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 비가 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바닥이 젖어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물을 뿌린 것인지, 아니면 어젯밤 잠깐 내린 것이 여기까지 흘러온 것인지, 선우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구청 접수 마감이 오늘 오후 다섯 시였고, 박 씨와 조 씨를 만나기 전에 마틴 가게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골목 끝에서부터 걸어 들어오는데 뭔가 다른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철거된 점포 세 곳의 셔터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A4 용지에 손으로 쓴 이름들이었다. 매직으로 굵게 눌러 쓴 글씨였는데, 잉크가 번진 자리도 있었다. 첫 번째 셔터에는 '박인숙', 두 번째에는 '이창호·이창호처', 세 번째에는 이름이 세 개였다. 테이프를 여러 겹 겹쳐 붙인 탓에 종이 모서리가 조금 들려 있었고, 아침 바람에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선우는 셔터 앞에서 멈췄다. 이름들을 한 번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읽었다. 박인숙. 이창호. 그 이름들이 낯선 건 아니었다. 세입자 명부 원본에서 봤던 이름들이었다. 삭제된 버전에서는 없었던.
"누가 한 거야."
혼잣말이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방금 봤어요."
장하늘이었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커피 컵을 들고 있었다. 서울 외곽 골목치고는 이른 시각에 기자가 여기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은 게 어색했다. 선우는 뒤를 돌아봤다.
"어젯밤에 붙인 거 같은데요. 테이프가 아직 깨끗해요."
장하늘이 셔터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서 종이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찍지는 않았다. 카메라를 꺼내지 않은 채로 그냥 서 있었다. 선우는 그게 눈에 들어왔다.
"찍어요?"
"모르겠어요."
짧은 대답이었다. 장하늘은 커피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셔터를 바라봤다.
"기사로 쓰면 좋은 그림이긴 한데. 근데 이게 기사가 맞는지. 누군가 밤에 나와서 이름을 써 붙인 거잖아요. 지워진 이름을 다시 붙인 거잖아요."
선우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장하늘이 말을 이었다.
"기사 쓰면 조합이 바로 떼어낼 거예요. 오늘 오전 안에요."
그 말이 맞았다. 선우는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세 장. 각도를 달리해서. 그냥 기록용이었다. 장하늘이 옆에서 그걸 보더니 결국 자기도 카메라를 꺼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잠깐 셔터를 찍었다. 뭔가 합의를 한 것도 아니고, 말을 맞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같이 찍었다.
서미라한테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십 분 뒤였다. 선우가 마틴 가게 쪽으로 막 발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셔터 봤어요?"
"봤습니다."
"나도 봤어요. 박인숙 씨."
전화기 너머로 서미라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선우는 잠깐 기다렸다. 서미라가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아시는 분이에요?"
"우리 골목 사람이에요. 이 년 전에 나간 사람. 임대인이 계약 안 올려준다고 해서 그냥 나간 줄 알았는데."
잠깐 사이가 있었다.
"그때 조합이 먼저 임대인한테 연락했다는 말이 있었어요. 확인은 못 했고."
선우는 젖은 골목 바닥을 내려다봤다. 물이 배수구 쪽으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누가 붙인 건지 알아요?"
"몰라요. 근데 아무나 할 수 있는 짓은 아니에요.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한 거니까."
통화를 끊고 선우는 마틴 가게 앞에 섰다. 셔터는 어제와 똑같이 반쯤 내려가 있었다.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넘었는데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선우는 허리를 숙여서 반쯤 열린 셔터 아래로 들여다봤다. 공구 박스가 어제보다 더 열려 있었다. 작업대 위에 오토바이 부품이 올라가 있었다. 사람이 일하다 자리를 비운 것 같은 모양이었다.
"마틴 씨."
대답이 없었다. 선우는 한 번 더 불렀다. 역시 없었다. 셔터 안으로 들어가는 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선우는 그냥 몸을 세웠다.
박 씨와 조 씨를 만나는 건 오전 열한 시로 잡혀 있었다. 골목 끝 분식집이었다. 서미라가 자리를 잡아놨다. 선우가 거기까지 걸어가는 동안 셔터 위 이름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박인숙. 이창호. 지워진 것들이 다시 붙는 데 종이 한 장과 매직 하나면 됐다. 그리고 누군가 그걸 밤에 혼자 하고 갔다는 것.
분식집에 먼저 와 있던 건 조 씨였다. 박 씨는 오 분 늦게 들어왔다. 두 사람 다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서미라는 자리에 없었다. 선우는 혼자였다.
"서미라 대표님은요?"
조 씨가 물었다. 선우는 잠깐 앉아 있다가 말했다.
"오실 거예요. 제가 먼저 얘기 드리려고요."
박 씨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가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선우는 그 움직임을 봤다. 뭔가 말을 꺼내기 불편한 사람의 동작이었다.
"조합 쪽에서 연락 왔죠."
선우가 먼저 말했다. 박 씨와 조 씨가 동시에 조금 굳었다.
"부정하실 필요 없어요. 어제 회의 두 시간 만에 연락 갔으니까. 저도 알고 있어요."
조 씨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박 씨가 말했다.
"오십만 원이에요. 지금 당장 주겠다고요."
"알아요."
"저 지금 이번 달 임대료가 없어요. 진짜로요."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씨의 얼굴을 봤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기도 했지만 거짓말을 할 여유가 없는 얼굴이었다.
"서명 빼시면 제안서가 요건 미달이에요. 두 분 중 한 분이라도요."
"그거 알아서 더 미안한 거예요."
박 씨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분식집 안에 냄비 끓는 소리가 났다. 국물 냄새가 났다. 선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잠깐 그 소리를 들었다.
서미라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테이블 분위기를 읽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 박 씨 옆에 앉았다. 선우 맞은편이었다. 서미라는 선우를 보지 않고 박 씨를 봤다.
"오늘 골목 어귀 셔터 봤어요?"
박 씨가 고개를 들었다.
"박인숙 씨 이름 붙어 있어요. 이창호 씨 이름도."
박 씨의 눈이 흔들렸다. 아는 이름인 모양이었다. 서미라가 말을 이어갔다.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밤에 나가서 한 거예요. 지워진 이름 다시 쓴 거예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분식집 안이 냄비 소리만 남았다. 선우는 그 침묵이 얼마나 오래갈지 기다렸다. 오래 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침묵이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결국 박 씨가 먼저 말했다.
"오늘 다섯 시까지잖아요."
"네."
"생각해볼게요."
확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달랐다. 선우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엎어놓은 채로 그냥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골목이 보였다. 어귀 셔터 쪽은 이 자리에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 이름들이 아직 붙어 있을지, 아니면 이미 누가 뜯었을지, 선우는 자꾸 그 생각이 났다. 이름을 붙인 사람이 마틴인지도 몰랐다. 공구 박스가 열려 있었고, 새벽에 골목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없는 사람으로 분류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