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뒤 출발한다는 결정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세온은 같은 결정을 다시 묻지 않았다. 대신 처치대 위 장부 옆에 출발 전 확인할 항목을 세 줄로 나눴다. 사람, 장비, 경로. 한 줄이라도 비면 서쪽 검문소까지 팔백 미터라는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응급실 천장 비상등이 두 번 흔들렸다. 유리는 산소 장비와 발전기 상태를 보고 메모판의 ‘04:00’ 아래 문장을 지웠다. 그 자리에 더 작은 글씨로 다시 썼다.
현재 사용량이 유지된다는 가정의 재평가 시각. 환자의 생존을 보장하거나 사망을 예고하는 시각이 아님.
“지원이 끊기면 위험이 커지는 건 맞아요.” 유리가 말했다. “하지만 이 숫자 하나로 두 사람이 몇 시까지 산다거나 죽는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장비 상태도, 환자 상태도 계속 달라져요.”
세온은 장부에 총원을 다시 적었다. 이동 가능 여섯. 기존 이동 곤란 환자 둘. 총 여덟. 밖으로 나갈 예정은 세온, 태민, 하린 셋이었다. 유리와 윤호, 도혁은 환자 둘과 응급실에 남는다. 아직 누구도 출발하지 않았고, 누구도 명단에서 빠지지 않았다.
준비물도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셌다. 손전등 둘은 켜지는 것만 확인했고 남은 시간을 보장하지 않았다. 표시용 천, 마스크, 물 한 병은 가져갈 묶음에 놓았다. 장갑과 처치 물품은 포장이 온전한 것만 따로 뒀다. 세온은 물자를 ‘있다’와 ‘쓸 수 있다’로 나누었다. 하린은 태블릿 전원을 계속 켜 두지 않고 필요한 화면만 열었다. 태민은 무게보다 손을 비워 둘 수 있는지를 먼저 봤다. 셋이 들 수 있는 양보다, 돌아올 때 환자나 연료를 함께 옮길 여지를 남기는 쪽을 택했다.
태민은 손전등 두 개와 표시용 천을 바닥에 놓았다. 하린은 태블릿의 로그 화면을 메모리 카드에 복제하고 있었다. 복제가 끝나자 원본 화면을 닫고, 종이에 시각과 보이는 코드만 옮겼다.
“세 시 십오 분 접속 기록, 다시 봤어요.”
하린이 종이를 내밀었다. 병원 서쪽 출구 자동문 코드를 조회한 외부 단말기 기록이었다. 화면에 남은 식별 문자열 앞에는 MCP라는 세 글자가 붙어 있었다.
“군 장비라는 뜻입니까?” 세온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제가 가진 공개 캐시에는 같은 분류가 없어요. 약자만 보고 군이나 민간이라고 정하면 안 돼요. 시간 동기화도 맞는지 확인 못 했고요.”
태민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럼 확인된 건 서쪽 출구 코드가 외부에서 조회됐다는 흔적뿐이군.”
“그 흔적이 진짜 로그라는 전제까지 붙여야 해요.” 하린이 말했다. “서버 시간이 틀렸거나 기록이 덮였을 수도 있어요.”
세온은 ‘외부 조회 확정’이라고 쓰려던 칸을 지우고 ‘외부 조회 흔적, 주체·정확 시각 미확인’으로 고쳤다. 그 한 줄 때문에 목적지를 바꾸지는 않았다. 다만 조회된 서쪽 출구를 그대로 첫 이동문으로 쓰는 것도 피하기로 했다.
태민이 병원 피난 안내도를 펼쳤다. 서쪽 출구를 피해 북쪽으로 나가려면 응급실 뒤 서비스 복도와 비상계단을 거쳐야 했다. 그 계단은 위층 처치실과 5층 설비 창고에도 이어졌다. 문이 막혀 있거나 누군가 안에 있다면 바깥에 나간 뒤 돌아오는 길까지 끊길 수 있었다.
“외부로 바로 나가기 전에 북쪽 계단부터 확인한다.” 태민이 말했다. “계단과 방화문 상태만 본다. 통로가 막혔으면 검문소 경로도 다시 계산해야 해.”
