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이십 분이었다. 차유리가 동쪽 계단을 내려오며 복도 불빛이 없는 구간에 발을 들였을 때, 손에 들고 있던 명단 종이가 땀에 젖어 있다는 걸 처음 알아챘다. 이미 한 번 구겨졌다가 펴진 자국이 있었다. 유리는 그게 자기가 구긴 건지, 정윤호가 주머니에 넣었다 꺼낸 건지 기억하지 못했다.
복도 끝쪽 계단실 쪽에서 하린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왔어요?"
짧은 물음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게 너무 길었던 사람이 소리를 내는 방식이었다. 유리는 발걸음을 좀 더 빠르게 하면서 답했다.
"응. 셋 다 내려갔어. 계단 중간 지점에 윤호 씨 세워 뒀고."
하린은 들것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들것 위에 이름 모름 환자가 있었다. 의식은 없었다. 숨은 쉬고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유리의 발걸음을 잠깐 멈추게 했다.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 상황에서 왜 안도보다 무게로 느껴지는지, 유리는 그 감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명단 봤어요."
하린이 말했다. 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다봤다.
"어디서?"
"윤호 씨가 두 번째 줄 쓸 때요. 다른 이름들 옆에는 번호 있는데, 이 분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유리는 명단을 펼쳤다. 비상등 붉은빛 아래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손전등을 꺼내 비추자 명단 두 번째 줄 아래쪽에 이름 없이 줄만 그어진 한 칸이 보였다. 번호도 없었다. 이동 가능 여부 표시도 없었다. 그냥 줄이었다. 누군가 자리는 만들었지만 거기에 채울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이었다.
유리는 한동안 그 줄을 보고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윤호 씨한테 물어봤어요?"
"아뇨. 윤호 씨가 계단으로 가고 나서 봤어요."
하린은 환자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두고 말했다. 유리는 명단을 접어서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서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이름 모름. 유리는 그 말이 싫었다. 병원에서 신원 불명 환자를 처리하는 방식은 시스템이 있었다. 번호를 붙이고, 임시 차트를 만들고, 담당자를 지정했다. 그게 없으면 환자는 기록에서 떠다니는 상태가 됐다. 시스템이 멀쩡할 때는 그게 나중에 수습이 됐다. 지금은 나중이 없었다.
유리는 들것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환자의 맥박을 다시 짚었다. 손목이 아니라 목이었다. 손목은 너무 약하게 뛰고 있어서 확인이 느렸다. 목에서는 맥박이 불규칙하게 느껴졌다. 빠르지 않았다. 느리고 불안정했다.
"얼마나 됐어, 이 상태가?"
"제가 돌아왔을 때부터요. 한 삼십 분쯤."
"숨은?"
"계속 있었어요. 근데 가끔 멈추는 것 같기도 했어요.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린이 솔직하게 말했다. 거짓말을 섞지 않는 방식이었다. 유리는 그게 더 좋았다. 확실하지 않은 걸 확실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재난 상황에서 제일 위험했다.
"산소통 남은 거 얼마야."
"한 칸 조금 안 남았어요. 0.2 정도."
유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0.2면 이 환자 상태에서 길어야 두 시간이었다. 들것 이동을 감행하면 체력 소모가 올라가고 그게 숨에 영향을 줬다. 움직이지 않으면 계단실 균열이 더 진행될 경우 이 구역 자체가 위험해졌다. 어느 쪽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유리는 일어서면서 계단실 쪽 벽을 봤다. 어젯밤에 확인했던 균열이 있는 방향이었다. 비상등 불빛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았다. 손전등을 들어서 비췄다.
균열은 천장 방향으로 더 올라가 있었다. 어젯밤보다 확실히 길어졌다. 유리는 손전등을 들고 가까이 가서 균열 끝부분에 손가락을 얹었다. 어젯밤에 손으로 표시해 둔 자국이 아래쪽에 있었다. 지금 균열 끝은 그 위였다.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눈대중으로 재기 어려웠지만 두 손가락 폭은 됐다.
