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열 시가 막 지났을 때 이겸의 휴대폰이 한 번 울렸다. 진동이었다. 화면을 뒤집지 않아도 발신자를 알 수 있었다. 서다온이 문자 한 줄로 보내는 경우는 항상 결과가 나왔을 때였다.
이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두 걸음 옮겼다. 사무실 안에는 프린터가 다음 출력물을 기다리며 팬을 돌리는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이겸은 화면을 열었다.
'확인됨. 오전 중으로 파일 보냄.'
그게 전부였다. 서다온은 전화보다 문자를 좋아했고, 문자 안에서도 결론만 남겼다.
이겸은 노트북을 열고 메일함을 새로 고쳤다. 파일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제목 없이 첨부만 있었다. PDF 파일 이름은 'TCS_등기_조회.pdf'였다. 이겸은 파일을 열기 전에 잠깐 멈췄다. 이번 생에서 이 이름을 처음 문서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전 생에서는 이 이름을 피 냄새 나는 공간에서 장부 귀퉁이에 적힌 채로 봤었다. 이겸은 마우스를 한 번 클릭했다.
TCS-A 법인의 등기상 대표이사는 '이재필'이었다. 이겸은 그 이름 앞에서 표정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재필. 태성지주 전략실 소속 비상무이사. 장승민의 직접 라인 아래 있는 인물. 이겸은 예상했던 이름이었지만 예상이 들어맞는다는 사실이 반드시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TCS-B의 대표이사 칸은 아직 공란이었다. 서다온의 메모가 파일 마지막 페이지에 붙어 있었다. '두 번째 법인 등기 확인에는 시간이 더 필요함. 별도 경로 필요.'
이겸이 파일을 닫으려는 순간, 사무실 유리문이 열렸다. 노크 없이 들어오는 사람이 이 층에 몇 없었다. 기획조정팀장 오재훈이었다. 오재훈은 서류 봉투를 왼손에 들고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방문이 아니라 통보처럼 보였다.
"한 부장님, 잠깐 시간 되세요?"
말은 질문이었지만 이미 의자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겸은 노트북 화면을 자연스럽게 반쯤 닫고 돌아섰다. 해진이 자기 자리에서 눈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가온은 이어폰 한쪽을 빼는 척하며 고개를 약간 돌렸다.
"앉으세요."
이겸이 말했다. 오재훈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웃었다. 웃음이 눈까지 올라오지 않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사실 윗분들이 이번 태성캐피탈 건 좀 빨리 마무리하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나흘이 좀 길다고 하셔서요. 이틀로 줄일 수 있을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이겸은 대답하기 전에 커피잔을 들었다. 이미 식어 있었다. 마시지 않고 내려놓았다.
"기한은 감사팀 검토 완결성 기준으로 잡은 겁니다. 이틀이면 서면 확인 단계에서 누락이 생겨요."
"물론 그렇죠. 그런데 이게 워낙 간단한 구조 아닙니까? 캐피탈 쪽 사모펀드 제안서 정도는 사실 형식 검토에 가깝고—"
"형식 검토면 기획조정팀에서 직접 처리하면 됩니다."
이겸의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오재훈이 잠깐 멈췄다. 웃음이 조금 얕아졌다.
"그건 절차가 있으니까요. 내부감사팀 확인을 거쳐야 효력이 생기는 거잖습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나흘이 필요한 겁니다."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들어왔다. 해진이 자판을 치다가 멈췄다. 프린터 팬 소리가 한 번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오재훈은 봉투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겸에게 건네지 않았다. 그냥 들고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흘 기준으로 진행하시되, 중간 보고는 이틀 차에 한 번 주시면 좋겠습니다. 비공식으로요."
"공식 채널로 올리겠습니다."
오재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갔다.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이겸은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재훈의 방문은 압박이었다. 그러나 이겸이 더 신경 쓰인 것은 그가 봉투를 끝까지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봉투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지 않은 채 들고 나갔다. 협상 도구로 들고 온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보여줄 생각이 없었는지 이겸은 아직 판단을 유보했다.
"부장님."
해진이었다. 이겸이 고개를 돌렸다.
"이틀로 줄이면 현장 실사 일정이 날아가는 거 알고 요청한 거죠, 저 사람."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이겸은 잠깐 해진을 봤다.
"알고 온 거야."
"그러면 현장 실사가 진짜 목표를 건드린다는 얘기잖아요."
이겸이 대답하지 않자 해진이 펜을 내려놓으며 한 번 더 말했다.
"태성캐피탈 현장 실사, 부장님이 직접 일정 잡으셨잖아요. 처음부터. 제안서가 오기도 전에."
이겸은 그 말을 들으며 시선을 창 쪽으로 옮겼다. 해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겸이 현장 실사 대상으로 태성캐피탈을 먼저 고른 것은 제안서가 올라오기 이틀 전이었다. 해진이 그것을 세고 있었다.
"감사 계획 수립 과정에서 우선순위를 정한 거야. 이상한 거 아니야."
해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겸은 그 침묵이 반박이 아니라 저장임을 알았다. 해진은 지금 이겸의 말을 반박하려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끼워 두려는 것이었다.
가온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 저 봉투요. 들고 나간 거 있잖아요. 혹시 저게 수정 제안서 아닐까요? 이틀 기한으로 다시 끊은 버전."
이겸이 가온을 봤다. 가온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원본이랑 비교하면 뭔가 빠져 있을 수도 있어서요. 저 봉투 내용을 알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이겸은 잠시 생각했다. 가온의 직관은 느리지 않았다.
"기획조정팀 공문 발송 내역 조회할 수 있어?"
"공문 시스템은 접근 가능해요. 오늘 오전 발송 건이 있으면 뜰 거예요."
"확인해."
가온이 자판 위에 손을 올렸다. 해진은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는 척했지만 이겸은 해진의 시선이 서류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겸은 자리를 떠나 탕비실로 걸어갔다. 커피가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잠깐 사무실 공기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안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매직으로 적힌 유리병이 하나 있었다. 이겸은 그 이름을 보지 않았다.
이재필. TCS-A 대표이사. 장승민의 직접 라인. 이겸은 이 이름을 법인 등기 안에서 확인하는 순간을 전 생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때는 이미 장부가 소각된 뒤였다. 이번 생에서 이 이름이 문서 위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이 무기인지 덫인지 아직 판단하기 이른 이유가 그것이었다.
탕비실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겸이 돌아보기 전에 해진이 들어왔다.
"부장님."
이겸이 기다렸다.
"저 오재훈 팀장이 들고 온 봉투요. 공문 발송 내역에 오늘 오전 기획조정팀 발신 건이 없어요. 가온 씨가 방금 확인했어요."
이겸의 손이 냉장고 손잡이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개인 지참이었다는 얘기야."
"네. 공문이 아니에요."
해진이 이겸을 봤다. 이겸도 해진을 봤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탕비실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이다가 멈췄다.
"오재훈 팀장이 뭘 들고 온 건지, 부장님은 알고 계세요?"
이겸은 대답했다.
"모르겠어."
해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먼저 나갔다. 이겸은 그 자리에 잠깐 더 서 있었다.
'모르겠어'
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봉투 안이 무엇인지 이겸은 아직 모른다. 그러나 해진이 묻고 싶었던 것은 봉투 안이 아니었다. 이겸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대답이 맞는 말이어도 맞는 대답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