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아라의 자리에 재킷이 걸려 있었다.
현우는 그걸 보고 잠깐 멈췄다. 일주일 만이었다. 책상 위에는 아직 포장이 뜯기지 않은 믹스커피 박스가 한 칸 올라와 있었고, 의자 등받이에는 아라가 항상 걸어두는 회색 카디건이 반쯤 접힌 채 놓여 있었다. 사무실 냄새는 어제랑 똑같은데도 오늘은 묘하게 달랐다. 현우는 자기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괜히 모니터 각도를 고쳤다. 고칠 필요가 없는 각도였다. 손이 먼저 움직였고, 머리는 나중에 알아챘다.
"왔어요?"
탕비실 쪽에서 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나오는데,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 밑이 약간 부어 있었고, 걸음도 평소보다 느렸다. 현우는 일어서려다가 그냥 앉았다. 아라가 먼저 종이컵 하나를 현우 책상 모서리에 내려놓았다.
"감사 어떻게 됐어요?"
"다음 주에 결과 나와."
"고생하셨겠다." "현우 씨가 더 고생했지."
그 말이 생각보다 빠르게 나와서 현우는 잠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아라는 이미 자기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있었다. 현우는 종이컵을 들었다. 따뜻했다. 커피 향이 코끝에 닿는 순간, 지난 일주일이 뭉텅이로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윤상철 씨에게 모른다고 두 번 말했던 것, 박 팀장 눈치를 혼자 읽어야 했던 오전들. 그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뭔가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오전 일정은 특별할 게 없었다. 현우는 지난주 상담 건 두 개의 사후 메모를 정리하고, 윤상철 씨와의 통화 내용을 간략히 파일에 적어뒀다. 통화는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윤상철 씨는 다음 달 초에 한 번 더 만나자고 했고, 현우는 "네, 언제든 편한 시간에 연락 주세요." 하고 끊었다. 전화기를 내려다보면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뭔가 더 해야 했나, 아니면 이게 맞는 건가. 정답을 모르는 채로 저장 버튼을 눌렀다. 파일 이름을 입력하는 칸에서 펜 끝이 잠깐 망설였다. 윤상철_통화_1차. 숫자를 붙이고 나서야 손이 움직였다.
점심 시간 직전, 현우는 박 팀장에게 불려갔다.
팀장실 문을 열었을 때 박 팀장은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현우가 의자 끝에 앉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지난주 윤상철 씨 통화 어떻게 됐어?"
"다음 달 초에 한 번 더 뵙기로 했습니다. 지금 당장 결정하시기보다 좀 더 생각해보시겠다고 하셨고요."
"시간 끌면 식어." "네." "근데 김정호 소개 건이니까. 무리하게 밀지 마."
현우는 그 두 문장이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 팀장은 다시 모니터를 봤다. 면담은 그걸로 끝이었다. 현우는 일어서면서 뭔가 한마디 더 보태야 할 것 같은 기분을 억눌렀다. 보탤 말이 없었다. 아직은.
돌아오는 길에 복도에서 선배 이덕수를 마주쳤다. 이덕수는 현우보다 세 살 위였고, 입사는 두 해 먼저였다. 항상 어딘가 자신감이 넘쳤고, 그 자신감이 현우는 가끔 불편했다.
"야, 지난주에 혼자 다 버텼다며?"
이덕수가 어깨를 툭 쳤다. 현우는 웃으면서 말했다.
"버티긴요, 그냥 가만히 있었죠."
"그게 버틴 거야."
이덕수는 웃으면서 지나갔다. 현우는 그 자리에 잠깐 서 있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가만히 있었다는 말이 맞는 말이었는데, 왜 뱉고 나서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더 잘 버텼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인정받고 싶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좀 민망했다.
오후 두 시쯤, 현우는 탕비실에서 두 번째 커피를 탔다.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붓는데 믹스커피 봉지가 잘 뜯기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두 번 당기다가 결국 이로 뜯었다. 아무도 안 봤다. 현우는 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오전에 박 팀장이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시간 끌면 식어. 무리하게 밀지 마. 두 문장 사이 어딘가에 정답이 있을 텐데,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 감이 없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달았다. 봉지를 두 개 넣은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아 멍하니 화면을 보다가, 현우는 서랍을 열었다. 지난주에 윤상철 씨 통화 전에 끄적였던 메모지가 나왔다. 질문 목록이었는데, 절반은 못 물어봤다. 현우는 그걸 접어서 다시 서랍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버리지는 않았다.
오후 세 시쯤이었다.
현우는 다음 주 상담 예약 목록을 확인하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화요일 오전 열 시 반 칸에 이름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박미경.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메모가 붙어 있었다. 김정호 소개. 현우 설계사 요청.
현우는 화면을 한 번 더 읽었다. 김정호 씨가 또 소개를 한 건데, 이번엔 이름이 달랐다. 윤상철 씨 쪽이 아니었다. 현우는 잠깐 생각하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라는 서류를 보고 있었다.
"선배."
"응."
"김정호 씨가 또 소개를 해줬는데요."
아라가 서류에서 눈을 뗐다. 현우가 화면을 가리켰다.
"박미경 씨. 화요일 오전이에요."
"알아?"
"아니요. 처음 보는 이름이에요."
아라는 잠깐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김정호 씨가 왜 이름을 둘이나 넣었지."
혼잣말 같은 말이었다. 현우는 그게 질문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고 그냥 화면을 다시 봤다. 박미경. 나이와 연락처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현우 설계사 요청이라는 메모만 빼면. 그 다섯 글자가 이상하게 눈에 걸렸다. 요청. 누가 요청한 건지,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현우는 커서를 한 번 올렸다가 내렸다. 클릭은 하지 않았다.
아라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방금 말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현우는 그 침묵을 억지로 메우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뭐라도 끼워 넣었을 텐데. 그냥 화면을 닫고 수첩을 꺼냈다.
퇴근 무렵, 사무실에 현우 혼자 남았다. 아라는 팀장실 쪽으로 불려갔고, 이덕수는 외근 나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형광등 아래 혼자 앉아 있으니 낮보다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에어컨 팬 소리, 복도 어딘가에서 울리는 전화 소리. 그리고 자기 휴대폰이 한 번 진동했다가 멈추는 소리. 확인하니 스팸 문자였다. 현우는 화면을 끄면서 수첩을 폈다.
화요일 칸에 적었다. 박미경. 소개: 김정호. 그리고 아직 모르는 것들을 빈칸으로 남겨뒀다.
아라가 팀장실에서 나오면서 현우 쪽을 잠깐 봤다.
"화요일 전에 미리 간단하게 메모 해둬. 소개 경로, 관계, 예상 니즈."
"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소개가 있으면 이미 반 이상은 열려 있는 거야. 그걸 닫지만 않으면 돼."
아라는 그 말을 끝으로 나갔다. 현우는 잠시 그 말을 씹었다. 닫지만 않으면 된다. 지난주에 혼자 했던 통화들이 떠올랐다. 모른다고 두 번 말했고, 두 번 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작은 성취처럼 느껴졌는데, 오늘은 그게 출발점이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선언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수첩에 이름을 적고, 빈칸을 그대로 뒀다. 그게 달라진 부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현우는 수첩을 다시 폈다. 박미경. 빈칸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게 불안하지 않았다. 아직 모른다는 게, 아직 시작이라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현우는 수첩을 덮고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