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팔 분, 차유리는 처치실 바닥에 놓인 세 환자 표식을 모두 떼어 냈다. ‘복부 수술 여성’, ‘다리 고정 남성’, ‘추가 환자’라고 적힌 종이는 상태를 알리는 데는 쓸 수 있었지만 사람을 부르는 이름이 될 수는 없었다.
유리는 먼저 산소를 쓰던 여성 곁에 앉았다. “지금 대답하기 힘들면 손가락으로 표시해도 됩니다. 원장에 어떤 이름을 적을까요?”
여성은 입술을 축인 뒤 천천히 말했다. “박미숙이에요. 쉰넷. 수술은 봉쇄 이틀 전에 받았고요.”
유리는 이름을 다시 읽어 확인했다. 박미숙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부 절개 부위 통증, 오래 누워 생긴 어지럼, 짧은 보행 뒤 호흡 증가를 상태 칸에 적었다. 감염 여부와 예후는 지금 확인할 수 없다고 별도 표시했다.
다리를 고정한 젊은 남성의 침상 표찰에는 숫자 48만 남아 있었다. 그는 기침을 참다가 “박무성”이라고 말했다. 스물아홉 살, 봉쇄 전 공업지대 연기 노출로 폐 손상을 치료받던 중 계단에서 넘어져 왼쪽 다리를 고정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48은 나이가 아니라 침상 번호예요.” 박무성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이름을 아예 안 물어보니까 그냥 그걸로 불린 거고.”
하린은 기존 메모의 ‘48번’을 지우지 않고 한 줄로 연결했다. 48번 침상 환자와 박무성은 동일인. 번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함께 적었다. 나중에 기록을 비교할 때 둘을 다른 사람으로 세지 않기 위해서였다.
최병호는 마흔두 살이라는 자기 진술과 내과 입원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열감과 탈수, 현기증이 있었지만 의식은 또렷했고 부축하면 짧게 설 수 있었다. 차트 원본은 아직 찾지 못했으므로 진단명이나 감염을 단정하지 않았다.
정윤호는 세 이름을 받아 적다가 펜을 멈췄다. “그러면 이동 순번은 어떻게 합니까. 미숙 씨는 들것, 무성 씨도 들것에 가까운 보조가 필요하고, 병호 씨는 걸을 수 있어도 오래 못 갑니다.”
유리는 순번 대신 조건을 세 칸으로 나눴다. 즉시 처치가 필요한 변화, 이동에 필요한 장비와 사람 수, 당사자가 동의한 방식. 먼저 나가는 사람을 한 줄로 세우기 전에 누가 어떤 지원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지를 적었다.
세온은 게이트에서 돌아온 일곱 명의 상태도 같은 표에 넣었다. 태민은 오른손바닥에 얕은 찰과상이 있었고, 하린은 추위와 피로가 쌓였으며, 도혁은 다친 곳이 없다고 말했다. 말만 믿지 않고 서로 확인한 범위와 본인 진술 범위를 구분했다.
네 시 십칠 분, 북쪽 계단 쪽에서 짧은 파열음이 났다. 먼지가 처치실 문틈으로 밀려들고 천장 조명 하나가 흔들렸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위를 봤지만 유리는 먼저 산소통 밸브와 들것 바퀴 잠금을 확인했다.
태민과 세온이 계단 앞까지 다녀왔다. 벽 균열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벌어졌고, 비상문 위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당장 처치실 천장이 무너진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북쪽 통로를 이동 경로로 쓰기에는 위험했다.
도혁이 설비 도면에 없는 세탁실 통로를 제안했다. 이전에 물류를 옮겨 본 길이라고 했다. 세온은 그 기억을 지도에 실선으로 그리지 않았다. 태민과 하린이 입구와 출구를 확인한 뒤 색을 바꾸기로 했다.
그사이 유리는 박미숙의 들것을 내벽 쪽으로 옮기려 했다. 정윤호가 손잡이를 잡았지만 들것 뒤가 산소통 받침에 걸렸다. 윤호는 힘으로 당기지 않고 멈춤을 외쳤다. 하린이 줄을 들어 올리고 유리가 환자 반응을 확인한 뒤 셋이 다시 움직였다.
박무성은 자기 침상 바퀴 잠금이 풀리지 않는 것을 보고 도구 위치를 알려 줬다. “오른쪽 아래 철사가 걸렸어요. 전에 간호사한테 들었어요.” 태민이 무릎을 꿇고 철사를 빼자 바퀴가 움직였다. 환자는 운반되는 물건이 아니라 자기 이동에 필요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었다.
최병호는 벽을 짚고 세 걸음을 옮겼다가 바로 의자에 앉았다. 유리는 어지럼이 시작된 시각과 회복까지 걸린 시간을 적었다. 걷는 데 성공했다는 이유로 이동 가능 칸에 고정하지 않고, 보조가 필요할 수 있는 상태로 남겼다.
