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아침 여덟 시 오십 분, 현우는 자기 책상 앞에 서서 예약 메모를 세 번째 읽고 있었다. 박미경. 나이 사십삼. 연락처. 그리고 맨 아래 작은 글씨로 적힌 한 줄.
'현우 설계사 요청.'
그게 전부였다. 직업도 없고, 가족 구성도 없고, 왜 왔는지도 없었다. 현우는 메모를 뒤집어 봤다. 뒷면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그는 메모를 다시 앞으로 돌려놓고 한 번 더 읽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이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뭘 그렇게 봐요."
아라가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물었다. 현우는 메모를 슬쩍 뒤집었다.
"아, 그냥요. 오늘 상담 준비."
"이름이랑 연락처 말고 아는 거 없죠?"
"…어떻게 알았어요?" "그 표정." 아라는 가방을 의자 옆에 걸면서 덧붙였다. "김정호 씨 소개면 기본 정보가 원래 적어요. 그분이 원래 말이 없거든요."
그 말이 위로인지 경고인지 현우는 판단하지 못했다. 아라는 이미 노트북을 켜고 있었다. 현우는 메모를 서랍 위에 올려두고 수첩을 꺼냈다. 뭔가 적어야 할 것 같았는데, 펜을 쥐고 나니 첫 줄이 떠오르지 않았다.
열 시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는데, 현우는 벌써 두 번이나 상담실 쪽 복도를 흘낏 봤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그는 수첩에 예상 질문을 적기 시작했다. 보험 가입 이력, 현재 유지 중인 상품, 가족 구성, 최근 건강 변화. 쓰다 보니 너무 교과서 같았다. 마치 시험 답안지처럼 반듯하고, 그래서 오히려 쓸모없어 보이는 종류의 반듯함. 현우는 펜을 내려놓고 그걸 보다가, 결국 한 줄 더 적었다.
'왜 나를 요청했을까.'
탕비실에서 종이컵 두 개를 가져온 건 아라였다. 현우 책상 위에 하나를 올려놓고 말도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커피 냄새가 피어올랐다. 싸구려 믹스 특유의, 달고 약간 탄 냄새. 현우는 컵을 들었다가 내려놨다가 하다가 결국 한 모금 마셨다. 아까보다 조금 덜 긴장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기분 탓인 것 같기도 했다.
"선배."
"응."
"첫 상담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예요? 진짜로요."
아라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안 튀는 것."
"…그게 다예요?"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잘 보이려다가 오버하는 게 제일 티 나요. 그냥 거기 있으면 돼요."
현우는 그 말을 수첩에 받아 적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적으면 더 이상하게 될 것 같았다. 그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창밖을 봤다. 오전 햇볕이 아직 낮게 깔려 있었다.
열 시 이십 분쯤, 현우는 상담실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러 들어갔다가 의자 배치가 살짝 틀어진 걸 발견하고 바로잡았다. 그러고 나서 보니 테이블 위에 물 컵 두 개가 세팅되어 있었는데, 하나가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그것도 고쳤다. 나오면서 문을 닫는데, 자기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잠깐 멍해졌다. 에어컨이 목적이었는지, 물 컵이 목적이었는지. 아마 둘 다 아니었을 것이다.
"의자 돌려놨어요?"
아라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또."
"세 번째 들어갔잖아요."
현우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시계를 봤다. 열 시 이십칠 분. 그는 수첩을 다시 펼쳤다가 덮었다. 펜을 손에 쥐었다가 책상 위에 내려놨다. 그러다 결국 그냥 앉아서 복도 쪽을 바라봤다. 아라가 뭔가 말하려다 참는 것 같았지만, 현우는 모른 척했다.
박미경이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정확히 열 시 삼십 분이었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현우는 일어서면서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정현우입니다."
"박미경이에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았다. 악수는 가볍지 않았다. 현우가 예상했던 분위기, 그러니까 처음 오는 사람 특유의 약간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그 공기가 없었다. 박미경은 마치 이 상담실에 여러 번 와본 사람처럼 의자를 당겨 앉고,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게 거만한 느낌은 아니었다. 익숙한 것과 여유 있는 것의 차이, 라고 현우는 속으로 정리했다. 그 차이가 정확히 뭔지는 아직 몰랐지만.
"김정호 씨한테 연락처를 받으셨다고요."
"네. 정호 씨가 먼저 연락했어요."
"어떻게 아시는 사이세요?" "오래됐어요."
짧은 대답이었다. 현우는 '얼마나요' 하고 물으려다가 멈췄다. 그게 지금 중요한 건지 잘 모르겠어서. 펜 끝이 수첩 위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오늘 어떤 부분이 궁금하셔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박미경은 잠깐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그 침묵이 길지는 않았지만, 짧지도 않았다. 현우는 채우려는 충동을 눌렀다. 아라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냥 거기 있으면 된다고.
"정리하고 싶어서요."
"어떤 부분을요?"
"전부요."
전부. 현우는 그 단어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랐다. 보험 전부인지, 다른 무언가 전부인지. 물어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지금 바로 묻는 게 맞는 건지도 몰랐다. 그는 일단 받아 적었다.
'전부 정리.'
쓰고 나서 보니 그 두 글자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상담은 사십 분 정도 이어졌다. 박미경은 현재 가입된 상품 이름 두 개를 말했고, 갱신 시기가 내년 초라고 했고, 따로 챙겨보지 못했다고 했다. 말이 많지 않았는데도 맥락이 분명했다. 현우는 받아 적으면서도 계속 뭔가 빠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보가 부족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정보 뒤에 뭔가가 더 있는데, 지금은 안 나오는 것 같았다. 박미경은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딱 필요한 만큼만 말했다. 한 문장이 끝나면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그 리듬이 현우를 조금 긴장하게 만들었다. 말이 많은 사람보다 오히려 더.
상담이 끝날 즈음, 박미경이 가방을 들면서 말했다.
"정호 씨가 꼼꼼하다고 하던데."
"감사합니다."
"칭찬은 아직 아니에요. 다음에 와서 확인해볼게요."
문이 닫혔다. 현우는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칭찬은 아직 아니다. 그 말이 어딘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기대를 열어둔 말처럼 들렸다. 아니면 그냥 테스트 중이라는 뜻이거나. 어느 쪽이든, 그녀는 다음을 전제로 말했다. 그게 지금은 그걸로 충분한 것 같았다.
책상으로 돌아온 현우는 메모를 다시 폈다. 적힌 것들 중에서 '전부 정리하고 싶다'는 말이 가장 눈에 걸렸다. 보험을 정리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정리하겠다는 건지. 그리고 김정호 씨가 두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는 이유가 뭔지. 윤상철 씨 때도, 이번에도. '현우 설계사 요청'이라는 문구가 다시 눈에 걸렸다. 김정호 씨가 그 말을 쓴 건지, 박미경 씨가 그 말을 한 건지, 현우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어땠어요?"
아라가 물었다.
"조용한 분이었어요."
"조용한 게 제일 어렵죠."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첩을 덮었다. 창밖으로 오전 햇볕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다음 재방문은 박미경 씨가 먼저 연락주기로 했다. 언제라는 말은 없었다. 현우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다음에 와서 확인해볼게요'라는 말이, 윤상철 씨의 '생각해보겠습니다'와는 다른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어떻게 다른지는, 그녀가 다시 와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우는 종이컵을 들었다.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그래도 마저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