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오전, 현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사무실 안은 조용했다. 프린터가 이따금 돌아가는 소리, 옆 자리 누군가의 마우스 클릭 소리. 종이컵에서 올라오는 커피 냄새는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중간 어딘가였다. 현우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 오늘 오전 예약이 두 건 비어 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비어 있다는 건 기다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진수가 소개해준다고 했던 두 사람. 이름은 아직 몰랐다.
화면에 뜬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것이었다. 열한 자리. 수신 버튼을 누르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이 됐다. 오진수가 말했던 두 사람 중 한 명이겠지. 그냥 그런 타이밍이었다. 현우는 잠깐 화면을 내려다봤다. 진동이 한 번 더 울렸다.
"강준혁이라고 합니다. 오진수 대리님한테 연락처 받았는데요."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나이는 서른 중반쯤 될 것 같은 질감이었다. 현우는 반사적으로 수첩을 펼쳤다. 볼펜을 집어 들면서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이현우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오진수는 같은 팀 한 명, 협력업체 한 명이라고만 했다. 이름도 그때는 말하지 않았다. 현우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 톤을 조금 올렸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라는 말이 이 업계에서 얼마나 자주 쓰이는 빈 문장인지 알면서도 꺼낸 것이었다. 볼펜 끝이 수첩 위에서 잠깐 멈췄다.
강준혁은 짧게 웃었다. 뭔가를 눈치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상담 일정을 잡는 데는 채 삼 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 주 화요일 오후 두 시. 현우는 수첩에 이름과 시간을 적고, 그 옆에 작은 괄호를 열었다. 괄호 안에 뭘 써야 할지는 아직 몰랐다. 그냥 열어뒀다.
전화를 끊고 나서 현우는 종이컵을 다시 집어 들었다. 커피는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다. 한 모금 마시면서 수첩을 내려다봤다. 강준혁, 화요일 오후 두 시. 이름 석 자는 또렷했지만 그 뒤에 올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현우는 볼펜을 옆에 두고 팔짱을 끼려다가 멈췄다. 팔짱을 끼는 건 정리가 됐을 때나 하는 동작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아라가 지나가다가 멈췄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지나가던 길에 멈춘 것처럼 보였다.
"예약 들어왔어요?"
"네. 다음 주 화요일이요."
"오진수 씨 쪽이에요?"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아라는 이미 자기 자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서 보이는 어깨 선이 아무렇지 않았다. 현우는 그 질문이 어떻게 나온 건지 잠깐 생각했다. 아라가 수첩을 봤을 리는 없었다. 그럼 그냥 짐작한 건가.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현우는 볼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괄호는 닫지 않았다.
두 번째 연락은 금요일 오전 열한 시에 왔다.
현우는 그때 상담실 청소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물티슈와 소형 방향제 사이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어제와 같은 예감이 왔다. 저장 안 된 번호. 열한 자리. 국번도 비슷한 자리에서 달랐다. 현우는 물티슈를 내려놓으며 상담실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췄다. 안으로 들어가서 앉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복도에 서서 받기엔 뭔가 부족한 통화였다.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임도현입니다. 오진수 대리님한테 연락처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낮은 목소리였다. 강준혁보다 조금 더 건조한 느낌. 임도현은 협력업체 소속이라고 했다. 어느 회사인지는 물어보기 전에 먼저 밝히지 않았다. 현우는 적절한 타이밍에 물어보려다가 상담 일정을 잡는 흐름에 눌려 놓쳤다. 다음 주 수요일 오전 열 시. 화요일 강준혁 상담 하루 뒤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현우는 그걸 깨달았다. 묻지 못한 게 하나 생겼다는 것도.
전화를 끊고 현우는 한동안 테이블 위를 봤다. 방향제가 희미하게 냄새를 내고 있었다. 라벤더라고 쓰여 있었지만 라벤더 같지는 않았다. 현우는 그냥 그걸 보면서 두 통화를 머릿속에서 나란히 놓아봤다. 강준혁, 임도현. 같은 사람이 소개해준 두 명. 목소리의 결이 달랐지만 어딘가 비슷한 무게가 있었다. 오진수도 처음 전화를 받을 때 그랬다. 낮고, 단단하고, 빈틈이 없었다.
우연일 수 있었다. 비슷한 연령대면 목소리가 비슷할 수 있다. 현우는 그렇게 정리하려다가 멈췄다. 오 대리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도 같은 말을 했었다. 빈틈이 없다고. 그리고 만나보니 묻지 않은 것까지 알고 있었다. 현우는 볼펜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뭔가를 적으려 했는데 뭘 적어야 할지 몰랐다. 그 모름 자체가 불편하지 않다는 게 더 이상했다.
상담실 문이 노크 없이 열렸다.
"거기 있었어요?"
아라였다. 손에는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현우는 반사적으로 수첩을 덮었다. 아라는 그 동작을 봤는지 안 봤는지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의자를 빼서 앉았다. 현우는 덮어놓은 수첩이 신경 쓰여 손을 옆으로 치웠다. 이미 늦은 동작이었다.
"아, 죄송해요. 전화 받느라고요."
"알아요. 두 번째 연락이죠?"
현우는 말을 잃었다. 아라는 자기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진수 씨가 두 명 소개해준다고 했잖아요. 어제 한 명, 오늘 한 명. 그냥 계산한 거예요."
"아, 네."
현우는 커피를 집어 들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면서 아라를 봤다. 아라는 뭔가를 더 말할 것 같은 자세였다. 아니면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 자세이거나. 종이컵에서 올라오는 커피 냄새가 방향제 냄새와 섞였다. 라벤더가 아닌 것들이 뒤섞인 공기였다. 창밖에서 지나가는 차 소리가 잠깐 들렸다가 사라졌다.
"두 분 다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죠?"
"만나봐야 알겠죠."
"그렇죠."
아라는 그걸로 끝냈다. 커피를 한 번 더 마시고 일어섰다. 나가면서 문을 살짝 열어뒀다. 복도에서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아라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봤다. 뭔가를 물어봤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이 왔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묻지 못한 것들이 자꾸 쌓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쌓임이 어제보다 조금 덜 불편했다.
현우는 수첩을 폈다. 강준혁, 화요일. 임도현, 수요일. 두 이름 사이에 펜을 올려두고 잠깐 멈췄다. 오진수의 이름 옆에 적었던 괄호가 아직 열려 있었다. 뭘 채워야 할지 몰랐을 때 연 괄호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번에는 그 괄호 옆에 아라의 말 한 마디가 맴돌았다. 두 분 다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죠? 묻는 말이었지만 확인하는 말 같기도 했다.
아라가 알고 있다면 뭘 알고 있는 걸까. 이름? 소속?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 현우는 그 질문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적으면 더 커질 것 같았다. 대신 펜을 들어 임도현의 이름 끝에 물음표를 하나 찍었다. 어느 회사 소속인지. 그 물음표는 질문이 아니라 다음 주 수요일까지 가져가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괄호를 닫지 않았다. 볼펜을 내려놓고 종이컵을 다시 집어 들었다.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라벤더가 아닌 방향제 냄새 속에서 현우는 화요일 오후 두 시를 기다리기로 했다. 만나봐야 안다.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 전부가 이상하게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 자체가 조금 전의 현우와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