네 시 이십구 분, 세탁실 통로를 확인하러 간 태민과 하린이 돌아왔다. 통로 중간에 세탁 카트가 쓰러져 있었지만 두 사람이 치우면 들것 한 대가 지날 폭은 나왔다. 출구 쪽 방화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바닥에는 물이 얕게 고여 있었다.
세온은 환자 이동을 한꺼번에 시작하지 않았다. 먼저 빈 들것으로 모서리와 경사를 시험하고, 산소통을 따로 밀 때 줄이 닿는 지점을 표시했다. 박미숙과 박무성에게 흔들림과 추위 위험을 설명하고 어느 쪽을 먼저 시험할지 물었다.
박미숙은 산소 연결이 안정된 자신보다 박무성의 바퀴와 다리 고정 상태를 먼저 시험하자고 말했다. 박무성은 반대했다. “미숙 씨 장비가 더 많아요. 먼저 지나가야 뒤에서 길을 고칠 수 있어요.” 두 사람의 말은 자기 자리를 앞당기려는 경쟁이 아니었다.
유리는 두 의견을 듣고 장비 시험과 실제 이동을 나눴다. 빈 들것에는 박미숙의 산소 받침과 같은 무게를 싣고 먼저 보냈다. 실제 환자 이동은 두 사람 상태를 다시 본 뒤 결정하기로 했다. 순번 하나로 모든 위험을 덮지 않았다.
오도혁은 그 과정을 지켜보다가 게이트에서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먼저 보내는 것이 보통이라고 말했다. 태민이 날카롭게 돌아봤지만 세온은 원장을 내밀었다. “보통이라는 말 대신 누가 무엇을 잃는지 여기에 적어 주세요.”
도혁은 한참 뒤 ‘환자가 문밖에 남을 수 있음’이라고 썼다. 자기 연락에서 환자 수를 뺀 사실도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아직 이유 전부를 말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결과를 모르는 척하지는 못하게 됐다.
네 시 삼십육 분, 빈 들것이 세탁실 통로를 통과했다. 중간 경사에서 앞바퀴가 미끄러졌고 태민이 표시한 붉은 천 덕분에 세온이 미리 속도를 줄였다. 하린은 걸린 지점과 통과에 필요한 사람 수를 지도에 써 넣었다.
정윤호는 환자 이름이 적힌 원장 사본을 두 장 만들었다. 한 장은 유리가, 한 장은 세온이 맡았다. 태블릿에는 사진을 저장하되 공개 채널로 환자 상세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게이트가 다시 연락해 와도 총원과 지원 필요 인원만 먼저 알릴 계획이었다.
네 시 사십이 분, 아홉 명은 세탁실 앞 임시 구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미숙은 산소를 유지했고, 박무성은 다리 고정과 호흡을 함께 관찰했으며, 최병호는 물을 조금씩 마셨다. 이동 가능한 여섯은 환자 셋의 장비와 길을 나눠 맡았다.
원장 첫 줄에는 더 이상 번호만 남은 사람이 없었다. 박미숙, 박무성, 최병호. 이름 옆에는 상태와 모르는 항목, 다음 확인 시각이 나란히 적혔다. 첫 순번을 정하는 데 오래 걸린 이유는 사람이 느려서가 아니었다. 누구를 먼저 버리는 결정으로 순번을 대신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린은 침상 번호 48이 적힌 낡은 표찰을 원장에 붙이지 않고 사진으로만 남겼다. 표찰 자체는 박무성의 장비 확인에 필요해 침상에 두되, 호출할 때는 이름을 먼저 쓰기로 했다. 숫자와 이름이 다시 갈라지지 않도록 같은 페이지 번호를 매겼다.
박미숙은 자기 나이가 틀리게 적힌 것을 찾아 쉰셋이 아니라 쉰넷이라고 고쳤다. 유리는 수정 전 글자를 지우지 않고 한 줄을 그어 정정 시각과 확인자를 붙였다. 환자가 자기 기록을 바로잡은 흔적도 의료 상태만큼 중요한 사실이었다.
최병호는 세 사람 가운데 자신만 걸을 수 있다는 말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세온은 자력 보행이 아니라 ‘부축 시 짧은 거리, 기립 뒤 현기증 관찰’이라고 표현을 바꿨다. 누구도 그 문장을 근거로 병호에게 운반 노동을 맡기지 않기로 했다.
네 시 사십오 분, 들것 바퀴와 산소통 받침에 이름표가 아니라 역할표가 달렸다. 앞 손잡이, 뒤 제동, 줄 확인, 환자 반응 확인. 사람이 바뀌어도 누가 무엇을 넘겨받았는지 읽을 수 있게 했다. 이동 순번은 이제 한 사람의 입으로 정하는 명령이 아니라 여러 확인이 맞물리는 절차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