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여덟 시 사십 분, 태성그룹 내부감사팀 사무실은 아직 절반만 채워진 상태였다. 이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복도 끝 회의실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해진이 먼저 출근해 있다는 뜻이었다. 요 며칠 해진의 출근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이겸은 그것을 아무 말 없이 세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선이 울렸다. 기획조정팀 쪽이었다. 수화기를 들었더니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어왔다.
"이겸 부장님, 오늘 오전 중으로 태성캐피탈 사모펀드 관련 검토 요청 서류가 내려갑니다. 준 전무님 지시입니다."
이겸은 잠깐 멈췄다. 준 전무. 장승민의 직함이 그 자리에서 이름 대신 쓰이는 방식은 언제나 같았다. 지시를 감추기 위한 호칭이었다.
"확인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이겸은 손을 한 번 폈다. 손가락 끝이 약간 차가웠다. 사모펀드 제안서. 이겸은 그 단어를 소리 없이 입술로 만들었다. 예전 생에서 이 서류가 처음 감사팀에 들어왔을 때 이겸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냥 계열사 자금 운용 검토 건으로 처리하고 넘겼다. 그것이 승계 자금 구조의 첫 번째 공식 입구였다는 걸 알게 된 건, 죽기 이틀 전이었다.
해진이 회의실에서 나오며 이겸 쪽으로 걸어왔다. 손에 파일 하나를 들고 있었다.
"부장님, 현장 실사 일정 초안 정리해 뒀는데요. 태성캐피탈 쪽 먼저 잡을까요, 아니면 물류 쪽부터 갈까요?"
이겸은 해진이 건네는 파일을 받으면서 대답했다.
"캐피탈 쪽 먼저."
해진이 잠깐 이겸의 얼굴을 봤다. 특별한 표정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를 확인하는 것 같은 시간이 0.5초 있었다. 이겸은 모른 척했다.
오전 열 시 십오 분, 기획조정팀 직원이 직접 서류봉투를 들고 왔다. 봉투 안에는 제안서 본문 열여섯 페이지와 요약본 두 페이지가 따로 들어 있었다. 이겸은 요약본을 먼저 펼치지 않았다. 본문 첫 장을 폈다. 사업 목적, 투자 구조, 수익 배분. 깔끔하게 정렬된 표. 이겸의 시선이 세 번째 항목에서 멈췄다. 수익 배분 구조 안에 특수목적법인 두 개가 나란히 표기되어 있었다. 법인 이름은 약자였다. TCS-A와 TCS-B.
이겸은 그 두 줄을 오래 봤다. 예전 생 마지막 밤, 장부 조각 안에서 이 약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맥락을 몰랐다. 지금은 알았다. TCS-A는 차준석의 개인 계좌로 연결되는 페이퍼 컴퍼니였다. TCS-B는 장승민이 설계한 중간 거치 법인이었다. 이 제안서는 두 사람의 이름을 지우고 기능만 남겨 놓은 것이었다.
가온이 메신저 창으로 파일을 하나 보내왔다.
[방금 캐피탈 쪽 공시 자료 훑었는데요. 지난 분기 대비 관계사 간 자금 이동 규모가 38퍼센트 올랐어요. 근데 이걸 설명하는 주석이 없어요. 공시 담당자가 빠뜨린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안 쓴 건지.]
이겸은 메신저 창을 닫지 않고 잠시 뒀다. 38퍼센트. 주석 없음. 감사팀에 검토 요청이 들어온 것과 이 시기가 겹친다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서류를 먼저 올려서 감사팀이 이것을 승인한 구조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서류가 지나간 자리에 감사팀의 확인 도장을 찍어 두면,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감사팀도 공범이 된다. 예전 생에서 이겸이 그 도장을 찍었다.
이번 생에서는 다르게 써야 했다.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어, 탕비실에서 이겸은 커피포트 앞에 서서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해진이 들어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닫더니 이겸 옆에 섰다.
"부장님, 제안서 보셨어요?"
"봤어."
"TCS-A랑 TCS-B, 저 처음 보는 법인 이름인데요."
이겸은 커피포트를 들었다.
"나도 처음 보는 거야."
해진이 잠깐 말을 멈췄다. 이겸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해진이 알아채지 못하길 바랐다. 그러나 해진은 냉장고 옆 벽을 한 번 봤다가 다시 이겸을 봤다.
"두 법인 다 설립일이 작년 9월이에요. 가온 씨가 확인했는데 대표이사 이름이 공개 정보로 안 잡혀요."
이겸은 커피를 따르면서 말했다.
"그러면 등기소 조회 직접 해."
"해야죠."
해진이 탕비실을 나가면서 덧붙였다.
"근데 왜 감사팀한테 이걸 검토하라고 보내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건 투자 심의 쪽 소관 아닌가요?"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진도 더 묻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 안에,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감각과, 이겸이 해진보다 훨씬 멀리 보고 있다는 사실이 동시에 존재했다.
오후 세 시, 이겸은 서다온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TCS법인 두 개 등기 확인 가능한 채널 있으면 연락.] 답장은 오 분 만에 왔다. [내일 오전.] 그게 전부였다. 이겸은 폰을 뒤집어 놨다.
창밖으로 태성 빌딩 17층의 불빛이 보였다. 전략실 층이었다. 장승민이 지금쯤 이 제안서가 감사팀 책상 위에 올라갔다는 보고를 받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유능한 말이 잘 달리는지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이겸은 제안서 열여섯 번째 페이지를 폈다. 마지막 항목, 검토 기한. 이번 주 금요일. 나흘이었다. 나흘 안에 이겸이 이 제안서에 문제 없다는 검토 의견을 달아서 올려 보내지 않으면, 기획조정팀을 통해 다시 압력이 들어올 것이었다. 그것도 이겸은 알고 있었다.
이겸은 수첩을 꺼내 날짜 옆에 짧게 썼다. TCS-A / TCS-B / 나흘. 그 아래에 한 줄 더 썼다. 도장은 아직이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가온은 자리를 지켰다. 화면 앞에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다가 이겸을 불렀다.
"부장님, 이거 보세요. 캐피탈 쪽 자금 이동 패턴인데요. 38퍼센트 증가가 한 번에 일어난 게 아니에요. 세 번에 나눠서, 근데 날짜 간격이 딱 이십일이에요. 규칙적이에요."
이겸이 가온의 화면 앞으로 갔다. 그래프가 세 개의 계단을 그리고 있었다. 이십일 간격. 분기 결산 주기와 살짝 어긋나는 간격이었다. 이겸은 그 간격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외부 법인으로 자금을 넘기기 전에 내부 승인 체계를 우회하는 방법이었다. 이십일은 내부 결재 알림이 뜨기 전 창문이었다.
이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온이 화면을 보다가 이겸을 봤다.
"뭔지 아시는 것 같은데요."
이겸은 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아직 몰라. 숫자만 저장해 둬."
가온이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저장은 이미 했어요."
사무실 불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이겸은 마지막까지 남아 제안서를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열여섯 페이지 안에 이겸이 아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가장 정교한 부분이었다. 이름을 지우고 구조만 남겨 놓은 서류. 이겸은 그 구조가 누구의 손으로 설계됐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이 지금 이 서류에 이겸의 이름이 찍히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이겸은 수첩을 닫았다. 오늘 밤은 여기까지였다. 나흘이 있었다. 나흘 안에 이겸은 이 제안서를 도구로 바꿔야 했다—승인하는 쪽이 아니라, 균열을 내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