금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결국 현우는 이름 옆에 작게 물음표 하나만 찍었다. 그리고 다음 줄에 임도현 — 수요일이라고 썼다. 내일이었다. 강준혁이 알고 있다고 했으니, 임도현도 강준혁이 오늘 왔다는 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은 단순히 같은 사람한테 소개받은 개별 고객이 아닐 수 있다. 현우는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지 않았다. 밀고 가봤자 지금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수요일이 오면 임도현을 만날 것이다. 만나봐야 안다.
그 말이 요즘 입버릇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 말이 도망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도망이 아니라 준비, 딱 그 경계 어딘가에 있는 말. 현우는 볼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오후 빛이 건물 사이에서 비스듬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첩은 덮었다. 물음표 하나가 안쪽에서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