“연료를 구하러 가는 계획을 취소하는 건 아닙니다.” 세온이 말했다. “출발 전 경로 확인을 먼저 넣는 겁니다.”
도혁이 벽에서 몸을 떼었다.
“그 사이 민간 물류 거점 위치라도 듣겠습니까?”
“위치와 마지막으로 직접 본 시각만 말해 주세요. 안전하다는 평가는 빼고요.”
도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남쪽 버스 차고지 뒤 창고와 자신이 그곳을 본 때가 봉쇄 전날 저녁이라고 말했다. 연료가 지금도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세온은 그 정보를 군 검문소 경로와 섞지 않고 예비 경로 칸에 적었다.
윤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물었다. 병원 비상 연료 목록에서 직접 본 문구, 기억으로 보탠 위치, 지금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을 나누어 말하게 했다. 윤호는 지하 보일러실이 1순위, 약국 뒤가 보조 저장소였다고 답했다. 문건은 없고 기억만 남았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됐다.
“두 분 말이 다 맞을 수도, 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세온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새 합의를 만들지 않겠습니다. 이미 정한 목적은 환자 지원 시간을 벌 수 있는 연료 확인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출처는 경로의 근거가 아니라 위험 표시에 둡니다.”
도혁은 웃지 않았다. 윤호는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동의한다고 한 사람은 없었지만, 둘 다 자기 진술 옆의 빈칸을 직접 확인했다.
유리는 북쪽 계단 이야기를 듣고 3층 처치실 표시에 손가락을 댔다.
“위층에 환자가 더 남았는지도 확인되지 않았어요. 처치실 물품은 밀봉 상태를 봐야 하고, 사람을 발견하면 감염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정찰은 셋입니다.” 태민이 말했다.
“그 셋만으로 환자 상태를 판단하지 마세요.”
유리는 곧바로 자신이 간다고 하지 않았다. 먼저 기존 환자 둘의 호흡과 의식 변화를 다시 확인했다. 윤호에게 기록지를 읽게 하고, 어떤 변화가 생기면 임의로 장비를 조작하지 말고 즉시 돌아오라는 신호를 정했다. 그 확인이 끝나기 전에는 정찰 인원도 확정하지 않기로 했다.
하린은 태블릿에 저장된 병원 층별 안내도를 열었다. 실시간 내부망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정전 전 받아 둔 공개 안내 파일이었다. 북쪽 비상계단과 5층 창고 표시는 있었지만 문이 실제로 열리는지, 안에 무엇이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도는 길의 존재만 보여 줘요.” 하린이 말했다. “통과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세온은 그 문장도 장부에 적었다.
출발 준비 한 시간이 끝나 갈 무렵, 바닥에는 세 종류의 기록이 놓여 있었다. 확인된 여덟 사람의 원장, 주체를 모르는 MCP 접속 흔적, 그리고 북쪽 계단의 오래된 안내도. 어느 것도 혼자서는 결정을 대신하지 못했다.
태민이 서비스 복도 셔터를 약속한 높이만큼 올렸다. 차가운 공기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소리와 냄새부터 살폈다.
세온은 원장을 한 번 더 읽었다. 유리는 환자 둘 곁에서 마지막 측정 시각을 적었다. 윤호와 도혁은 각자 말하지 않은 것이 남은 얼굴로 서 있었다. 하린은 같은 로그의 사본이 두 군데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합의는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반복해서 생기지 않았다. 누가 무엇을 확인했고, 무엇을 모르는지 적은 뒤 각자의 자리를 맡을 때 비로소 형태를 가졌다.
북쪽 비상계단 정찰이 먼저였다. 연료 경로는 그 결과 뒤에 이어진다. 유리의 합류 여부는 환자 재평가가 끝난 다음 결정한다.
세온은 세 문장을 순서대로 적고 시계를 보았다. 오전 한 시 이십 분.
이번에는 아무도 출발 시간을 다시 정하지 않았다. 대신 정해진 시간 안에 무엇을 확인할지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