"윤호 씨한테 연락할 방법 있어?"
"무전기 그쪽에 없어요. 가져갔어요."
유리는 손전등을 내리고 잠깐 생각했다. 무전기는 선발조가 게이트 쪽으로 갈 때 들고 갔고 후발조 쪽에 남은 건 하나였다. 그 하나를 윤호가 계단 중간 지점에 갖고 있었다. 유리 손에는 없었다.
"올라가서 데려올게."
하린이 말했다.
"아니."
유리의 대답이 빨랐다.
"혼자 이 분 두고 가면 안 돼. 내가 올라갈게."
"저도 계단 알아요."
"알아. 근데 여기 혼자 있어야 하는 사람이 네가 맞아."
하린이 뭔가 말하려다 멈췄다. 유리는 그 침묵이 항의인지 수긍인지 판단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바꿀 시간이 없었다.
유리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하린은 들것 옆에 남았다. 비상등이 천장에서 붉은빛을 흘리고 있었다. 환자의 얼굴이 그 빛 아래서 납빛처럼 보였다. 하린은 명단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명단 생각이 자꾸 났다.
이름 없는 줄. 번호 없는 칸. 이동 여부 표시 없음.
기록에서 빠진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하린은 오늘 밤 처음으로 실제로 보고 있었다. 병원 시스템에서 이름이 없으면 담당자가 없었다. 담당자가 없으면 누가 챙기는지 불분명했다. 불분명한 것은 급해지면 제일 먼저 잘렸다.
오빠도 어딘가에서 이름 없는 줄로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린은 그 생각을 태블릿 화면으로 밀어냈다. 화면을 켰다. 외부 접속 시도를 다시 걸어봤다. 응답 없음이었다. 선발조 쪽 신호는 세 시 반 이후로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유리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윤호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오다 보니까 이미 내려오고 있더라고. 두 번째 그룹 이동 준비한다고."
"저한테 연락도 없이요?"
유리는 대답 대신 손전등을 껐다. 어두워졌다. 비상등 빛만 남았다.
"윤호 씨한테 명단 물어봤어요?"
하린이 다시 물었다.
유리는 잠깐 있다가 말했다.
"못 물어봤어."
그게 전부였다. 유리는 들것 옆에 다시 앉아서 환자의 호흡을 확인했다. 가슴이 올라왔다 내려갔다. 아직 숨은 있었다. 산소통 게이지가 0.2에서 0.1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유리는 그 숫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름이 없으면 결정도 늦었다. 결정이 늦으면 자원이 먼저 바닥났다. 자원이 바닥나면 기회가 없었다. 그게 시스템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건 지금은 그것을 알면서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린이 조용히 말했다.
"이름 제가 붙여도 돼요?"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명단에. 이름 모름이라고 쓰는 대신 번호라도요. 있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유리는 주머니에서 명단을 꺼냈다. 펼쳤다. 빈 줄을 봤다. 볼펜을 꺼내서 하린에게 건넸다.
하린이 빈 줄 옆에 숫자 하나를 썼다. 1이었다. 유리는 그것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한 순간이 아니었다.
계단실 벽 어딘가에서 낮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균열이 더 움직이는 건지, 건물이 숨 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유리는 다시 손전등을 들어서 벽을 비췄다. 균열은 그 자리에 있었다. 더 길어진 것 같기도 했다. 확인할 방법은 가까이 가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무전기에서 잡음이 났다. 하린이 들고 있던 무전기였다. 아주 짧은 잡음이었다. 하린이 눈을 크게 뜨고 무전기를 귀에 갖다 댔다.
"…세…?"
끊겼다. 세온의 목소리였는지, 다른 사람이었는지, 잡음인지 구분이 안 됐다. 하린은 무전기를 쥔 손을 내리지 않았다. 유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전기는 다시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