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아홉 시 사십 분, 해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겸은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모니터를 보고 있지 않았다. 화면에는 어제 민가온이 넘긴 물류 코드 정리 파일이 열려 있었다. 발송 코드 항목 옆에 이니셜 두 글자. 수신 확인 서명란에 같은 두 글자. 이겸은 그 줄을 이미 열 번은 넘게 읽었다. 읽는다고 뭔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해진이 오기 전까지는 판단을 보류하는 게 맞았다. 이겸은 커피를 집었다. 미지근했다. 그냥 내려놓았다.
사무실 안은 조용했다. 에어컨 실외기 소리가 창문 너머로 낮게 깔렸고, 복도 쪽에서 가끔 발소리가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이겸은 커피잔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이 먼저 알았다. 뭔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해진이 면담 요청을 넣은 건 사흘 전이었다. 물류 담당자 쪽에서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그게 오히려 이겸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저항이 없는 자리에는 대개 함정이 있거나, 아무것도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이겸은 해진이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부장님, 안에 계셨네요."
차준석이었다. 검은 재킷에 흰 셔츠, 단추 하나를 열어 둔 채였다. 태성지주 차기 총수 후보가 내부감사팀 사무실에 들어서는 건 드문 일이었다. 준석은 드물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웃음이 먼저였다. 눈이 아니라 입 쪽에서 출발하는 웃음이었다.
"합동 실무회의 건으로 확인할 게 있어서요. 아, 바쁘세요?"
"앉으세요."
이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화면을 닫지도 않았다. 닫으면 뭔가를 숨긴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았다. 준석은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면서 한 번 더 웃었다. 이겸은 그 웃음이 몇 초짜리인지 속으로 쟀다. 약 이 초. 조금 길었다.
"지난번 회의에서 부장님이 예외 항목 쪽을 보신 것 같던데. 계열사 CFO 쪽에서 문의가 왔어요. 어느 범위까지 보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준석은 말하면서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편하게 앉는 사람의 자세였다.
"공식 요청은 아니고요. 그냥 미리 알면 서로 편하잖아요."
이겸은 잠깐 말이 없었다. 창문 쪽에서 에어컨 바람이 낮게 돌았다. 프린터가 대기 상태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준석의 말은 부드러웠고, 질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어느 쪽으로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겸은 그 구조를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준석은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날을 세우지 않아서 반박할 수 없고, 물러서지 않아서 무시할 수도 없는 자리. 정확히 그 자리에 준석은 언제나 있었다.
"어느 범위까지 보는지는 감사 계획서에 명시된 대로입니다."
이겸은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CFO 쪽에서 공식 요청이 오면 공식 절차로 답변드리겠다고 전해 주세요."
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은 그대로였다.
"그렇죠,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 없이 재킷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명함이나 서류 같은 걸 꺼낼 것 같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손을 다시 뺐다.
"근데 부장님, 저도 사실 이쪽 구조를 다 파악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승계 과정에서 불투명한 거 있으면 저한테 직접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저도 알고 싶거든요."
이겸은 그 말을 들으면서 준석의 눈을 봤다. 맑았다. 불편함이 없었다. 그게 더 불편했다. 이겸은 이번 생에서 준석을 여러 번 관찰했다. 합동 실무회의 자리 배치에서도, 강인호가 고개를 끄덕이던 각도에서도. 준석은 언제나 한 걸음 뒤에 있었다. 결정적인 장면마다 정확히 한 걸음. 그 자리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고, 동시에 뭔가를 원할 때는 가장 가까운 자리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이겸이 말했다.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준석은 이 초 동안 이겸을 봤다. 그리고 웃었다. 이번엔 눈도 같이 웃었다. 더 자연스러웠다. 이겸은 그게 연습된 건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생하세요"라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했다.
이겸은 잠시 문 쪽을 바라봤다. 손에 쥔 게 없었다. 준석이 뭔가를 주고 간 것도 아니었고, 가져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를 넘긴 기분이었다. 이겸은 그 감각이 어디서 오는 건지 따져 봤다. 준석이 CFO 쪽 문의를 언급한 것. 공식 요청이 아니라는 말. 직접 말해 달라는 제안. 그 순서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도움을 주겠다는 말은 언제나 정보를 받겠다는 말의 다른 형태였다. 이겸은 그걸 전생에서 배웠다. 배운 값이 얼마였는지는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이겸은 일어나서 준석이 앉았던 의자를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짧게 났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모니터 화면이 절전 모드로 꺼져 있었다. 이겸은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다시 켰다. 물류 코드 파일이 그대로 열렸다. 이니셜 두 글자가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열 시 이 분에 해진이 돌아왔다. 코트를 벗으면서 가방을 어깨에서 내리는 동작이 조금 빠른 걸 이겸이 먼저 알아챘다.
"담당자가 바뀌어 있었어요."
이겸이 고개를 들었다. 해진은 자리에 앉기 전에 이겸 쪽을 봤다. 표정이 평평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계산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면담 직전에 통보가 왔어요. 기존 담당자 김진협 씨는 어제부로 다른 부서로 발령났고, 오늘 면담 응대는 후임 담당자가 한다고. 후임은 입사 삼 개월차였어요. 아는 게 없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게 맞는 사람."
이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진이 파일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후임 담당자가 건네준 서류가 있는데요. 인수인계용이라고 했는데."
해진이 파일을 열었다.
"물류 코드 목록이에요. 근데 민가온 씨가 표시해 준 이니셜 두 개가 여기도 있어요. 발송 코드 기준으로 같은 날짜에 묶인 건."
이겸은 파일을 당겨 들었다. 손가락으로 줄을 짚었다. 이니셜은 두 곳 모두 같았다. 서명 방식도 같았다. 날짜는 해진이 면담을 요청하기 이틀 전이었다. 누군가 미리 알고 서류를 준비한 것인지, 아니면 인수인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딸려 온 것인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었다. 이겸은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뒷장은 비어 있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김진협 씨 발령은 어디로요."
"태성물류 지방 거점이요. 익산."
이겸은 파일을 덮었다. 창문 밖으로 오전의 햇빛이 비스듬하게 들어왔다. 해진이 조용히 덧붙였다.
"면담 요청 넣은 게 사흘 전이에요. 발령은 어제부. 누군가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진도 더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앉았다. 이겸은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해진은 확인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판단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 차이가 이겸에게는 중요했다.
이겸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모니터에 물류 코드 파일이 아직 열려 있었다. 이겸은 스크롤을 내리지 않았다. 준석의 웃음, 김진협의 발령, 인수인계 서류 안의 이니셜. 세 가지가 따로 움직인 건지 같이 움직인 건지, 지금은 확정할 수 없었다. 다만 이겸은 한 가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준석은 아까 감사팀이 어느 범위를 보고 있는지 물었다. 그 질문이 CFO의 문의를 빌려 온 것이라면, 이 서류가 후임 담당자를 통해 흘러 나온 것도 누군가의 설계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설계가 이겸을 돕기 위한 것인지, 이겸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려는 것인지, 웃음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해진이 조용히 말했다.
"다음에 어떻게 해요."
이겸은 잠시 창문 쪽을 봤다가 대답했다.
"민가온 씨한테 연락해요. 이 이니셜이 동일 인물인지 먼저 확인해야 해."
해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들었다. 이겸은 그 모습을 보면서 준석의 마지막 웃음을 다시 떠올렸다. 눈이 같이 웃었던 그 순간. 이겸은 아직도 그게 진짜인지 연습인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번 생에서 준석이 가장 위험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